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준호 KAIST 기계공학과 교수 하면 ‘휴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휴보는 사람처럼 두 다리로 걷고 자연스레 악수도 하는 한국의 대표적 인간형로봇이다. 오 교수는 ‘휴보의 아버지’로 유명한 로봇공학자다.
지난 11월 중순 두바이에서 열린 미국 전자전기학회(IEEE) 컨퍼런스 ‘혁신과 IT’에 참가한 그는 ‘휴머노이드 걷는 로봇’이란 주제로 기조연설을 하고 600여명 앞에서 휴보의 움직임을 시연하기도 했다. 휴보의 인기는 대단하다. 2005년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정상회의에서 21명의 각국 정상이랑 악수도 했고 미국, 캐나다, 영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싱가포르 등에서 초청도 받았다.
연구실에 들어서자 환한 얼굴로 기자를 맞이한 오 교수는 한쪽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천체망원경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휴보를 제작한 기술을 총동원하고 3년간 수억 원을 들였지요. 부인한테 구박받으면서요(웃음). 외관은 김영세 이노디자인 대표가 디자인했고, 중요 부품인 초정밀 기어는 손수 만들기 위해 기어 깎는 장비까지 직접 제작했답니다.”
커다란 삼각대 위에 놓여 있는 이 망원경은 원하는 별을 지목하면 알아서 찾아간 뒤 추적하는, 세계에서 하나뿐인 고성능망원경이란다. 오 교수의 전공이 잠시 헷갈린다.
사실 오 교수는 개기일식 마니아다. 개기일식은 달이 태양을 삼키는 ‘우주쇼’다. 1999년 터키에서 개기일식의 마력에 사로잡힌 뒤 일식이 벌어질 때마다 하던 일도 멈추고 세계 어디든 가리지 않고 달려가 ‘검은 태양’을 촬영했다. 개기일식의 환상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담기 위해 고성능망원경까지 손수 제작했던 것이다.
걸음걸이가 사람처럼 부드러운 일본의 인간형 로봇 ‘아시모’를 보고 충격을 받아 아시모를 능가하는 로봇을 만들겠다고 마음먹고는 휴보 제작에 뛰어들었던 오 교수. 그는 어릴 때부터 로켓부터 자동차까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뚝딱뚝딱 만들어야 직성이 풀렸다.
통나무배에서 바람 자동차까지 뚝딱뚝딱
어린 시절 그의 방은 공작실이었다. 멀쩡한 장판을 걷어낸 뒤 시멘트 바닥에 책상 대신 작업대를 놓고, 납땜은 기본이고 통나무를 깎거나 화약을 제조하기도 했다. 작업대 옆에는 정교하게 납땜하기 위해 직접 개조한 인두도 걸려 있었다.
그는 자동차, 배, 로켓을 만들어도 실제 움직이는 걸 제작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길이 50cm의 배를 만들었다. 나왕 통나무를 배 모양으로 깎은 뒤 초칠을 하고 모터를 달았는데, 시계에서 떼어낸 기어를 갖다 쓰고 무전기를 개조한 무선수신기를 장착한 다음 배를 원격 조종했다. 여의도 벌판에서는 길이 60cm짜리 ‘바람 자동차’를 제작해 움직이는 실험도 했다. 베니어합판으로 만든 동체에 스프링 완충장치까지 넣은 바퀴를 붙이고 무선조종비행기 엔진에다 프로펠러를 함께 장착했는데, 자동차는 프로펠러가 돌 때 나오는 바람으로 제법 빠르게 움직였다.
중학교 때 로켓을 만들면서는 위험천만한 순간도 있었다. 화약을 빻아 가루로 만들다가 손을 뎄고, 로켓 본체에 연료를 넣다가 폭발사고를 당했다. 폭발 잔해가 그에게 튀지 않아 다행이었다. 3단 로켓을 발사하다가는 2단이 옆집에 떨어져 잔디밭을 홀랑 태우는 사고도 쳤다.
