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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지

닥나무 껍질이 원료 질기고 매끄러운 특성 자랑

한 나라의 문화적 수준을 재는 척도 중 하나인 종이. 우리 선조들의 과학적 사고가 그대로 녹아 있는 전통한지는 그 질에 있어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전통한지의 제조법을 살펴보자.

1966년 경주 석가탑에서 출현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서기 751년 이전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인쇄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불경이 가진 가치는 단지 일본의 백만탑 다라니경보다 20년, 중국의 금강경보다 1백18년 앞선 목판 인쇄물이란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바로 이 불경이 1천2백여년이 지나도록 형체를 잃지 않고 보존된, 현대의 첨단과학기술로도 재현해내기 어려운 품질의 종이에 담겨져 있다는 것은 세계 최고에 버금가는 의미를 지닌다. 종이 소비가 한 나라의 전반적인 문화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잣대로 불리는 것처럼 좋은 종이를 만드는 일 또한 중요한 문화적, 과학적 척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종이를 이용한 공예품의 제조도 활발했다. 사진 위는 빗접, 아래는 팔각 지승자리.


담장은 일본에 제지술을 전하고

익히 알려진 대로 역사 이래 제지술에 의해 종이를 만든 것은 중국에서 처음 선보였다. 이전까지 사람들이 자신의 기록을 남긴 재료로는 돌과 금속, 찰흙이나 동물의 가죽 등이 주로 사용돼 왔다. 이집트의 파피루스는 이 가운데 오늘날의 종이와 가장 가까운 것에 해당한다. 서기 105년 후한(後漢) 사람 채륜(蔡倫)이 나무껍질과 마(麻), 넝마, 헌 어망 등을 원료로 종이를 제작하는 방법을 임금에게 보고한 뒤, 종이는 급속히 중국 전역을 비롯해 전세계로 전파됐다.

우리나라에 처음 제지술이 등장한 시기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지만, 대개는 서기 6백년 경이 정설로 자리잡고 있다. 일본서기의 추고천황기(推古天皇記)에 추고천황 18년(고구려 영양왕 21년, 서기 610년) 고구려 승려 담징이 지묵칠(紙墨漆)과 함께 맷돌을 전했다는 기록이 이같은 추정을 뒷받침하는 한 증거다.

또한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서기 755년(신라 경덕왕 14년) 때의 백지묵서(白紙墨書)로, 이 책의 권 10 발문에는 '닥나무 뿌리가 향수를 머금어 닥나무가 자라고, 영글면 잘라 껍질을 벗기고 다듬어 종이를 만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이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우리 조상들이 제지술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보다 1 천년 경 앞선 낙랑의 옛 고분에서 발굴된 관속에서 닥종이를 물로 뭉친 듯한 물질이 발견된 적이 있으므로 중국에서 제지술이 전래되기 전에 이미 우리 특유의 제지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있긴 하다.

전통적으로 종이의 원료에는 채륜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나무껍질이나 솜, 마 등 여러가지가 사용됐다. 그러나 마(麻) 섬유로 된 종이는 필기하는데 껄끄러운 감이 있고, 종이의 원료 공급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지극히 과학적인 사고를 통해 다른 종이 재료를 찾게 됐던 바, 그것이 바로 닥이었다.

닥은 인간 피부와의 접촉감이 뛰어나고 항상 햇빛을 받으며 자라나는 여러해 살이 나무다. 따라서 직물의 원료로 한번 소요되고 나면 버리는 일년생 풀인 마보다는 종이 재료 공급면에서도 뛰어났다.
 

①채집된 닥나무 ②뚜껑을 열어놓은 채로 불을 때 닥나무를 삶는다. ③삶는 닥나무를 물통에서 건져낸다. ④전통적인 한지 제조방법에서는 삶은 닥나무를 절구로 찧거나 닥돌 위에 올려놓고 패대기질을 했다. ⑤삶은 백피를 맑은 물에 건져 올려놓고 티를 고른다. ⑥완전히 고해된 상태.


식물성 잿물을 선택

서양에서는 종이 원료로 목재펄프를 사용했는데, 목재펄프는 나무의 수피는 벗겨버리고 속만을 칩(chip)으로 만들어 가성소다로 삶아 낸다. 반면 우리 조상들은 인간의 피부에 해당하는 나무의 수부를 종이 원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인간의 피부와 접촉이 잦은 종이옷 종이신 포장지 책지 화장지 벽지 창호지 장판지 등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었다.

