약 1백 50억년 전에 발생했던 빅뱅. 탄탄한 증거를 바탕으로 빅뱅이 최근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절체불명의 진공에너지가 관측되고 또다른 막 우주가 주장되기 때문이다. 최신우주론을 만나보자.
“태초에 무한하고 캄캄하며 텅빈 공간 카오스(혼돈)가 있었다. 뒤를 이어 넓은 가슴을 가진 대지(大地) 가이아와 영혼을 부드럽게 하는 사랑 에로스가 나타났다. 카오스로부터 그윽한 어둠 아레보스와 밤 닉스가 생겨났고, 아레보스와 닉스 사이에서 천공(天空) 아이테르와 낮 헤메라가 태어났다. 가이아는 별이 빛나는 하늘 우라노스와 바다 폰토스를 낳았고, 가이아와 우라노스 사이에서는 하늘과 땅을 채워줄 대자연의 존재들이 탄생했다. ”
기원전 8세기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헤시오도스가 쓴 ‘신통기’(神統記, Theogony)에 나오는 우주창조 신화다. 역사적으로 제일 먼저 우주창조를 질서정연하게 서술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우주를 창조하는 절대자를 제외한채 신을 포함한 만물이 자연히 탄생한 결과, 태초의 혼돈 카오스가 걷히고 질서 잡힌 우주, 즉 코스모스가 등장하는 스토리는 나름대로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우주는 어떻게 태어난 것일까. 인류가 밤하늘에 펼쳐진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며 최초로 떠올렸을 법한 의문이며, 사람이 크면서 자신의 사고 영역이 지구란 ‘틀’을 깨뜨리는 순간 처음 던질 만한 질문이다. 우주의 기원을 비롯해 우주의 구조·진화 등을 연구하는 과학, 즉 천문학 분야가 바로 우주론이다. 현대인이 흔히 아는 빅뱅우주론이 대표적인 예다.
빅뱅우주론이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우주창조 이야기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바로 관측된 사실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물론 신화 속의 가이아가 실제로 우라노스를 낳았는지 확인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던 태초의 현장을 직접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우주 어딘가 그때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을까. 실제로 우주에는 거리가 멀면 멀수록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뒷걸음질치는 은하들과, 천지사방 어디에나 모습을 드러내는 태초의 빛이 존재한다.
은하들이 거리가 멀수록 더 빨리 멀어진다는, 1929년 허블이 발견한 사실은 다시 말하면 우주가 팽창한다는 얘기다. ‘우주역사’라는 영화의 필름을 거꾸로 돌린다면, 즉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다면 은하들이 서로 가까워지고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이 한점에 모일 것이다. 이때가 바로 영화의 시작인 ‘빅뱅’의 순간이다. 빅뱅우주론은 우주팽창뿐만 아니라 빅뱅 30만년 후에 처음 나타난 빛인 우주배경복사를 예측한다. 실제로 우주배경복사는 1965년 발견됐다. 빅뱅으로 시작된 영화가 조금 진행되면 이 태초의 빛이 화면을 뒤덮으며 등장하는 것이다.
빅뱅으로 엮은 우주 시나리오는 나온지 채 1백년이 안됐지만, 여러 난관을 극복하면서 최근까지 표준우주모형의 핵심을 차지해 왔다. 하지만 최근 새로운 관측 사실이 밝혀지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제기되면서 표준우주모형의 왕좌가 위협받고 있다. 새로운 관측과 아이디어에 근거한 ‘최신우주론’이라는 블록버스터는 어떤 모습일까.
1. 브레이크 없이 가속팽창한다
정체 모를 에너지가 주범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우주팽창에 중력이 브레이크를 걸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력은 우주의 모든 물체 사이에서 서로 끌어당기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물리학자들이 예상한 우주팽창은 점차 느려지는 팽창이었다. 천문학자들도 우주팽창이 느려지는 모습을 직접 포착하려고 애를 써왔다. 마침내 1990년대 후반에야 그 해답이 나왔다. 거대한 망원경으로 초신성이라 불리는, 극적인 폭발로 생을 마감하는 별빛을 관측하자 우주팽창의 양상이 드러났다.
초신성은 우주에서 가장 밝은 현상 중의 하나여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도 관측될 수 있다. 가장 멀리 있는 초신성으로부터 나온 빛은 수십억년을 여행해 지구의 망원경에 도달한다. 때문에 이 빛은 수십억년을 거슬러 올라간 당시 우주팽창의 기록을 담고 있다. 먼 거리에 있는 초신성을 여럿 관측하면 우주팽창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알아낼 수 있다.
