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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체분자 인지 기능 단백질 구조로 밝힌다

생체분자인지연구단

장미, 오 순수한 모순이여
수많은 눈꺼풀 아래 누구의 잠도 아닌
즐거움이여.

▒ 독일의 서정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묘비에 새겨진 시구다. 그가 장미를 모순이라 지칭한 이유는 무얼까. 그는 여자친구인 니메 베이에게 주려고 급히 장미꽃을 꺾다 가시에 찔렸다. 장미 가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릴케는 상처 부위를 붕대로 동여맨 채 베이 양에게 줄 연애편지를 쓰는데 전념했다. 그러나 곧 상처 부위에서 누런 고름이 나오며 팔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됐다. 패혈증이었다. 장미 가시에서 감염된 미생물이 그의 면역 체계를 무너뜨린 것. 그에게 장미는 사랑의 표현이자 생명을 앗아간 불운이었던 셈이다.

릴케는 젊었을 때부터 이미 삶은 ‘아직 오지 않은 죽음’이라고 읊조렸다. 릴케의 말대로 우리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에 머무는 까닭은 인체의 면역시스템 덕분이다. 생체분자인지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포스텍 생명과학과 오병하 단장은 “인체는 항상 외부에서 들어오는 미생물을 빈틈없이 막아낸다”며 “외부 미생물이 인체에 유해한지 무해한지 분별하는 생체분자의 인식기능은 생명 유지의 필수조건”이라고 강조했다.

적군 공격에 ‘봉화’ 신호 보낸다

건강한 인체의 면역계는 몸 속으로 들어오는 미생물이 인체에 유해한지 여부를 검사한다. 그리고 유해한 미생물을 발견하면 곧 면역작용을 개시한다. 그러나 면역 체계가 약하면 인식기능도 떨어지고 미생물을 인식하더라도 전달기능이 약해져 병에 걸릴 수 있다. 오 단장은 “면역 관련 단백질 가운데 한 개만 잘못돼도 생명을 잃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릴케의 목숨을 앗아간 패혈증은 상처부위에 미생물이 감염됐을 때 몸의 ‘선천성 면역계’가 과도한 반응을 일으키는 현상이다. 유해 단백질이 침입하면 몇 분 안에 선천성 면역세포 중 하나인 T세포가 이물질에 직격탄을 날린다.

오 단장은 선천성 면역반응이 일어날 때 유해단백질이 침입했다는 신호가 몸 곳곳의 세포로 전달되는 메커니즘에 호기심을 품었다. 자극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물질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은 있었지만 그 실체는 오리무중이었다. 그는 관련 단백질의 구조를 밝히면 유해 미생물에 어떤 단백질이 와서 붙고 그 단백질의 모양 변화에 따라 생체신호가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있으리란 가설을 세웠다.

그는 면역 체계가 아군과 적군을 정확하게 구별해낸다는 특성을 십분 활용했다. 생체분자는 적군만을 공격한다. 그래야 ‘10만’ 미생물 대군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수 있기 때문이다. 선천성 면역 체계는 적군으로 ‘펩티도글리칸’이란 분자를 인식한다. 펩티도글리칸은 모든 미생물의 세포벽을 구성하는 물질이다. 펩티도글리칸에 와서 붙는 분자는 외부 미생물을 인식하는 분자란 뜻이다.

오 단장은 펩티도글리칸 인지 단백질의 구조를 밝혀보기로 했다. 먼저 펩티도글리칸 인지 단백질을 결정으로 만든 뒤 X선을 쏘였다. X선은 단백질 결정 속 원자와 부딪혀 반사되거나 자기들끼리 간섭을 일으키며 검출기 사방에 ‘점’을 남겼다. 펩티도글리칸 인지 단백질의 구조가 나타난다는 말이다.

서서히 Y자형 펩티도글리칸 인지 단백질이 모니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두 팔의 한쪽 끝은 펩티도글리칸의 모양과 상보되는 구조였다. 인식 단백질의 구조가 드러나자 기능도 수면 위로 나타났다. 펩티도글리칸 인지 단백질은 분자가 한 개뿐이었으며 그 자체는 신호를 전달하지 않았다(off). 그러나 펩티도글리칸 인식 분자에 펩티도글리칸이 강하게 결합하면 면역계에 적이 침입했다는 신호를 전달했다(on). 면역단백질이 홀짝 규칙에 따라 적이 왔음을 알리는 일종의 ‘봉화대’(烽燧臺) 역할을 한 셈이다. 봉화 신호를 받은 면역계는 항균물질을 생산해 침입 미생물을 제거했다.

이 연구결과는 2003년 8월 ‘네이처 이뮤놀로지’와 2006년 3월 ‘생화학저널’에 실렸다. 생체신호를 전달하는 단백질 구조를 밝힌 이 연구는 염증반응은 물론 선천성 면역질환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있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인체에 침입하는 유해 미생물이 공통적으로 가진 펩티도글리칸을 인지하는 생체 면역분자의 3차원 구조. 가운데 있는 파란색과 노란색 분자가 수용체로 인간의 선천성 면역을 주도한다.


