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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목판인쇄 고집한 이유

예술성 떨어지고 만들기 힘든 금속활자

인류 지성사에서 인쇄술의 발명만큼 가치있는 것은 드물다. 최근 정보화 시대를 맞아 ‘컴맹’ 이란 단어까지 등장하고 있지만, 몇세기 전만 해도 글을 못읽는 ‘문맹’ 인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인쇄술이 본격적으로 발달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글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늘게돼 문맹인 수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초기의 인쇄술은 목판에 글자를 새겨 찍는 방법이었다. 이는 8세기에 중국에서 최초로 발명돼 1천년 이상 사용됐으며 13세기에 유럽까지 전래됐다.

반면 최근까지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던 방식은 금속 활자 인쇄술이었다. 금속 활자는 이미 12세기 경 고려시대에 최초로 발명됐다고 알려졌다. 특히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직지심체요절’은 1377년에 금속 활자로 찍은 것임이 판명돼 우리나라가 금속 활자를 최초로 만들었음이 세계적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여기서는 중국과 서양의 인쇄술을 비교하는데 초점을 두기 때문에 우리나라 얘기는 일단 논외로 하자.

서양에서는 15세기 중엽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자와 활판 주조기를 발명한 것이 시초다. 활자 인쇄술은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됐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도 이를 수용했다.

섬세함 못따르는 금속의 한계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 1973년 고려대 도서관에서 발견됐다.


어떤 학자들은 인쇄술이 중국에서 먼저 발명됐지만 폭넓게 활용된 곳은 유럽이기 때문에 유럽이 중국보다 일찍 근대 문명을 이뤘다고 설명한다. 이는 금속 활자가 목판보다 여러 모로 장점을 가졌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또한 학자들은 “중국에서는 왜 인쇄술이 더 발전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 중국에서는 금속 활자 인쇄술이 목판 인쇄술보다 효율적인 방식이 아니었다. 또 중국의 인쇄술은 유럽의 인쇄술이 유럽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사회 발전에 커다랗게 기여했다.

구텐베르크의 활자 인쇄술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에서 문서를 복사하는 방법에는 두가지가 있었지만 모두 효율적이지 않았다. 하나는 글을 일일이 손으로 베껴쓰는 방법이다. 이는 매우 지루한 작업인데다 실수로 잘못 베끼는 일이 허다했다. 다른 방법은 페이지 전체를 나무판 표면에 새긴 후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어내는 목판 인쇄술이었다. 이는 한 번에 많은 수의 복사본을 만들 수 있었지만 모든 페이지를 일일이 힘들게 새겨야 한다는 단점을 가졌다.

반면 활자 인쇄술은 금속으로 주조 활자들을 제작하고 이를 조합해 원하는 문장을 만드는 방법이기 때문에, 한 번 인쇄 작업이 끝난 후 활자를 해체해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사실 중국도 활자 인쇄술을 여러 모로 실험하고 있었다. 11세기 점토 활자와 13세기 목재 활자를 거치면서 1403년에 이르러 마침내 금속 활자가 만들어졌다. 금속 활자만을 놓고 보면 중국이 서양보다 훨씬 빨랐던 셈이다. 그러나 활자 인쇄술은 중국에서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답은 예술성과 실용성 두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활자 인쇄본은 목판 인쇄본이 표현할 수 있는 섬세한 ‘예술적인 멋’ 을 결코 흉내내지 못한다. 서예를 배운 사람이나 디자인의 미묘한 차이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이 차이점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중국에서 발간된 주요 인쇄물인 경전에서 예술성은 다른 점보다 중요하게 고려되는 사항이었다.

이보다 중요한 대답은 실용성이다. 활자 인쇄 문화에 젖어 있던 우리에게 목판 인쇄본이 실용적이라는 말은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영어의 기본 단위인 알파벳이 26자인 반면 한자는 수천개에 이른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즉 서양에서는 활자 인쇄를 위해 기껏해야 수십개의 활자 주형을 만들면 그만이겠지만, 중국에서는 수천개를 만들어야 한다. 게다가 같은 한자라도 그 글씨체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중국에서 활자 인쇄술이 그렇게 실용적이지 않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활자 인쇄술이 오랫동안 인기를 얻지 못했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국내 대표적인 목판, 팔만대장경 원본.


한편 인쇄술은 중국 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 예로 서양의 르네상스에 비길만한 ‘지적 혁명’(宋代 르네상스)을 들 수 있다. 목판 인쇄술은 10세기 중엽 공자의 유교 경전들을 출판할 때 아주 잘 활용됐다. 1백30권으로 이뤄진 이 ‘공자 전집’은 중국의 문화와 사상의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나아가 목판 인쇄술은 불경, 왕조 역사, 지방 역사, 잡록집, 백과사전, 식물학, 의술서, 농업서적 등 수많은 서적을 출판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한 예로 당시 대규모 프로젝트였던 불경 발간사업은 10여년 간 무려 5천48권, 13만페이지에 달하는 위대한 출판 기록을 남겼다. 한 학자에 따르면 16세기까지 중국은 어떤 다른 나라보다 많은 인쇄 서적을 갖고 있었다.

이에 비해 목판 인쇄술은 서양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서양에서는 이것이 오히려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활자 인쇄술이 등장한 이후 목판 인쇄술은 주로 소수의 전문가를 통해 전수되거나 간단한 유인물을 만드는데 사용됐을 뿐이었다. 목판으로 만든 책은 가장 긴 것이 1백84페이지에 불과했다.

이제 “중국에서는 왜 인쇄술이 더 발전하지 못했는가” 라는 질문으로 돌아가자. 중국에서는 단지 활자 인쇄술을 사용할 별다른 예술적·실용적 동기가 없었다. 즉 발전하지 ‘못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여기서 ‘발전’ 이란 말은 중국이 아니라 서양의 입장에서 사용된 적절치 못한 용어임을 알 수 있다. 똑같은 활자 인쇄술이 서양에서는 ‘발전’ 개념으로 받아들여져도 동양에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6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송성수 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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