4년 전인 1998년 미국 워싱턴의 한 모임에서 로렌스 버클리연구소의 연구팀이 매우 거리가 먼 초신성을 여럿 관측한 결과를 내놓았다. 이들의 연구 결과는 우주가 지금보다 과거에 좀더 느리게 팽창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놀랍게도 현재 우주팽창은 가속중인 것이다. 우주팽창이 단순히 시간에 따라 느려질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연구팀도 자신들의 결과를 믿지 못해 몇번이고 다시 검토했을 정도다. 물론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비슷한 시기에 하버드-스미소니언 천체물리학센터 연구팀이 똑같은 결과를 내놓아 확증을 얻었다. 가속적으로 팽창하는 우주의 발견은 그해 ‘사이언스’에서 선정한 ‘올해의 대발견’에 뽑혔다.
1998년 두팀의 초신성 관측결과가 예측하는 가속팽창우주는 어떤 모습일까. 단순히 시간에 따라 팽창이 느려지는 우주의 모습이 아니다. 빅뱅이라는 대폭발이 일어난 후 우주가 팽창했고 처음에는 중력 때문에 우주팽창이 느려졌지만, 우주나이의 절반 정도 됐을 때 우주팽창이 가속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4월에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허블우주망원경이 가속팽창우주의 발견에 힘을 실어줬을 뿐만 아니라 가속팽창하기 시작한 시점을 훨씬 더 과거로 몰고 갔다. 우주망원경과학연구소의 연구팀은 허블우주망원경으로 관측했던 자료를 살펴보다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에서 가장 멀리 있는 초신성을 우연히 발견했다. 무려 1백억광년이나 떨어진 이 초신성을 연구한 결과, 1백억년 전 이후에 우주가 가속적으로 팽창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팽창하는 우주를 달리는 자동차에 비유해보자. 처음에 멀리서 빨간색 신호등을 보고 브레이크를 밟아 점차 달리는 속도를 줄인다. 그러다가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자 가속페달을 밟아 자동차의 속도를 가속시킨다. 이제 더이상 빨간색 신호등은 보이지 않고, 계속 가속페달은 작동한다. 가속팽창하는 우주의 미래는 이 자동차의 미래와 비슷하다. 가속팽창하는 우주에서 브레이크 역할을 담당하던 중력은 더이상 힘을 쓰지 못한다.
우주에서 팽창을 가속시키는 가속페달의 정체는 무엇일까. 무언가가 끌어당기는 중력과 반대로 밀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현대 우주론 학자들은 중력과 반대효과를 일으키는 이 무언가를 ‘암흑에너지’라 부른다. 직접 포착할 수도 없지만 아직 정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암흑’이라 하고, 물질이 아닌 형태이기 때문에 ‘에너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암흑에너지의 강력한 후보는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이 제기했다가 자신의 ‘가장 큰 실수’라고 고백하며 철회했던 ‘진공에너지’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최근 관측된 가속팽창우주에서는 ‘진공에너지’가 우주의 가속페달로 부활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최대 실수가 정답이 된 것일까.
진공에너지는 진공과 에너지의 합성어다. 물질도 없는 텅빈 우주공간인 ‘진공’ 곳곳에 어떤 에너지가 숨어있을 것이란 얘기다. 물론 양자역학적으로 진공은 에너지를 가질 수 있지만, 우주에 산재한 진공에너지의 실체는 무엇일지 쉽게 단언할 수 없다.
최근 초신성 관측으로 밝혀진 우주팽창의 양상. 빅뱅 이후 중력의 영향으로 감속팽창하던 우주가 1백억년 전 이후 가속팽창했다. 현재의 우주 팽창은 미래에 더 가속될 전망이다. 팽창하는 우주를 달리는 자동차에 비유하면 중력 브레이크가 더이상 역할을 못하고 가속페달만 작동하는 것이다. 가속페달의 유력한 후보는 진공에너지다.
