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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과학향기

우리별에서 KTX까지

1886년 6월 4일 유럽 벽안의 나라 프랑스는 극동의 선비나라 조선과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올해는 한국과 프랑스가 수교한지 120주년이 되는 해다. 그 세월만큼 한국에서 프랑스는 전혀 낯선 나라가 아니지만 우리가 프랑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알고 보면 우리 안에 녹아 있는 프랑스의 과학기술은 참으로 많은데 말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1983년 문학진 작가가 유화로 그렸다. 서울 명동성당에 있다.


제일 먼저 通했다

유럽 국가들과 맺은 수교로만 따진다면 한불 수교가 한영 수교보다 3년이 늦다. 하지만 사실상 한국과 가장 먼저 관계를 갖기 시작한 유럽 국가는 프랑스다. 1835년 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사 모방(Maubant)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왔고, 1836년에는 조선주교로 임명된 앙베르(Embert) 신부와 샤스탕(Chastan) 신부가 국내로 들어와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을 탄생시켰다.

이렇게 조선에 천주교의 씨앗을 뿌렸지만 1866년 대원군은 천주교 금령을 내리고 프랑스 선교사 9명과 한국인 천주교도 8000명을 처형했다. 모방, 앙베르, 샤스탕 신부는 모두 참수됐다. 이 소식에 격분한 프랑스는 천진에 있던 프랑스 함대 3척을 보내 강화도를 침략했는데, 이것이 바로 병인양요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고 이에 대한 항의와 보복이란 명분으로 강화도를 약탈해 외규장각 문서와 은괴 등을 빼앗아갔다. 현재 한국과 프랑스의 외교문제가 되고 있는 외규장각 문서는 바로 병인양요의 역사적 유산이다. 한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이렇게 피로 얼룩진 역사로 시작됐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이 외교권을 상실하면서 프랑스와의 외교관계는 사실상 중단됐다. 그러다가 1949년 2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며 재수교를 하게 된다. 프랑스는 한국전쟁 때 한국을 도와 참전했다. 3421명의 전투병력과 구축함 1척을 파견해 269명의 전사자와 1359명의 부상자를 낸 혈맹국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은 프랑스와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 중심의 통상외교정책으로 한국과 유럽 국가들 간에는 그리 활발한 교류가 없었다.

한불 교역과 경제협력이 활성화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2000년대 들어 한불 경제교역은 지속적으로 확대돼 2005년 양국 간의 교역량은 약 59.3억 달러(약 5조7000억 원) 규모였다. 또한 2005년 12월까지 프랑스가 한국에 투자한 누적액은 미국, 일본, 네덜란드, 말레이시아, 독일, 영국에 이어 7번째이며, 한국의 프랑스 투자 누적액은 유럽연합 중 5번째다.

현재 기업투자, 상사주재, 민간교류의 목적으로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의 국적을 조사해보면 미국인 다음으로 프랑스인이 많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래마을’에는 프랑스 제과점, 레스토랑과 카페 등이 모여 있다.

흔히 프랑스하면 우리는 루브르 박물관과 에펠탑, 몽마르트르와 물랭 루즈 같은 관광명소나 루이 뷔통 가방, 샤넬 향수, 기 라로쉬, 게를랭, 다니엘 에쉬테 등의 명품브랜드를 떠올린다. 바게트빵, 크라상, 마들렌느, 코코뱅, 퐁뒤, 샹파뉴 등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음식문화에도 익숙하다. 한편 퀴리 부인, 미라주 전투기와 테제베(TGV), 콩코드 초음속비행기와 에어버스 항공기 등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메이드 인 프랑스’는 의외로 우리생활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에어버스'는 프랑스가 주도하는 유럽의 합작 항공기 회사다. 대한항공은 2008년 세계 최대 기종인 A380을 도입할 예정이다.


