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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외선과 형광안료가 빚어낸 색채의 향연

착시가 연출한 어둠 속 판타지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캄캄한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문뜩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이 떠올랐다. 강원도 봉평의 비탈밭에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이 푸르스름한 달빛에 젖어 빛나는 광경도 이렇게 아름다웠을까. 체코 프라하의 유명한 블랙시어터(black theater)인 이미지시어터가 지난 1월 13일까지 한국에서 펼친 공연 ‘더 베스트 오브 이미지’는 야광빛 색채의 향연이었다. 대사 없이 무용수들의 동작만으로 구성된 마임공연이었기에 시각적 이미지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무대 위에는 달빛 대신 자외선을 방출하는 조명인 ‘블랙라이트’가 쏟아졌다. 검은색을 배경으로 물체에 특수 안료를 바른 뒤 블랙라이트를 비추면 안료를 바른 부분만 형광으로 보인다. 이 원리를 이용한 극장이 바로 블랙시어터다. 블랙시어터는 과거 중국 황실에서 유래해 유럽으로 전파됐고 현재 체코 프라하에만 100여 개가 있다.
 

푸른 날개를 단 배우가 갑자기 하늘로 날아오른다. 검은 배경 뒤에 무엇이 감춰져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관객은 환상적인 기분을 느낀다.


제1막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착시의 힘

공연의 막이 오르자 푸른 형광빛 날개를 단 배우가 공중으로 서서히 날아오른다. 무대의 배경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휩싸여있어 배우를 끌어올렸을 만한 무대장치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객은 탄성을 내지른다. 사람의 눈으로 들어온 시각 정보는 외부 자극에 의존하는 ‘자료주도적’ 처리 또는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에 기반하는 ‘개념주도적’ 처리를 거친다. 몽환적인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보는 관객들은 시각 정보만으로는 상황을 완전하게 인지할 수 없다. 이때 지식이나 경험을 이용해 추론하는데, 공연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볼 수 없는 인물이므로 ‘요정이니까 날아오르겠지’라고 받아들인다.

물체를 이루는 윤곽선 없이도 그 물체가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는 까닭은 인간의 뛰어난 시각적 능력 덕분이다. 글자의 그림자만 단서로 주어져도 형태를 지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은 예다. 공연에는 몸의 옆선에만 형광 물질을 바른 배우들이 등장하는데, 모양에 따라 사람으로도 동물로도 보인다.

신체의 다른 부분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선이 만드는 모양에만 집중해 물체의 형태를 ‘복원’하는 것. 3차원 공간에서 형태를 지각하는 데는 1초도 안 걸리지만 그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첫 번째로 사물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고 색채나 명암, 질감 같은 세부 정보를 탐색하는 일은 그 다음 단계다.

물체의 시각정보를 얻은 관찰자는 과거 자신이 경험했거나 배웠던 형태 가운데 비슷한 것이 있는지 찾아낸다. 형태에 관한 지각심리학이론에 따르면 어떤 사물의 일부분만 보더라도 가장 기본이 되는 성분을 지각할 수 있다면 본래의 형태를 복원해낼 수 있다. 또 물체를 지탱하는 기본 축으로부터 전체 구조를 파악할 수도 있다.
 

물체를 이루는 윤곽선이 없더라도 가장 기본이 되는 성분이나 중심축을 단서로 원래의 형태를 복원할 수 있다.


제2막 어지러운 형광빛에 매혹되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주변의 밝기나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조금씩 다른 상(像)으로 망막에 맺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일관되게 세상을 인지할 수 있는 까닭은 뭘까. 망막에 맺히는 상만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아마 시시각각 바뀌는 이미지 때문에 꽤나 혼란스러울 것이다. 햇볕 아래에서 밝게 보이던 흰 종이가 어두운 실내조명 밑에서는 회색으로 보이고, 사무실의 문은 누군가 열 때마다 형태를 바꾸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다행히 우리는 밝기와 색채, 형태, 크기를 일관성 있게 인지할 수 있는 지각체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공연을 보던 관객들은 색채에 대한 지각이 무참히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상자의 내부에 각기 다른 색깔의 조명을 차례로 비추고 조그만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면 조명에 따라 면의 색이 바뀌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무대에서는 블랙라이트에 반응해 방출되는 가시광선의 빛깔에 따라 배우의 몸이 빨강, 초록, 파랑으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배우의 몸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는 셈인데, 다채로운 형광빛 때문에 눈은 물체의 원래 색깔이 무엇인지도 잊은 채 환상적인 기분을 느낀다. 자연 상태에서도 조명이 방출하는 빛에 따라 물체의 색이 조금씩 달라지지만 고유의 색을 잃어버릴 정도는 아니다.
 