2. 태초의 빛이 밝힌 평탄함
우주 전체밀도 중 65%가 진공에너지
천문학자들은 우주를 알기 위해 우주의 모양을 연구하기도 한다. 우주의 모양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지구의 모양을 알기 위해 배를 타고 지구를 한바퀴 돌던 옛사람들처럼 우주의 모양을 알기 위해 방대한 우주를 직접 가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숲속에서 전체 숲을 알기 힘드니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듯 더듬거릴 수밖에 없다. 다행히 우리에겐 우주에서 날아오는 빛이라는 정보가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에 따르면 공간이 휘어지면 빛도 휘어진 공간을 따라 움직인다. 즉 공간이 빛을 휘게 하는 정도를 측정하면 우주공간의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우주공간의 모양을 파악하기 위해 천문학자들이 관측하는 빛은 눈에 보이는 빛이 아니다. 온하늘에서는 우주배경복사라는 빛이 발견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멀고 오래된 빛인 우주배경복사는 현재 마이크로파의 형태로 관측된다. 이 마이크로파 신호에 나타나는 뒤틀림의 정도가 중간에 거쳐온 우주공간의 모양을 무심결에 드러낸다. 말안장형 우주에서는 우주배경복사의 특징적 조각이 예상보다 작게 보일 것이고, 구형 우주에서는 예상보다 확대돼 보일 것이다. 물론 평탄한 우주에서는 예상된 크기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우주배경복사에 대한 최근 관측결과에 따르면 우주는 믿기 어려울 만큼 평탄하다. 2000년 봄 최신장비로 우주배경복사를 관측한 국제공동연구진 두팀이 나란히 설득력 있는 증거를 ‘네이처’와 ‘천체물리학 저널 레터’에 각각 내놓았다. 부메랑(BOOMERANG)과 맥시마(MAXIMA)라 불리는 두팀은 지구대기의 방해를 피하기 위해 남극 상공 37km, 텍사스 상공 40km에 각각 기구를 띄워 태초의 빛을 관측했다. 이들의 결과가 1991년 지구궤도에서 활약한 우주배경복사탐사선 코비(COBE)보다 더 정밀하다는 점도 놀랍지만, 독립적으로 관측되고 분석된 결과가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우주배경복사에 나타난 미세한 요동은 예상된 크기였다. 지금까지 얻을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측정결과가 평탄한 우주 모양을 드러냈던 것이다. 평탄한 우주는 빅뱅 직후 일어났던 급팽창 현상(인플레이션)의 예측과 일치하는 결과다.
우주의 모양을 알면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과 에너지의 양을 알 수 있다. 물질과 에너지가 공간을 휘게 한다는, 아인슈타인이 밝혀낸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우주의 전체 밀도(물질과 에너지 모두 포함)가 특정한 값과 같으면 우주는 평탄한 모양, 이 값보다 크면 공 모양, 이보다 작으면 말안장 모양이 된다. 평탄한 우주를 말해주는 최신 자료는 우주의 전체 밀도가 특정한 값을 가진다는 의미다.
불행히도 이 결과는 현재까지 알려진 물질 밀도와 일치하지 않는다. 천문학자들이 빛으로 직접 관측하거나 중력 효과를 통해 예측했을 때 은하, 행성, 가스, 사람 등의 보통물질은 우주배경복사에서 관측된 전체 밀도의 5% 정도에 불과하다. 빛을 내지 않고 중력 효과만 나타내는 색다른 물질인 암흑물질도 전체 밀도의 30%를 차지할 뿐이다. 이들 물질의 양을 합해도 최신 우주배경복사 관측결과를 설명하지 못한다. 우주 밀도의 나머지 65%를 차지하는 존재는 무엇일까. 우리가 아는 물질과 에너지가 아니다. 암흑에너지일까. 과학자들은 다시 우주 곳곳에 숨겨진 진공에너지를 강력한 후보로 떠올린다.
이 시점까지 천문학자들이 관측한 우주의 모습은 아주 평탄하고 가속중이며 거의 텅 비어 있다.
3. 빅뱅 이전 말하는 미완의 이론
양자역학과 일반상대론 통합 시도
진공에너지는 밀어내는 효과를 가지기 때문에 우주를 가속팽창시키고, 우주 전체 밀도의 모자라는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고 진공에너지가 만능일까. 아니다. 진공에너지는 우주에 처음 생긴 후 양이 일정한 물질과 달리 우주공간이 늘어나면 양도 함께 늘어나는 괴상한 성질이 있다. 에너지 보존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진공에너지를 현재 알고 있는 이론으로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데 있다. 이론적으로 진공에너지를 계산해보면 현재 관측치보다 ${10}^{120}$배만큼 엄청나게 많아야 한다. 정말 진공에너지가 이 정도라면 우주는 굉장히 빠르게 팽창할 것이다. 사람의 경우라면 자신의 코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다. 당연히 물질이 모여 은하, 별, 행성을 형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이와 다르다. 현재 우주는 바로 당신이 존재할 만큼 섬세하게 짜여져 있다. 진공에너지와 물질이 현재 약 2:1의 비율로 말이다. 따라서 현재 진공에너지는 반발력이 크지 않기 때문에 매우 큰 우주적 규모에서만 작용한다.
