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암정복 꿈꾸는 '생명설계도' 지킴이

손상DNA 회복시스템 연구단


DNA구조


규칙 1. 집 안의 모든 커튼은 항상 쳐져 있어야 한다. 규칙 2. 밖으로 향하는 문은 항상 잠겨 있어야 한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1945년, 영국 해안의 외딴 저택. 이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2가지 규칙을 꼭 지켜야 한다. 햇빛에 노출되면 안 되는 희귀병을 가진 두 아이를 위해 집 안을 항상 어둡게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관객의 허를 찌르는 반전이 돋보이는 공포영화 ‘디아더스’에는 영화의 분위기를 시종일관 어둡게 유지할 뿐만 아니라 반전과 관련해 중요한 암시를 주는 유전병이 나온다. 10만 명에 1명꼴로 나타나는 피부색소세포건조증(XP, Xeroderma Pigmentosum)이라는 희귀병이다. 이 병에 걸린 환자는 햇빛에 오래 노출될 경우 피부에 악성 종양이 생기고 대뇌가 위축돼 전신마비가 오거나 심하면 목숨까지 잃는다.

‘손상DNA 회복시스템 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KAIST 최병석 교수는 “XP질환은 햇빛에 들어 있는 자외선이 사람의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DNA를 변형시키기 때문에 발생한다”며 “망가진 DNA는 세포 속에서 아미노산과 단백질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암세포를 키운다”고 설명했다.

‘DNA도서관’ 훼손 복구하는 ‘사서’ 단백질
 

손상DNA 회복시스템연구단의 한 연구원이 실험에 사용할 시료를 핵자기공명장치(NMR)에 넣고 있다. NMR은 물질을 이루는 분자의 구조를 파악하는 장비다.


햇빛의 자외선이 DNA를 망가뜨려 이렇게 무시무시한 병을 일으킨다니 생명의 비밀을 담고있는 DNA가 날마다 쬐는 햇빛에손상을 입을 정도로 약했던가. 하지만 최 단장은 한술 더 뜬다.

“태양빛뿐만 아니라 담배연기나 공해물질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발암물질, 그리고 세포의 노화를 촉진하는 활성산소도 DNA를 공격하죠. 이런 원인으로 건강한 성인이라도 몸 속 세포의 DNA는 하루 1만~5만 번 정도 손상을 받습니다."

DNA가 생활 속에서 이렇게 쉽게 손상된다면 XP질환은 희귀병이 아니라 감기처럼 흔한 질병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최 단장은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며 “우리 몸의 세포 속에는 손상된 DNA를 찾아서 완벽하게 복구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DNA를 생명의 설계도가 담긴 수십억 권의 책을 보관하고 있는 도서관에 비유해보자. 하나의 세포에는 똑같은 책을 보관하고 있는 ‘DNA도서관’이 2개씩 있다. 각 도서관에는 이중나선 모양으로 이뤄진 책장에 책이 수십억 권 꽂혀있다.

손상된 DNA를 복구하는 단백질은 책이 직사광선에 노출되거나 습기에 훼손됐을 때 이를 즉시 확인해 새 책으로 바꾸는 ‘사서’다. 이 사서들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하면 다른 세포를 만들 때 제대로 된 설계도를 찾아 복사해준다. XP질환에 걸린 환자는 자외선에 훼손된 책을 찾아 교체해주는 사서가 제 역할을 못하는 셈이다.

DNA도서관에서 사서 역할을 하는 단백질들의 ‘도서 관리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책장이 뒤틀리거나 부서진 경우에는 책장 전체를 원래 모습으로 고친 뒤 책을 올바로 꽂는다. 이 작업을 모두 마치지 못했는데 복사를 해야만 할 경우에는 훼손된 부분을 포함한 채 복사를 해주거나 다른 도서관에 있는 정상적인 책장을 빌려와 복사를 해준다.

훼손이 심해 복구하기가 어려운 경우에는 도서관 전체를 스스로 폐쇄하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전령RNA가 잘못된 설계도를 복사해가서 엉뚱한 단백질을 만드는 불행을 막기 위해서다.

자외선에 DNA 이중나선구조 뒤틀린다
 

손상된 DNA를 복구하는 과정^DNA는 하루에도 수만번 이상 손상을 입지만 세포는 이를 바로 복구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최 단장은 세포의 손상된 DNA를 회복하는 여러 가지 시스템 가운데 ‘뉴클레오티드 절단 수리’(NER, Nucleotide Excision Repair)의 작동 메커니즘을 밝히고 있다.

NER은 DNA 변형이 일어난 부분을 그 주위까지 통째로 잘라낸 뒤 빈 부분을 다시 복구한다. DNA도서관에 직사광선에 훼손된 책 한권이 있을 때 그 책이 꽂혀있는 책장 한 줄 전체를 교체하는 셈이다. 현재 수십 개가 넘는 단백질이 NER 과정에 관련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들이 어떻게 손상된 DNA를 찾아 회복시키는지 전체 과정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최 단장은 1995년 DNA가 자외선을 받으면 이중나선구조가 뒤틀린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밝혀 ‘광화학과 광생물학지’에 발표한 뒤 지금까지 10년 넘게 이 과정을 추적하며 베일에 가려진 NER의 비밀을 하나씩 밝히고 있다.