한지를 만드는 방법은 전승된 방법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개의 순서는 비슷하다. 먼저 수확한 닥나무의 줄기에서 작은 가지를 제거하고 적당한 길이로 절단한 것을 다발로 묶어 솥에 넣어 찐 다음 껍질을 벗겨서 말린다. 이 껍질을 흑피(黑皮)라고 하고, 겉껍질을 벗겨낸 것을 백피라고 한다. 흑피를 백피로 만드는 방법은 우선 흑피를 물에 담그어 부드럽게 한 다음 겉껍질을 벗겨 말리면 된다.

물에 충분히 불린 백피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 큰 쇠솥에 넣고 쇠죽 끓이듯 4-5시간을 충분히 익을 때까지 삶는다. 여기에는 가성소다를 첨가해야 하는데, 양잿물(NaOH)이 없던 시절에는 메밀대나 콩대, 짚을 태운 재를 철분기가 없는 물에 삶아 우려내 고운 채로 거른 다음 물을 증발시켜 농축시킨 잿물을 모아서 사용했다.

현재 연구된 바에 따르면 백피 1㎏을 삶을 때 소요되는 재의 양은 약 2.5㎏이고, 이 재를 잿물로 만들면 약 7.5L가 된다. 이 때 잿물의 pH는 12 정도로, 강알칼리성을 나타내는 NaOH와 Mg${(OH)}_{2}$(수산화마그네슘)가 다량 들어 있다. 양잿물에는 NaOH뿐이지만 식물성 잿물에는 수산화마그네숨이 다량 들어 있어 섬유의 손상을 덜 가져오고 순하게 삶아지는 것이다.

이렇게 증기 기운에 풀어진 백피는 흐르는 물 등에 담가 표백 과정을 거친 후 고해(叩解, beating) 작업으로 들어간다. 고해란 지료(紙料) 그 자체가 종이를 만들기에 적합치 않기 때문에 이것을 물에 풀어 종이로 제조할 수 있도록 하는 분해작업으로, 담징이 일본에 제지법을 전수할 당시인 105-610년 사이에는 돌절구나 맷돌을 사용했다. 절구를 이용한 고해는 가장 전통적인 방법으로서, 기원전 830년 중국의 강태공이 곡식을 빻을 목적으로 돌절구를 발명했고, 종이의 시조로 불리는 채륜(蔡倫)의 묘에서도 돌절구가 출토됐으며, 채륜보다 약 2백년 후 왕은(王隱)이 지은 진서에 채륜이 낡은 베를 찧어서 종이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시기를 지나 우리 선조들은 종이 재료를 고해할 때 맷돌을 사용하지 않고 닥돌 위에 올려 닥방망이로 패는 방식을 이용했다. 이 방법은 섬유의 절단이 전혀 일어나지 않게 하면서도 납작하게 만들어 얇고 질기며 평활한 종이를 제조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인피섬유(靭皮纖維 : 식물의 체관부 섬유 및 피층(皮層) 섬유)는 섬유질이 매우 길고 질겨서 맷돌질을 하면 닥끼리 뒤엉켜 갈아지지 않는다. 맷돌은 콩같이 동글동글한 것이 잘 갈아진다. 일본인들은 지금도 목재펄프를 고해하는 방법으로 쇠맷돌같은 비터(beater)로 고해하지 않고 칼날이 달린 칼비터로 고해하는데, 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낸 종이는 외국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여기에는 다른 나라의 제지술이 갖지 못한 우리만의 과학성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제지술은 디딜방아 모양으로 생긴 도침기(搗砧機:다듬잇돌에 다듬어 반드럽게 하는 도구)로 조금 설마른 꾸들꾸들한 종이에 묽은 쌀풀질을 해 1백50장 정도 포개놓고 계속 쳐 종이를 치밀하고 평활하게 해 윤기를 냈다. 마치 무명옷에 쌀풀을 먹여 다듬이질을 하는 것과 같은 원리인 이 과정을 거치면 빳빳한 종이가 만들어진다.