진공에너지의 발견은 또다른 측면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과학자들은 가속팽창하는 우주에 중력의 양자적 성질을 암시하는 단서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4가지 힘(강한 핵력, 약한 핵력, 전자기력, 중력) 가운데 중력만이 아직까지 양자역학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진공에너지의 성질을 명백히 밝히다보면 중력을 포함한 모든 힘을 통합하는 최종이론으로 가는 길을 찾게 되지 않을까.
과학자들은 왜 모든 힘을 통합하려고 할까. 상상조차 힘들었던 빅뱅 순간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빅뱅 시점부터 빅뱅 후 ${10}^{-34}$초 사이에는 중력을 포함한 4가지 기본힘이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 빅뱅 순간에는 시간과 공간조차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원리에 따라 모호해지고 불연속적이다. 따라서 모든 힘을 통합하는 일은 거의 1백년 동안 부딪쳐 왔던 일반상대론과 양자역학을 성공적으로 결합시켜서 양자중력 통합이론을 만드는 것이다. 이 이론이 완성되면 뜨거운 빅뱅 순간의 우주를 다룰 수 있다.
최근 과학자들은 양자중력에 대한 희망을 끈이론에 걸고 있다. 끈이론은 10차원에서 길이가 ${10}^{-35}$m라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미세한 흔들리는 끈으로 자연을 기술하려는 이론이다. 4차원 이상을 다루고 수학적으로도 매우 복잡하다. 원리적으로 끈이론은 자연계의 모든 힘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론을 기술하는 식조차 아직 미완성이다. 또 ‘끈질긴’ 끈이론의 효과가 매우 높은 에너지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현재의 입자가속기로는 테스트조차 할 수 없다고 다른 과학자들은 비판한다. 그래서 끈이론가들은 관측될 수 있는 어떤 효과를 발견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우주론에 뛰어들고 있다.
당연히 목표는 빅뱅이다. 작은 끈으로 이뤄진 세계는 최소한의 크기를 가진다. 끈 자체의 크기보다 작게 줄어들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한히 작은 점 상태인 빅뱅 특이점을 피할 수 있다. 미세한 끈으로 구성된 우주는 어떤 크기보다 더 작게 줄이려면 더 커지려는 것처럼 반응한다. 마치 우주가 붕괴되는 단계로부터 튀어나오는 현상과 비슷하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빅뱅은 시간과 공간도 함께 태어난 탄생이 아니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것처럼 일종의 상태변화와 같은 순간이다. 빅뱅 이전에는 다른 종류의 시간과 공간이 있었고 아마도 전체 우주는 영원할지 모른다.
현재 우리가 관측하는 우주는 먼 거리에 있는 것일수록 과거의 모습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먼 거리의 모습은 우주배경복사다. 물질과 빛이 뒤엉킨 시기 이후 물질로부터 처음 분리된 빛이 바로 우주배경복사다. 당시 3천K이던 우주배경복사는 현재 2.73K로 관측된다.
4. 숨은 우주와 충돌로 탄생했을까
물 위에 떠있는 이파리 같은 우리우주
끈이론이 10차원(공간 9차원+시간 1차원)에서 기술된다면, 왜 우리는 4차원(공간 3차원+시간 1차원)만 볼 수 있을까. 끈이론가들은 9차원의 공간 중에서 3차원을 제외한 나머지 차원의 공간을 초기에 끈들이 돌돌 말아 억눌렀기 때문에 나머지 차원의 공간이 성장하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약간은 억지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다행히 몇년 전 끈이론이 끈뿐만 아니라 다양한 차원의 막(브레인, brane)을 허용한다는 사실이 발견돼 입지가 조금은 넓어졌다. 막은 고차원의 전체 우주에 속한 소우주라고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막이라는 새로운 물체의 존재는 새로운 이론의 존재를 암시했다. 새 이론은 M이론이라 불린다. 또 여분의 차원 가운데 적어도 1차원이 1mm 정도(끈이론에서는 거대한 규모)로 클 가능성이 제기됐다.
끈이론(M이론)이 제기하는 우주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우주를 포함한 거대한 전체 우주를 상상한다. 우리우주는 5차원의 공간에 떠다니는 3차원의 섬(브레인)이다. 마치 물탱크 위에 떠있는 이파리와 비슷한 모습이다. 또다른 막(우주)이 곁에 떠다닐지 모른다. 쿼크, 전자와 같은 입자, 그리고 전자기력 같은 힘은 우리우주의 막에 딱 붙어있다. 반면 중력은 우리우주의 막에 구속되지 않고, 막과 막 사이에도 작용한다. 채 1mm가 안되는 당신 곁에 또다른 우주가 있을지도 모른다.
