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낮에 공무를 보다가 픽병의 징후를 보인 날이면 래빗은 더 일찍 서재로 건너와 그림에 몰두했다. 마음을 편히 하고 일찍 쉬기를 권해도 막무가내였다. 무엇인가 흐려지면 다른 무언가는 더 또렷해지는 법일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앞에 종이를 펼치거나 각종 붓과 물감을 가지런히 놓는 것이 전부였다.
“너무 하셨어요.”
일본 수상에게 따지고 든 일에 대해 래빗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솔직하게 답했다. 내가 일본 수상이었다면 처음에는 황당하고 나중에는 두고두고 화를 냈으리라.
“얄미웠다오. 다나까뿐만 아니라 역대 일본 수상의 발언을 살피면 자신들이 저지른 부끄러운 짓들은 모두 감춘 채 평화나 번영이니 하는 말만 지껄였다오. 할머니들이 살아계셨을 때는 그 숫자가 적어서 신빙성이 없다고 떼를 쓰더니, 이제 할머니들이 대부분 돌아가시자 증거 자체가 없는 일에 무슨 사과냐며 버티고 있지 않소?”
“아예 턱을 후려갈기든지 뺨을 치든지 하시지 그랬어요.”
래빗은 붓을 내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누구도 이런 답을 주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야후라고 혹시 아오? ‘걸리버 여행기’를 읽다보면 말이 주인 행세를 하는 나라가 나오지. 그 나라에 사는 미개인들이 바로 야후라오. 가끔 난 내가 야후로 변하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이 크오.”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이가 어디 흔한가요. ‘문신’이라고 제 고향인 마산 출신의 뛰어난 조각가가 계시는데요. 그 어른은 평생 좌우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셨답니다. 그 분 조각들은 모두 쌍둥이에요. 위아래가 같든지 좌우가 같든지. 그만큼 조화를 이루기란 어려운 법이겠지요. 래빗만 야후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야후일지도 몰라요.”
“위로치곤 고약하군. 지구인이 전부 야후라고 해도, 픽병에 걸린 대통령 야후는 나 하나라오. 위로가 필요할 때 T는 무얼 하오?”
“밤바다로 가요.”
“밤바다? 왜 하필 밤바다요?”
“하염없이 어둠을 보려고요. 철썩철썩 치는 파도 소리가 꼭 내 약한 마음을 꾸짖는 것 같기도 하고, 기대하지 않는 순간 밀려드는 바람은 내 마음을 보듬어 안는 것 같기도 해요.”
래빗이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눈동자에서 밤바다의 풍광이라도 잡아내려는 듯이.
“두려우신…가요?”
환자에게 던지기엔 적당한 물음이 아니다. 픽병에 걸린 사람 치고 누군들 두렵지 않으리. 래빗이 대답 대신 다시 붓을 들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화면 가득 오랑우탄 한 마리를 그려 넣었다. 자세히 보니 오랑우탄을 닮긴 했어도 눈과 코와 입은 현대인의 그것이다. 야후였다.
어둑새벽, 작업을 마감하며 래빗이 지나치듯 말했다.
“언제 T의 고향인 마산에 가봅시다. 균형에 대한 충고… 고맙소.”
나도 그와 눈을 맞추지 않고 야후만 보며 말했다.
“하나만 질문해도 될까요? 이 일이 그렇게 재미있으시다면 더 늦기 전에…….”
나는 래빗이 매일매일 행복하기를 바랐다. 미술이 이토록 좋다면 더 늦기 전에, 오른 뇌와 왼 뇌가 아직은 균형을 이루는 지금 다른 일을 접는 것이 옳다.
“하야하라? 대통령 자리를 던지라 이거요?”
래빗은 밤을 새워 자신이 그린, 온몸에 털이 수북하게 나고, 두 손을 앞발처럼 땅에 붙인 채 먼 산을 응시하는 야후를 손등으로 툭툭 쳤다.