“NER 과정에서 특정 단백질이 손상된 DNA를 어떻게 찾아내는지 참 신기했어요. 이중나선구조를 이룬 책장에 꽂혀 있는 수십억 권의 책 가운데 어떤 책이 잘못 꽂혀 있는지 어떻게 알아내는지 밝히고 싶었습니다.”

최 단장은 핵자기공명장치(NMR)를 이용해 연구를 거듭한 끝에 XPC와 XPA-RPA 단백질복합체가 ‘탐색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단백질 복합체가 책의 내용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뒤틀린 책장만 찾아내 훼손 여부를 확인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책이 올바로 꽂혀 있더라도 책장이 조금만 뒤틀려 있으면 XPC와 XPA-RPA 단백질복합체는 작업을 멈추고 이를 바로잡을 다른 단백질을 부른다.

탐색팀의 부름을 받은 TFⅠⅠH라는 단백질이 나타나 이 서가에 꽂힌 책을 복구하도록 명령한다. 곧이어 XPG와 XPF-ERCC1 단백질복합체가 나타나 교체할 책장의 길이를 결정해 잘라내면 PCNA나 DNA 중합효소 같은 단백질이 뒤틀린 책장을 바로 잡고 책을 다시 제자리에 꼽는다.

최 단장은 2000년 창의연구단을 시작한 뒤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 같은 권위 있는 학술지에 3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NER의 과정을 밝혔다. 올해 초에는 ‘유럽연합생화학지’(FEBS)와 ‘광화학과 광생물학지’에 NER을 총괄적으로 정리하는 초청논문을 싣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NER 과정에 참여하는 단백질 중 아직 구조가 밝혀지지 않은 단백질이 대부분인데다가, 이 단백질의 구조가 손상된 DNA를 찾고 복구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 단장의 궁극적인 목표는 새로운 개념의 항암제를 만드는 일이다. 그는 “암세포도 보통 세포와 마찬가지로 손상된 DNA를 회복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며 이를 막는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알아내면 암세포를 잡을 수 있다”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우리 연구단 진짜 보물은 따로 있어요.”
 

최병석 교수


“이것이 우리 연구단의 보물입니다.”

연구단의 핵심 장비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에 최 교수는 주저 없이 커다란 물탱크같이 생긴 핵자기공명장치(NMR)를 소개했다. NMR은 원자핵이 전자기파를 흡수하는 성질을 이용해 물질의 분자를 이루는 원자 사이의 거리와 각도를 측정하고 이를 분석해 분자의 구조를 파악하는 장비다.

1980년대 초 스위스 연방공과대의 쿠트 뷔트리히 교수가 NMR을 이용한 3차원 구조 결정 기법을 개발한 뒤 현재까지 5000개가 넘는 단백질의 구조가 이 방법으로 밝혀졌다.

최 교수는 2000년에 연구단을 꾸리면서 가장 먼저 미국에서 NMR 장비를 들여왔다. 가격이 70만 달러(당시 환율로 7억7000만원)에 이르는 고가의 장비였지만 연구에 꼭 필요했기 때문에 과감하게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실제로 기계 값을 지불할 때가 되자 문제가 생겼다. IMF 외환위기 이후 안정세를 보이던 환율이 갑자기 1100원에서 1300원으로 올라버린 것. 금액으로 따지면 1억4000만원을 더 쓰는 셈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NMR을 들여온 뒤 연구단 살림이 어려워졌죠. 당시 연구원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연구 인프라를 구축하면 좋은 성과를 내는 일은 시간문제’라며 설득하고 독려하는 일 밖에 없었어요. 연구원들도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열심히 연구에 매진했죠.”

3년 뒤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검토하고 다음 3년의 연구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평가기간 동안 최 교수는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연구단을 시작하기 전부터 쌓아뒀던 연구 성과와 앞으로의 가능성을 인정받아 2단계 창의연구단에 선정됐다.

고비를 넘기자 연구 성과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손상된 DNA를 회복시키는 새로운 단백질 구조와 기능을 속속 밝혀 2단계 3년 동안에는 저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22편이나 발표했다. 학술지의 표지를 장식한 일도 3번이나 됐다.

“사실 우리 연구단에는 NMR보다 더 귀한 보물이 있죠. 바로 밤을 새우며 NMR에서 얻은 자료와 씨름하는 학생들이에요.”

연구단이 만들어진 초반에 함께 고생한 학생들을 생각하면 항상 미안함이 앞선다는 최 교수에게서 남다른 제자사랑이 느껴졌다.
 

손상DNA 회복시스템연구단 최병석 교수(가장 왼쪽)와 연구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최 교수는“밤을 새우며 연구하는 이들이야말로 우리 연구단의 진짜 보물”이라고 말했다.

2007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대덕= 안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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