과학자가 대접받는 나라

프랑스 혁명으로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인류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이념이 만들어졌다. 공화국 이념을 고안해낸 나라도 프랑스고, 베스트팔렌조약을 거치면서 외교라는 국가 간의 새로운 관계 모델을 만들어 낸 나라도 프랑스다. 지성사의 측면에서나 문명사의 측면에서 프랑스가 세계사에서 차지한 비중은 워낙 컸기 때문에 프랑스를 빼면 인류역사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우리에게 프랑스는 문화예술의 나라, 지성의 나라로 통하지만 프랑스가 과학기술의 나라라는 점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천부인권과 자유, 평등의 이념을 만들어냈고 여성해방의 논리를 제공했던 나라가 프랑스지만 근대화의 과정에서 프랑스를 이끌었던 세력의 중심을 차지했던 것은 과학자, 엔지니어와 기술관료들이었다.

그런데 과학자가 하나의 엄연한 직업으로 분류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프랑스 덕분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직업적인 과학자가 출현한 곳이 프랑스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과학 아카데미’(아카데미 드 시앙스)는 과학자를 존중했던 ‘태양왕’ 루이 14세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만들어진 단체다. 처음에는 왕립연구단체로 출발했는데 국왕의 지대한 관심과 지원 덕분에 과학아카데미 소속의 과학자들은 왕실로부터 급여를 받으면서 전문적인 과학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과학자들은 최초의 직업 과학자라고 할 수 있다.

과학자와 달리 좀 더 실용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전문가들은 엔지니어라고 부르는데, 엔지니어라는 용어도 프랑스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엔지니어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앵제니에르’(Ingenieur)는 16세기에 생긴 말인데 화포나 전쟁도구를 뜻하는 ‘앙쟁’(engin)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앙쟁은 라틴어의 ‘ingenium’에서 온 말로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재능(talent)을 뜻한다. 그러니까 재능이란 말에서 전쟁도구란 말이 나왔고 이런 도구를 잘 다루는 사람을 ‘앙제니에르’라고 불렀던 것이다.

과학기술의 첨단 분야가 대부분 전쟁무기나 군사과학에서 발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프랑스의 최고 엘리트학교이자 고급엔지니어 양성소인 ‘에콜 폴리테크니크’(국립이공대학)가 군사사관학교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이 학교가 굴지의 엘리트 학교로 부상했던 것은 나폴레옹 덕분이다. 나폴레옹은 1804년 황제에 즉위하면서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국가적인 교육기관으로 육성하기 위해 제국사관학교의 지위를 부여하고 ‘조국과 과학과 영광을 위하여’라는 학교의 교훈까지 하사했다. 프랑스 최고의 전성기를 열었던 나폴레옹은 “과학은 문학보다 위대하며, 가장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과학을 중시한 지도자였다.

현재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한 학생들은 국가가 지급하는 봉급을 받으며 공부하고, 졸업 후에는 국가연구소, 공공기관, 정부부처의 고위관료로 진출하는 등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프랑스가 얼마나 과학기술을 존중하는 나라인지 알 수 있다. 프랑스 문명의 요체가 과학기술이라는 말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1794년 설립된 에콜 폴리테크니크. 학생들의 군대식 제복에서 역사가 느껴진다.


파스퇴르와 에어버스의 공통점

우리 일상 문화 속에서 쓰이는 프랑스어로는 레스토랑, 카페, 파티쉐, 쉐프 등이 있다. 그런데 백신, 파스퇴르 공법, 쿨롬, 암페어 등의 용어도 프랑스 과학기술의 산물이다.

어린이들에게 미래를 꿈꾸게 하고 상상력을 넓혀 준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나 ‘해저 2만리’는 프랑스의 공상과학 소설가 쥘 베른의 작품이다. 쥘 베른은 이미 1800년대에 원자력 잠수함, 해저여행, 달나라 여행 등을 상상하며 모험소설을 썼는데 그의 공상은 다음 세기에 실현됐다.