이것저것 만드는 활동 못지않게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백과사전 서핑’을 즐겼다. 요즘 학생들이 웹서핑을 하듯 그는 백과사전을 뒤지며 관심 가는 대목을 탐독했다. 한번 잡으면 시간 가는 줄 몰라 10시간씩 서핑에 빠지기도 했다. 백과사전은 유학 가기 전까지 그의 보물창고였는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늘어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세계 최고의 로봇망원경
“‘오준호 표’ 망원경은 별을 찾고 추적하는 성능에서 세계 최고 라고 자부합니다. 휴보 기술로 제작한 로봇망원경이니까요.”
별과 우주에 대한 그의 관심도 책에서 시작됐다. 초등학교 시절 그의 아버지가 1년 정도 미국에 가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버지가 그에게 ‘우리 태양’(Our Sun)이라는 컬러화보집 양장본을 선물했다. 그는 태양부터 시작해 멋진 사진과 함께 펼쳐진 우주 이야기에 사로잡혀 그 책을 닳아 해어질 정도로 읽었다. 화성의 위성인 포보스와 데이모스에 대한 내용은 그때 처음 접해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초등학교 때 천체망원경을 손수 만든 것은 그의 이력을 보면 당연한 과정이었다. 구경 40mm에 배율 30배짜리 갈릴레이망원경을 제작해 17세기 갈릴레이처럼 달의 크레이터(운석충돌구덩이), 목성과 그 위성도 관찰했다.
제대로 된 망원경은 값이 비싸 KAIST 교수가 된 뒤에야 만져볼 수 있었다. 1992년 공동 연구 차 러시아에 갔다가 벼룩시장에서 100달러짜리 반사망원경을 구입했고 세관에서 욕을 먹어가며 국내로 들여왔다. 1996년 미국에 갔을 때는 5000달러짜리 반사망원경을 샀고 그 뒤 별 사진을 찍기에 적합한 구경 100mm 굴절망원경을 구입했다. 지금 갖고 있는 망원경은 구경 125mm 굴절망원경이다. 물론 이 망원경의 핵심은 별을 자동으로 추적하는 시스템이 장착된 삼각대다.
“별을 정확하게 찾아가고 추적하기 위해서는 일반 업체에서 만드는 1급기어보다 훨씬 좋은 초정밀 기어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기계를 손수 제작해 초정밀 기어를 깎았죠. 그 다음엔 로봇 구동 알고리듬을 이용해 기어가 연결된 모터의 각도를 실시간으로 미세하게 움직이도록 만들었답니다. 이렇게 완성한 망원경은 별을 찾고 추적하는 성능에서 세계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휴보 기술로 제작한 로봇망원경이니까요.”
2001년 6월 오 교수는 로봇망원경을 갖고 아프리카 잠비아로 출동했다. 21세기 들어 첫 개기일식이 그곳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2002년 6월에는 한일월드컵을 뒤로한 채 금환일식(달이 태양의 한복판만 가리고 둘레를 가리지 못해 태양이 고리 모양으로 보이는 현상)을 만나러 태평양으로 날아갔다. 서태평양 사이판 섬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티니안 섬에서 ESPN 중계를 통해 한국과 미국의 조별예선전을 보고 나서 일식을 관측했다.
2004년 12월에도 호주 시드니 서부해안에서 개기일식이 벌어졌지만, 이때는 가고 싶어도 도저히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휴보를 데리고 영국에 머물던 노무현 대통령에게 가기로 약속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2006년 3월 아프리카 북부와 서남아시아에서 개기일식이 펼쳐졌을 때는 만사 제치고 터키로 달려갔다. 안탈리아 해안에서 개기일식을 촬영했는데, 막상 일식이 시작되자 뜻밖에 해풍이 심하게 불어 장비가 흔들렸다. 그동안 계속 장비를 업그레이드하고 몇 차례 촬영을 시도했지만 일식 사진은 모두 그의 성에 차지 않았다.
“남들은 멋진 사진이라고 하지만 제 욕심의 10분 1도 안 차요. 일생에 제 마음에 드는 사진을 꼭 하나 찍고 싶어요.”