조선 영조시대 사람인 서명응(徐明膺, 1716-1787)이 지은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의 고사십이집(考事十二集) 10권 지품고하조(紙品高下條)에는 '송나라 사람들이 여러 나라 종이의 품질을 논하면 반드시 고려지(紙)를 최고로 쳤다. … 우리나라의 종이가 가장 질겨서 방망이로 두드리는 작업을 거치면 더욱 고르고 매끄러웠던 것인데, 다른 나라 종이는 그렇지 못하다'고 언급한 대목이 있다. 이로써 고려시대 때 이미 종이를 만든 다음 2차가공, 즉 다듬질하는 방법을 개발한 선조들의 우수한 두뇌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습지의 건조과정. 사이징제로 닥풀을 사용하는 한지는 습지가 서로 붙지 않아 편리하다.


매끄럽고 질긴 종이, 해외서도 칭송

습지를 형성하는 것을 우리는 '종이 뜬다'고 표현하지 '종이 거른다'고 하지 않는다. 반면 일본과 중국에서는 수록(手漉)이라고 한다. '록'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술 따위를 거르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즉 우리 조상들은 종이 뜨는 것을 술 따위를 거르는 것과 엄연히 구분해서 불렀다. 그리고 이같은 용어의 사용은 한지를 제조하는 이들에게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전통적으로 한지 뜨는 방식은 가둠뜨기와 흘림뜨기가 있다. 가둠뜨기는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됐을 때의 방식으로, 한 사람은 망을 붙들고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일정량의 지료(紙料)를 위에서 밑으로 들어부어 술거르듯 하는 것이다. 즉 하향식이다. 그래서 이를 달리 '수록식'이라고 한다.

이와는 달리 우리 조상들이 행하고 지금까지 내려오는 흘림뜨기는 지통(紙桶) 위 공중에 걸쳐진 가로막대에 끈으로 묶여 있는 틀 위에 발을 얹고, 앞물을 떠서 뒤로 흘려버리고, 옆물을 떠서 서로 반대되는 쪽으로 흘려 버리는 동작을 두번 반복해 발틀을 밑에서부터 위로 들어 올리는 상향식의 뜨기 방식이다.

이 방법은 두께가 균일하고 사방 어느쪽이나 강도가 일정한 질긴 종이를 만든다. 또한 들어 올려진 발틀로 부터 발을 분리한 후 습지를 발에서 떼어내 건조하므로 가둠뜨기보다 휠씬 작업 능률이 좋고 혼자서도 작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1779년 프랑스의 루이 로베르에 의해 고안된 장망식(長網式) 초지기(抄紙機)는 동양의 가둠뜨기 형식으로 하향식이다. 그러나 이 방법보다 나중인 1809년, 로베르의 것이 가진 기능을 보완해 영국인 디킨슨이 고안한 환망식(丸網式) 초지기는 우리의 흘림뜨기 형식으로 상향식이다.

우리 선조들이 발전시킨 한지 제조법의 과학성은 독특한 '사이징 기법'의 고안에서도 잘 나타난다. 대개 펄프만을 사용해 만든 종이는 흡수성이 좋아 필기나 인쇄시 잉크가 번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종이를 만들 때 펄프에 내수성이 있는 콜로이드 물질을 혼합해 섬유의 표면이나 섬유 사이의 틈을 메워야 하는데, 이같은 작업을 사이징이라고 한다.

세종 15년에 편찬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85권 채부(菜部) 상품조(上品條)에는 종이 뜰 때 점제(粘制)로 사용하는 황촉규(黃蜀葵), 즉 닥풀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따라서 우리 조상이 닥풀을 사용한 것은 1433년 이전부터임을 추정할 수 있다. 닥풀을 사이징 제로 사용해 만든 종이의 pH는 7로 중성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닥풀은 섬유 상호간의 지합을 좋게 하고 종이의 두께를 조절할 수 있으며 강한 종이를 만들 수 있다. 또한 습지의 박리를 양호하게 하며 중성지를 만드는 데도 효과적이다.

우리 조상들은 습지를 일본인들과 달리 햇볕에 내다 말림으로써 철판에 말리는 것보다 철분에 의한 오염이 적어 산화가 더디 일어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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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전민조 기자
  • 구자운 임원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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