“그렇지. 야후가 되면 그림도 못 그릴 테니까. 하지만 아직은 이르다오. 어제 아침 보고를 받으니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지지도가 70퍼센트에 육박하고 있다고 하오. 이건 여러 가지 청사진을 선보였던 부임 직후보다도 30퍼센트나 높은 수치요. 간단히 말해 정치를 잘 하고 있다는 뜻이라오. 물러나긴 해야겠지만 아직은 아니오. 아직은!”
“대통령 업무를 계속 보시는 게… 행복하세요?”
“행복?”
래빗이 쓸쓸하게 눈으로 웃었다.
“행복하려면 대통령을 해선 안 되지. 내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진 많은 이들과 약속을 했다오. 나는 그 약속을 지키고 싶소. 70퍼센트라면 우리에게 기회가 온 거요. 그 동안 못한 일을 한꺼번에 해치울 때가 바로 지금이라오. 헌데 내가 물러나면 우린 또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오.”
“자꾸 우리 우리 하지 마세요. 그 우리 중에서 픽병에 걸린 사람은 래빗 혼자뿐이랍니다. 그들은 픽병 환자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가 말을 끊었다.
“허허, T는 오직 내 행복에만 관심이 있는 거고.”
“그만 두세요, 제발! 매일 아침 카드를 보는 게….”
“어떤 식으로든, 결국 난 불행할 게요. 이 병은 나을 가능성이 없으니까. 어차피 불행하다면, 난 약속을 지키고 싶소. 정말 내가 불행해지면, 그땐, 그때 혹시 여유가 있다면, T가 곁에 있어주면 안 될까. 아무래도 나를 제외한 우리들은 바쁠 테니까. 그들에게 내 불행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고.”
나는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머리를 내 가슴에 묻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28.....
“일주일째에요. 이러다간 큰 낭패를 볼 겁니다. 그이가 서재에서 밤새우는 걸 막아야 해요.”
로즈의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래빗의 밤샘을 내 탓으로 여기는 듯했다. 주치의인 찰스가 로즈를 거들었다.
“맞습니다. 지금 대통령님은 쉬셔야 합니다. 뇌를 지나치게 자극하는 일은 그만둬야 합니다.”
나는 찰스의 말을 잘랐다.
“일시적인 수면 장애일 뿐입니다. 숙면을 취할 필요는 있지만 미술치료 자체를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대통령님이 그나마 국정 대소사를 관장하시는 것도 미술 치료의 도움이 큽니다. 두 가지만 지적할 게요. 잠이 부족한지는 몰라도 대통령님은 그림을 그리며 무척 행복해 하신다는 것, 또 하나는 작품 하나하나의 수준이 몹시 높다는 것.”
로즈가 두 문장을 곱씹었다.
“행복하다! 수준이 높다! 행복하고 수준이 높다!”
찰스가 다시 끼어들었다.
“일종의 강박입니다. 행복하다는 건 일시적인 기분이거나 강박을 더욱 옥죄기 위한 핑계입니다. 강제로 약물을 투여해서라도 오늘 밤부터는 숙면을 취하게 해야 합니다. 이대로 이틀만 더 가면, 대통령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하기 힘듭니다.”
“행복하고 수준이 높다! 행복하다. 수준이 높다.”
로즈가 두 문장을 계속 곱씹었다.
“그이 작품은 나도 봤어요. 이것저것 많긴 하더군요. 은해 씨 칭찬은 고맙지만, 픽병 환자인 점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솔직히 돈을 내고 살 정도는 아니죠. 그인 지금 달아날 곳을 찾는 거예요. 오늘도 무려 다섯 군데나 틀린 대답을 하더군요. 카드를 보는 시간을 배로 늘렸는데도 계속 딴 소리를 해요. 기자들의 눈과 귀를 막는 것도 이젠 힘들어요. 정무수석 이하 여러 비서관들이 애를 쓰고 있으니 오늘은 큰 문제야 없겠지만 계속 밤을 새우면 집중력이 더 떨어질 거예요.”
나는 래빗이 콜라주로 ‘거울’을 만들 때부터 가슴에 품었던 말을 꺼내놓았다.