별 보면 아이디어 샘솟아
별이나 일식을 관측하고 망원경을 제작하는 ‘취미’ 활동이 휴보를 제작하는 데 어떤 영감을 줄까. “로봇망원경이나 휴보나 정밀도와 완성도가 중요한 기계라는 점에서 똑같죠. 그러나 휴보는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지만, 로봇망원경을 갖고 천체사진을 찍다 보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차분해져요. 그렇게 마음을 비우면 좋은 아이디어도 떠올라요.”
곧 시속 5km로 뛰는 휴보2를 선보이겠다는 오 교수는 휴보 기술을 이용해 실용성 있는 로봇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러면서도 개기일식 관측에 대한 욕심도 감추지 않았다.
“2008년 8월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로 개기일식을 관측하러 떠날 생각입니다. 2035년 9월에는 평양에서 개기일식이 예정돼 있는데, 이때까지 건강하면 평양 개기일식도 꼭 보고 싶어요.”
재치만발 돌발문답 3
휴보는 애물단지?
1. 휴보랑, 로봇망원경이랑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내게 즐거움을 주는 로봇망원경을 선택하겠다. 사실 휴보는 내 속을 엄청 썩이는 ‘애물단지’다(웃음).
2. 별을 보며 데이트 신청을 해본 적이 있는지?
없다. 별 보러 가면 깜깜한 곳에서 만난 뒤 헤어져 상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별 보는 사람들 사이에 ‘얼마나 별 볼 일 없으면 별 보러 오겠냐?’는 농담도 있다. 아내도 한두 번 별 보러 함께 갔는데 재미없어 하더라.
3. ‘2007년 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기술인’에 뽑힌 10인 가운데 사회문화 부문에 선정됐다. 과학기술자로서 학술 분야에 선정되고 싶진 않았나?
학술 분야에 선정됐다면 학자로서 영예였을 테지만, KBS에서 나를 사회문화 부문에 추천한 걸로 알고 있다. 지금까지 휴보가 학술적 공헌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현재 열심히 연구하고 있으니까 앞으로 학술적 성과도 나올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일반국민에게 과학을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내가 즐거워 하는 연구지만 나의 연구성과를 과장되지 않게 알려 다른 사람도 즐겁게 해줄 수 있다면 좋지 않은가.
생생현장 따라잡기
황홀한 터키 개기일식 관측기
별똥별이 비처럼 쏟아지는 유성우, 긴 꼬리를 자랑하는 혜성의 출현, 여러 행성의 정렬 등 다양한 우주쇼 가운데 압권은 두말할 나위 없이 개기일식이다.
2006년 3월 27일 밤 터키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터키 남부의 유명 휴양지 안탈리아로 이동해 일식을 관측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물색했다. 고도가 낮아 어디서나 해를 볼 수 있는 해안 쪽을 관측 장소로 정했다. 드디어 개기일식 당일인 29일 오전 8시에 자갈 해변으로 출발했다. 무게만 50kg이 넘는 망원경을 설치하자 주변에 현지 경찰 5명이 배치됐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경호를 서주었다. 정오를 넘어서자 태양이 조금씩 가려지기 시작했다.
오후 1시 54분이 되자 갑자기 어두워졌고 태양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일부 햇빛만 달 표면의 골짜기 사이로 빠져 나와 ‘다이아몬드 반지’처럼 보였다. 이때부터는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 맨눈으로 태양을 바라볼 수 있었다. 개기일식(total eclipse)이 벌어진 것이다! 가슴에 찌릿한 전율과 함께 한없는 환희가 몰려온다.
‘검은 태양’ 둘레로 대기의 가장 바깥층(코로나)과 함께 진홍빛 수소기체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모습(홍염)이 장엄하게 드러났다. 홍염에서 나온 빛은 달 표면과 지구 대기를 지나면서 아지랑이처럼 꿈틀거리는 듯했다. 주변 하늘은 마치 초저녁에 땅거미가 지듯이 검푸르게 변하며 밝은 별을 토해냈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개기일식의 장관은 3분이 넘게 지속됐다.
일식은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완전히 끝났다. 다음날 이스탄불로 이동해 귀국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