방향 알려주는 ‘단백질 우체부’

X선으로 단백질의 구조를 밝히는 연구는 생명의 비밀을 푸는데 유용하다. 이를 통해 연구팀은 최근 세포 속에서 단백질이 이동하는 메커니즘도 밝혔다. 세포에는 핵, 미토콘드리아, 리보솜, 골지체 같은 세포소기관이 여럿 있다. 이들 기관에는 모두 단백질이 있다. 그러나 세포에서 단백질을 만드는 소기관은 리보솜 한 곳뿐이다. 그렇다면 리보솜에서 생긴 단백질은 어떤 신호에 따라 다른 세포 소기관들로 이동할까. 이 ‘신호’를 알아내는 것이 오 단장의 연구목표였다.

세포에서 단백질이 촘촘한 소포체 막을 통과해 해당 세포기관으로 이동한 뒤 정확히 제자리에서 맡은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졌다. 미국 록펠러대 귄터 블로벨 교수가 원심분리기로 세포 내 소기관을 분리해, 기관마다 구성하는 단백질이 다르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그는 이 공로로 1999년 노벨상을 받았다. 연구 결과는 리보솜에서 만들어진 단백질이 다양하며, 각자의 집으로 이동하는데 특별한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블로벨 박사는 단백질마다 ‘우편번호’를 가져 제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가설을 제시했다.
 

리보솜에서 만들어진 단백질이 세포 소기관으로 이동하는 방법


어떤 단백질이 우편번호 역할을 하고 어떤 단백질이 우편번호에 따라 단백질을 배달하는 우편 배달부 역할을 하는 단백질인지를 밝히는 것이 단백질 구조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숙원과제였다. 단백질은 ‘캡슐’에 둘러싸인 채 이동한다. 그리고 캡슐 표면에 우편번호를 찍는다. 비록 캡슐의 모양이 같더라도 우편번호가 다르기 때문에 배송지 정보가 헷갈릴 염려는 없다. 단백질이 세포안에서 배달 코스를 돌다가 도착지에 다다르면 ‘우편 배달부’가 우편번호를 인식해 해당 단백질을 데려간다.

오 단장은 ‘우편 배달부’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밝히면 단백질의 이동 비밀을 밝힐 수 있다고 예상했다. 방사광가속기를 이용한 결과 우편 배달부 는 7개의 단백질로 이뤄진 복합체 ‘TRAPP’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 연구결과는 2006년 11월 17일 생명과학분야 국제저널인 ‘셀’(Cell)에 실렸다.

몸 속에서 아군과 적군을 알아보거나 세포에서 자신이 배달될 곳을 정확히 아는 것 모두 자신의 짝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작용에서 비롯된다. 오 단장은 “생체분자의 구조를 알아야 상대가 자신의 짝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서로를 인식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할 만큼 중요하다.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밝히는 방사광가속기의 내부 모습. 방사광가속기가 내놓은 X선은 단백질을 통과하면서 단백질의 3차원 모양을 컴퓨터에 구현한다.


Interview 오병하 단장
한계를 깨는 열혈 커플매니저

“생체분자는 눈에 안 보일 정도로 작지만 저마다 천생연분이 있습니다.”

오병하 단장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생체분자의 짝을 찾아주는 일에 푹 빠졌다.

단백질의 모양을 밝혀내면 어떤 단백질들이 짝이 될지 추측할 수 있다. 그는 “A단백질이 자물쇠 모양이라면 A단백질의 천생연분은 열쇠 모양 단백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A단백질이 양전기(+)를 띠면 짝이 되는 단백질은 음전기(-)를 띤다. 손을 잡을 때도 한쪽이 손바닥을 위로 보이게 하면 다른 한 쪽은 손바닥을 아래로 향해야 맞잡을 수 있듯, 생체분자도 모양과 정전기가 상보적으로 맞아야 결합할 수 있다.

생체분자의 모양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그가 1985년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생물물리학 박사 과정에 있을 때부터다. 그는 당시 핵자기공명장치(NMR)를 이용해 단백질의 구조를 밝혔다. NMR은 원자핵이 전자기파를 흡수하는 성질을 이용해 분자를 이루는 원자 사이의 거리와 각도를 측정하고 이를 분석해 분자의 구조를 파악하는 장비다. 그런데 분자의 크기가 크면 NMR로 구조를 알기 힘들다. 박사후연구원 시절 NMR을 뒤로 하고 X선 결정학에 뛰어들었다. 그 당시 그의 지도교수는 전달RNA(tRNA)의 구조를 밝혀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김성호 교수다.

파장이 짧은 X선을 이용하면 NMR로 보기 어려운 큰 단백질의 구조를 밝힐 수 있다. 또한 X선을 이용하면 단백질의 구조를 원자수준까지 밝힐 수 있어 유용하다. 비록 단백질을 결정으로 만든 뒤 X선을 통과시켜야 하므로 번거롭지만 숲의 나뭇잎까지 보듯 세세하게 구조를 볼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며 항상 한계를 깨온 오 단장은 2001년 10월 과학기술부 이달의 과학기술자 상을 수상하고, 2004년 포스텍 홍덕 젊은 석좌교수에 선정되는 등 과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1994년 포스텍 생명과학과 교수로 부임한 뒤 총 78편의 논문을 냈다. 이 가운데 임팩트팩터(IF) 10 이상인 저명한 저널에 낸 논문은 총 12편. 이 때문에 그의 논문을 인용한 횟수는 2007년 말 1600회를 넘어섰다.

오늘도 생체분자의 모양을 밝혀 짝을 찾아주는 ‘커플매니저’ 역할에 충실한 열혈 과학자의 모습에서 자부심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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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목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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