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주방이 '실험실'인 분자요리

음식 먹을때 경험하는 감각 연구한다

요리 과정, 즉 식재료의 변형을 일으키는 현상은 근본적으로 화학과 물리학 이상의 것이 아니다.
- 에르베 티스, 『분자요리』중에서-

1988년 프랑스 화학자 에르베 티스와 헝가리 물리학자 니콜라스 쿠르티는 요리의 물리·화학적 측면에 대한 국제 워크숍을 준비하던 중 이 분야에 적합한 이름을 짓기로 했다. 에르베 티스가 ‘분자요리’(Molecular Gastronomy)라는 용어를 제안하자 니콜라스 쿠르티는 화학 냄새만 난다며 ‘분자물리요리’라고 부르자고 했다. 티스는 거기에 따랐지만 1998년 쿠르티가 사망하자 다시 ‘분자요리’로 바꿨고 사람들은 간명한 이 용어를 더 선호했다.

분자요리의 창시자 에르베 티스와 그의 철학을 실제 요리에 적용한 천재 요리사들 덕분에 오늘날 분자요리는 미식가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5월 영국 음식전문지 ‘레스토랑’이 발표한 ‘세계 50 베스트 레스토랑’ 랭킹을 보면 1, 2, 3위를 분자요리 레스토랑이 휩쓸었다. 연중 6개월만 문을 열고 3개월은 휴가, 3개월은 새로운 메뉴를 연구한다는 분자요리 레스토랑의 대명사 스페인의 ‘엘 불리’(El Bulli)가 1위를 차지했고 영국의 ‘팻 덕’(The Fat Duck)과 프랑스의 ‘피에르 가녜르’(Pierre Gagnaire)가 뒤를 이었다.

도대체 분자요리가 무엇이기에 미식가들 사이에 이 같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걸까. “식품과학이 식품의 성분과 구성을 다룬다면 분자요리는 요리 과정의 변형과 음식을 먹을 때 경험하는 감각 현상을 연구한다.” 에르베 티스의 정의를 음미하면서 분자요리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멜론 캐비아 만들기^과육이 주황색인 멜론의 과즙으로‘캐비아’를 만들 때 (과정은 42쪽 사진 참조) 핵심은 젤리화 반응이다. 과즙에 녹아있던 알기네이트 분자가 칼슘과 만나 엉키면 서 젤리 피막이 만들어진다.
 

액체를 공 속에 가두는 법

19세기 프랑스 화가 조르주 쇠라는 물감을 섞을수록 채도가 떨어지는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다. 그 결과로 나온 기법이 바로 ‘점묘법’. 원색의 물감을 작은 점으로 찍어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공원의 풍경을 환상적으로 재현한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는 신인상주의의 대표작이다.

분자요리사들 역시 요리를 맛보기 직전까지 식재료의 맛과 향을 보존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식재료가 액체인 경우 어떻게 한 접시에서 다른 재료들과 섞이지 않게 만들 수 있을까. 이들은 천연고분자를 엉키게 해 피막을 만들어 액체를 담는 방법을 개발했다.

멜론 과즙이 들어있는 구(球)를 만들어보자. 먼저 미역이나 다시마 같은 갈조류의 세포벽을 이루는 성분인 알긴산을 추출해 만든 알기네이트(alginate)를 과즙에 적당량 넣어 녹인다. 다른 그릇에는 염화칼슘(CaCl₂)을 물에 녹인다. 알기네이트가 녹아있는 과즙을 염화칼슘 수용액에 떨어뜨리면 주황색 과즙이 퍼지지 않고 그대로 구형을 유지한다. 표면이 음전하라 서로 밀쳐 퍼져있던 알기네이트 분자가 두 액체의 경계면에서 양전하인 칼슘 이온을 만나 서로 엉키면서 젤리 피막을 형성한 것. 마치 물고기 알 같아 엘 불리에서는 ‘캐비아’라 부른다.

접시 위에 놓인 현무암의 실체

엘 불리의 분자요리사들은 거품을 에어(air), 즉 공기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넣고 우유거품을 얹은 카푸치노를 즐겨 마시지만 분자요리의 거품 재료는 다양하다. 당근이나 녹차 잎 같은 야채는 물론 벌꿀도 거품으로 바뀌어 요리를 장식한다.