“언제까지 대통령님의 발병 사실을 숨길 건가요? 그를 위해 최선을 택할 때가 되었다고 보진 않으세요?”
찰스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마치 태 선생은 무엇이 최선인지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환자에 대한 최종 진단은 엄연히 주치의인 내 소관입니다.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리지요. 대통령님이 집무를 계속 보셔야 하는지, 아니면 입원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내 몫이다 이 말씀입니다. 대통령님이 하야해야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픽병이 3단계로 접어들어 더 이상 공무를 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미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음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나는 찰스를 똑바로 노려보며 반박했다.
“대통령님이 얼마나 격무에 시달리는지, 찰스 당신은 짐작도 못할 겁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과연 대통령님의 하야 시기와 관련해 오직 의사로서의 직분에 따라서만 고민하고 있는지를.”
로즈가 말허리를 잘랐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그렇다면 무슨 다른 의도가 개입하기라고 했단 말입니까? 그이는 지금까지 잘 해내고 있어요. 큰 사고 없이, 오히려 더 많은 지지율을 이끌어 내고 있음을 은해 씨도 모르진 않겠죠?”
“하루하루 병이 악화되는 조짐도 곳곳에서 발견되죠. 작품에 매달릴 때 외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까요. 동문서답의 횟수도 눈에 띄게 부쩍 늘었고요. 반복 학습으로 이런 문제를 가리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반복 학습의 효과도 문제지만 과연 누가 현안 과제의 답을 내리는지를 따져보는 게 더욱 중요하겠지요.”
로즈가 날카롭게 물었다.
“잠깐만요. 국정은 그이가 직접 챙기시고 계십니다. 누가 현안 과제의 답을 내리느냐는 게 무슨 말씀인가요?”
내가 로즈의 말을 잘랐다.
“대통령님은 아침마다 카드를 보고 암기하는 시간이 가장 싫다고 여러 차례 밝히셨어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단순 암기는 자제력이 떨어지는 픽병 환자에게 큰 고통을 주지요.”
로즈는 이미 이런 비판을 예상한 듯 차분하면서도 또박또박 내 생각을 논박했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단순 암기라고 하셨어요? 그렇군요. 대통령이 어떻게 공무를 수행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비난할 수도 있겠어요. 보통 때라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겠지만 은해 씨는 그이와 매일 만나다시피 하고 있으니 더 큰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설명을 드릴게요. 대통령이 자신의 직무를 행하기 위해 비서실을 두고 있음은 아시죠? 대통령은 크게 흐름만 살피고 세세한 업무는 전문가로 구성된 비서진이 맡습니다. 발병 이후 카드를 사용해 반복 보고를 드린 것은 달라졌지만, 아침마다 그 날 만날 일정과 나눌 대화들을 정리해 보고하는 건 똑같아요. 대통령이란 그 사람 혼자가 아니라 비서진과 한 몸이라고 보는 게 이해를 돕겠네요.
경고하겠어요. 대통령의 다양한 활동과 업무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얄팍한 지식에 근거해 우리를 음해한다면, 난 은해 씨를 해고할 수밖에 없어요.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명심하세요. 하나만 더! 그이가 만든 작품들을 공개하는 일은 삼가 주셨으면 해요. 몇 달 사이에 놀랄 만큼 많은 작품들을 그이가 만든 것을 국민들이 알면 혼란에 빠질 겁니다. 왜 바쁜 대통령이 잠도 안 자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한단 말인가. 참 답하기 어려운 문제니까요. 대신 새로운 부탁 한 가지만 할 게요. 그이의 작품을 무척 좋아하니, 지금까지 그이가 만든 작품들을 하나하나 정리해주세요. 비록 지금은 공개하기 어렵지만 먼 훗날 그이를 위해 그것들이 필요할 때가 있을 법도 하니까요. 부탁해요.”
29.....