현란한 형광빛 무대를 바라보고 있으면 색채에 대한 지각체계가 깨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제3막 평면에서 공간을 느끼다

바둑판 모양의 탄력 있는 그물로 볼록한 공을 덮는다고 가정해보자. 공의 중심으로 갈수록 그물 격자의 크기가 커지고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격자의 크기가 작아진다. 이 현상을 2차원 평면에 적용하면 3차원 공간의 느낌을 살릴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공간을 채우는 격자의 밀도가 낮으면 가까이 있는 물체로, 밀도가 높으면 멀리 있는 물체로 인지하는 경향이 있다. 소실점을 중심으로 가로수 길을 그릴 때 시선과 가까운 곳일수록 큰 나무를 성글게 배치하는 방법이 원근감을 살리는 데 효과적인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한 화면 안에서 사물의 밀도를 변화시키면 입체감을 줄 수 있다.

공연에서 배우가 들고 있는 그물은 때로는 평평하게, 때로는 입체감 있게 느껴진다. 어둠 속에서 그물 모양만 보고도 입체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그물 속 격자의 밀도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물망의 간격이 일정하면 평면적으로, 일정하지 않으면 입체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착시현상을 이용한 예술이 옵아트(optical art)로 단순한 평행선이나 바둑판무늬, 동심원 같은 형태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그림에 입체감과 운동감을 더한다. 점들 사이의 간격을 변화시켜 평면에 볼륨감을 더하고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을 자아내기도 한다. ‘망막의 예술’ 또는 ‘지각적 추상’이라고도 불리는 옵아트처럼 착시현상을 이용한 공연 ‘더 베스트 오브 이미지’는 환상적인 시각적 자극을 선사했다.
 

점들 사이의 밀도를 변화시켜 빙글빙글 회전하거나 빨려들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자외선 방출하는 블랙라이트의 비밀

빛이 물체에 부딪히면 반사되거나 굴절된다. 이런 경우 물체는 에너지를 흡수하거나 흡수한 에너지의 일부를 방출하기도 한다. 블랙라이트가 방출하는 자외선은 파장이 290~400nm 정도로 짧으며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블랙라이트를 무대에 비춰도 주위는 어둡게 보인다. 그러나 형광 안료를 바른 물체에 블랙라이트를 비추면 안료가 자외선을 흡수한 뒤 그보다 파장이 긴 가시광선을 방출하기 때문에 녹색이나 청색, 황록색 같은 선명한 색을 띤다.

빛이 갖는 에너지는 파장이 짧을수 록 크다. 자외선을 형광 안료에 쪼여 발생한 형광빛은 중간에 열로 소모된 에너지를 빼면 원래 쪼여준 자외선보다 에너지가 줄어든 상태다. 따라서 빛의 파장이 자외선보다 길어져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광선으로 바뀐다.

배우들은 몸에 텡스텐산칼슘이나 텅스텐산마그네슘, 규산아연 같은 형광물질이 포함돼있는 안료를 바른다. 이 안료는 가시광선 아래에서는 모든 파장의 빛을 반사해 흰색으로 보이지만 자외선을 쪼이면 빛을 흡수했다 재방출하며 선명한 형광빛을 낸다. 현재 사용하는 형광물질은 수백 가지가 넘는데, 어떤 원소로 조합된 형광물질을 사용했는지에 따라 방출되는 빛의 색깔도 달라진다. 블랙라이트와 다양한 형광물질을 조합하면 대부분의 색깔을 연출할 수 있다. 블랙라이트에서 방출되는 자외선의 양은 햇빛에서 방출되는 양의 수백만 분의 1에 불과하므로 인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예전에 블랙라이트는 위조지폐를 가려내거나 기계의 연료탱크에 새는 곳이 있는지 알아내는 데 많이 쓰였다. 형광 잉크로 표시해둔 지폐나 형광체 분말을 넣은 연료탱크를 블랙라이트로 비춰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지문채취가 필요한 범죄 현장이나 과학관, 공연장의 조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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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신방실 기자
  • 박수진 박사후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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