보통 거품을 내려면 크림이나 달걀이 들어가야 한다. 여기에 들어있는 레시틴이란 단백질이 거품을 오래 유지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물은 표면장력이 커 거품을 내도 곧 터진다. 레시틴은 물 표면에 분포하면서 표면장력을 낮춰준다.

그런데 이런 원료는 자체 풍미가 강해 주재료의 맛과 향을 덮어버린다. 엘 불리의 요리사들은 레시틴처럼 거품을 안정화시키는 성분을 함유한 식재료를 찾았다. 그 결과 근대의 뿌리와 당근이 그 자체만으로도 안정적인 거품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순수한 물이나 은은한 향이 일품인 장미수(rose water)로 거품을 만들 때는 콩에서 추출한 레시틴 가루를 첨가한다. 제주도에 여행 갔다가 가져온 것 같은 구멍이 숭숭 뚫린 시커먼 현무암에 스푼을 넣으면 푹 들어가며 덩어리가 떨어져 나간다. 현무암의 실체는 얼린 초콜릿 거품.
 

질소-카이피리냐^브라질 전통 칵테일인 카이피리냐는 식전주로 인기다. 엘 불리는 액체 질소를 이용해 즉석에서 카이피리냐 셔벗을 만들어 내놓는다. 금속용기에 카챠카, 라임주스, 설탕물을 넣고 액체질소를 부어 거품기로 저어주면 셔벗이 만들어진다.


액체질소로 급속냉동

공기의 80%를 이루는 분자인 질소(N₂)는 언제나 기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온도를 영하 196℃ 밑으로 낮추면 질소는 물처럼 투명한 액체가 된다. 질소를 그릇에 담으면 하얀 연기가 피어난다. 공기 중의 수분이 차가운 질소 기체와 만나 응결돼 나타나는 현상이다.

엘 불리에서는 식사 테이블 위에서 즉석으로 칵테일 셔벗을 만들어준다. 사탕수수를 증류한 브라질 민속주인 카챠카에 라임과 설탕을 섞은 뒤 액체질소를 붓고 거품기로 잘 저어주면 칵테일 셔벗 ‘질소-카이피리냐’(nitro-caipirinha)가 완성된다.

액체질소는 코팅을 하는데도 자주 쓰인다. 딸기 무스에 크림을 묻혀 액체질소에 담그면 코팅된 크림이 얼면서 하얀 볼이 만들어진다. 입안에 넣으면 차가운 크림이 녹으면서 무스의 새콤한 딸기향이 퍼진다.
 

복숭아 도넛과 피스타치오를 곁들인 라임 아이스크림


요리에도 유머가 있다

엘 불리의 요리사들은 매년 4월 문을 열기 전 3개월 동안 새로운 요리를 연구한다. 그 가운데는 기술적으로 난해한 과정이 필요한 요리도 있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로 고객들에게 신선한 재미를 주는 아이템도 많다.

디저트로 나오는 하얗게 굳은 설탕 시럽이 발라져있는 도넛은 사실 복숭아로 만들었다. 기름에 튀긴 도넛의 빛깔을 내기 위해 가운데를 뚫은 복숭아를 프라이팬에서 살짝 조리했다. 이 과정에서 과육표면의 당이 카라멜화 반응을 하면서 갈색을 띠게 된 것. 여기에 하얀 요거트를 발라 도넛을 완성했다.

식재료가 먹는 도구로 변신하기도 한다. 감미로운 바닐라향은 바닐라 꼬투리를 추출해서 얻는다. 그런데 바닐라 꼬투리의 가운데를 비워 빨대를 만들었다. 음료가 바닐라 빨대를 지나갈 때 꼬투리에서 향기 성분이 함께 올라간다. 이제 막 추출한 신선한 바닐라향을 맡는 셈이다.

1995년 에르베 티스를 만나 분자요리의 세계에 뛰어든 엘 불리의 천재 요리사 페랑 안드리아. 그는 지난 2004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의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우리의 목표는 요리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풍미와 온도, 질감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객들은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험하기 위해 엘 불리를 찾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8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엘 볼리 기자
  • 강석기 기자

🎓️ 진로 추천

  • 화학·화학공학
  • 식품학·식품공학
  • 물리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