숨어있던 또다른 우주가 우리우주에 충돌해 우리우주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최근 끈이론을 배경으로 제기된 몇몇 우주론에서 제기되는 주장이다. 1998년 미국 뉴욕대의 게오르기 드발리 박사와 코넬대의 헨리 타이 박사가 제기했던 ‘브레인 인플레이션’(브레인 폴) 이론이 그 중 하나다. 이 이론에서 우주는 미세한 끈과 차갑고 텅빈 막 여럿이 함께 들러붙은 양자적 혼돈 상태에서 나타난다. 만일 어떤 순간 막들 사이에 틈새가 생긴다면, 막들은 함께 떨어질 것이다.
각각의 막은 다른 막의 중력장이 자신의 3차원 공간에 에너지 장으로 불쑥 나타나는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에너지 때문에 막은 떨어지는 동안 1천배 이상 크기가 커지면서 빠르게 팽창한다. 특히 막들이 나란한 지역이 적어도 한곳이 있다면, 이들 지역은 다른 지역이 붕괴·수축하는데 반해 엄청난 팽창을 시작한다. 나란한 막이 결국 충돌할 때 에너지가 나오고 우리우주는 빅뱅우주론에서처럼 가열돼 물질과 열로 가득 찬다.
2001년 봄에는 미국 프린스턴대의 폴 슈타인하르트 교수팀이 또다른 종류의 막 충돌이론을 제안했다. 특히 빅뱅의 버팀목인 급팽창이론을 도입하지 않고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슈타인하르트 교수가 급팽창이론의 창시자 중 한사람이라는 점은 아이러니컬하다. 언론에는 거대충돌이라는 의미인 ‘빅 스플랫’(Big Splat)이라는 애칭으로 소개됐는데, 연구팀은 ‘에크파이로틱 우주’라고 자신들의 이론을 지칭했다. 에크파이로틱은 중세 스토아철학에서 세계의 불같은 죽음과 재생을 뜻하는 그리스어인 에크파이로시스(ekpyrosis)로부터 파생된 단어다.
빅 스플랫 이론은 휘어진 5차원 공간에서 평탄하고 텅빈 막 한쌍이 나란히 존재하던 분명치 않은 먼 과거에 시작된다. 이 상황이 끈이론의 진보된 버전에서 아인슈타인 식의 가장 간단한 해라고 연구팀은 말한다. 또 이 이론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어떤 다른 효과를 가정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논문에 “현실적으로 가능성 있는 우주모형을 제시한다”고 썼다.
5번째 차원의 벽을 형성하던 두개의 막은 아주 먼 과거에 양자요동이라는 무(無)상태로부터 불쑥 나타나고 표류해 흩어졌을 수 있다. 어떤 시기에 아마도 두개의 막이 특정 거리만큼 떨어졌을 때, 세번째 막이 하나의 막에서 벗겨져 나오고 다른 막(우리우주)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새로운 막이 여행하는 오랜 동안, 공간의 양자요동은 떠가는 막 표면에 잔물결을 일으킨다. 이 잔물결은 충돌 순간에 우리우주 전체에 걸쳐 은하가 탄생할 씨앗을 심는다. 이 순간이 빅뱅의 순간이다. 급팽창 없이 우리우주가 탄생한 것이다.
빅 스플랫 이론에는 너무 완벽하게 평탄한 막이 정확히 나란하게 있다는 점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반론이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아직까지 끈이론이 제시하는 우주를 검증할 만한 증거를 관측할 수 없다는데 있다.
물론 양자중력이 풀리고 끈이론이 입자물리에 제대로 연결될 때까지는 어떤 우주론이 승리할지 모른다. 그때가 되면 ‘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지 않을까.
빅 스플랫 같은 충돌우주론은 우주의 탄생을 막끼리의 충돌로 본다. 먼 과거에 휘어진 5차원 공간에 평탄하고 텅빈 막 한쌍이 나란히 있었다. 어떤 시기에 두개의 막이 특정 거리에 있을 때 세번째 막이 하나의 막에서 분리되고 다른 막(우리우주)으로 떨어진다. 중간에 공간의 양자요동으로 잔물결이 일어나고 잔물결은 충돌 순간 우리우주에 은하의 씨앗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