로즈의 부탁이 아니라고 해도 나는 래빗의 작품들을 목록도 만들고 사진도 찍으며 정리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따로 보관할 수 있는 공간까지 얻었으니 더욱 일목요연하게 작품들을 챙기게 되었다. 그 날 로즈에게 따져 묻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래빗의 하야 시기를 자신의 출마 시기와 함께 조율하고 있었다. 정무수석 마이클과 손을 잡고, 대통령 보궐 선거 여당 후보가 되기 위해 사전포석을 까는 중이다. 래빗이 대통령으로서의 삶을 접을 때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서 마음을 주고받아야만 했다.
“부산 영화제에 갑시다. 남해바다를 그리고 싶소.”
벌써 10년 넘도록 대통령이 부산 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한 적은 없었다. 래빗의 참가 소식이 알려지자, 신문들은 앞 다투어 대통령의 문화 마인드를 칭찬했다. 개막작은 격투 로봇의 사랑과 경쟁을 다룬 한일 합작 영화 ‘아미그달라’였다. 로봇의 격투를 실감나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형상화한 이 영화는 인간으로 등장하는 배우까지 모두 디지털 액터를 썼을 뿐만 아니라 배경까지 모두 디지털 기술로 처리했다. 그러니까 ‘아미그달라’라는 영화를 찍기 위해 야외나 세트 촬영을 나간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 인간은 더 인간다웠고, 특히 꽃비 떨어지는 봄 풍광은 복잡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지 못할 정도였다.
래빗은 개막 축하 파티에 얼굴만 보인 후 해운대 앞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호텔 꼭대기 층으로 돌아왔다. 로즈는 밤늦게까지 다섯 군데 파티에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래빗은 밤바다 외엔 관심이 없었다. 그의 목표는 종이에 바다를 가득 담는 것이다.
한참 붓을 들고 밤바다를 내려다보던 래빗이 붓을 내던지며 소리쳤다.
“여기선 안 되겠어. 밤바다를 느낄 수가 없어!”
경호실장은 래빗이 바다 가까이로 내려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반대했다. 바닷가에는 횟집들이 즐비했고 영화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밤늦게까지 걷고 뛰고 노래 부르고 웃어댔다. 경호실장에게는 그 사람들로부터 래빗을 격리시키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들 속에서 바닷바람 맞으며 그림을 그리게 할 수는 없었다.
“T!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 그 화가… 문신 선생의 미술관이 마산이라고 했소?”
래빗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가 사라졌다.
“여기에서 얼마나 멀지?”
“한 시간이면 닿지요.”
“겨우 한 시간! 좋군. T! 안내해 줄 수 있겠소?”
그제야 나는 래빗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경호원들을 따돌리고 북적거리는 부산을 떠나 마산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복도에 경호원들이 가득해요. 어떻게 하시려고요?”
“호텔을 빠져나가는 건 내 알아서 하리다. T는 맞은 편 호텔에 미리 가서 택시나 한 대 잡아두고 기다리시오.”
래빗이 눈을 찡긋 해보였다.
나는 기대 반 우려 반, 방을 나와서 건너편 호텔로 갔다.
택시를 부른 뒤 고개를 들어 래빗이 묵고 있는 호텔 최상층을 올려다보았다. 복도는 물론 층층마다 경호 인력이 깔려 있으리라. 다시 시선을 내려 호텔 입구를 살폈다. 중절모를 깊이 눌러 쓴 코트 차림의 중늙은이가 바삐 도로를 건넜다. 그의 옆구리에는 스케치북이 끼워져 있었고 양손에는 붓을 들었다.
래, 래빗!
걸음걸이나 체구를 볼 때 래빗이 분명했다. 그는 내 쪽을 흘끔 바라본 후 위쪽 바닷가로 뛰어갔다. 나는 급히 래빗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그 순간 호텔 현관에서 경호원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들은 급히 방금 전 사내가 사라진 바닷가로 달려갔다.
역시! 들키지 않고 빠져나오는 건 힘든 일이지.
“어서, 차에 타요. 빨리!”
내 왼 어깨를 누군가 잡아 돌렸다. 래빗이었다.
“어찌 된 일이에요. 분명히 바닷가로 갔는데….”
“분신술을 부려봤소. 어서 갑시다.”
급히 택시에 올랐다. 사내들이 돌아오기 전에 택시는 해운대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