파스퇴르 우유에서는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와 그의 저온살균법인 파스퇴르 공법을 만나고, 자동차에서는 미쉐린 타이어(‘미슐랭’이라고 읽는다)를 볼 수 있다. 미슐랭이란 이름은 1895년 세계 최초로 공기주입식 타이어를 개발한 앙드레 미슐랭에서 따왔다. 자동차 유리나 판유리 시장에서 국내최대기업인 한국유리의 경우 프랑스의 건축자재기업인 생 고뱅(Saint-Gobain)이 주식의 80%를 갖고 있고, 프랑스 굴지의 자동차기업 르노(Renault)자동차도 삼성자동차를 인수하며 한국에 들어와 있다.

프랑스는 원자력, 우주, 항공, 철도 등의 첨단기술과 기간산업에서 특히 앞선 기술을 자랑한다. 프랑스의 고속철도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한국형 고속철도 KTX의 기반이 된 테제베(TGV, Traina Grande Vitesse, 고속철도라는 뜻)에서 확인할 수 있다. 테제베는 프랑스의 GEC 알스톰이 개발해 시속 300km이상을 내는 고속철도로 독일의 이체(ICE), 일본의 신칸센과 함께 세계 최고의 철도로 손꼽힌다.

테제베는 1964년 개통된 일본 신칸센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통됐다. 평지에서는 평균 시속 300km 이상으로 달리지만 객실 안에서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는데 지장이 없다. 이 속도라면 서울-대구 구간을 1시간 안에 주파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지형의 굴곡이 많아 KTX로는 1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어쨌거나 2004년 KTX가 개통되면서 우리는 말 그대로 전국 일일생활권을 누릴 수 있게 됐다.

1992년에는 한국과학기술원 인공위성연구센터가 영국 서레이대 연구팀과 공동으로 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 우리별 1호가 발사됐다. 이듬해 9월에는 순수 우리기술로 제작된 우리별 2호가 발사됐다. 이는 우리나라 우주항공기술의 개가였고 국민들은 인공위성 발사장면을 TV로 보면서 감격했다.

그런데 인공위성의 제작은 우리기술로 이뤄졌지만 발사는 프랑스 기술에 의존했다. 우리별 1호는 위성발사체 아리안 V52 로켓에 실려 발사됐고, 우리별 2호는 아리안 V59 로켓에 실려 프랑스령 기아나의 쿠루우주과학기지에서 발사됐던 것이다. 아리안 로켓이나 쿠루위성발사기지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첨단 우주항공기술의 상징이다.

항공기 부문에서도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의 항공기 기종은 대부분 보잉(Boeing)이거나 에어버스(Airbus) 둘 중 하나다. 보잉과 에어버스는 세계 양대 항공기 제작사인데, 이 중 에어버스는 프랑스가 주도하고 영국과 독일이 컨소시엄으로 참여하는 유럽의 항공기 제작사다.

에어버스의 공장은 프랑스 남부의 툴루즈시에 있다. 에어버스의 모델 A330, A300-600 등은 국내 항공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기종이다. A330은 지난 4월 대한항공이 실시한 보잉과 에어버스의 항공기 운항 정시율 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 또 대한항공은 2008년 에어버스의 초대형 여객기 A380 8대를 추가로 도입할 예정이다.
 

인공위성 우리별 1호와 2호는 프랑스의 아리안 로켓에 실려 프랑스령인 기아나의 쿠루우주과학기지에서 발사됐다.


아자! 프랑스

한국이 정부차원에서 프랑스와 과학기술 교류를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올해 초 과학기술부는 2006년도 ‘한·불 과학기술협력기금사업’(STAR 사업) 신규과제를 공모했다. STAR 사업은 ‘Science and Technology Amicable Relations’ 의 약자인데, 2002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 1차 한·불 과학기술공동위원회의 합의에 따라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지원대상은 신소재와 나노기술, 생명공학, 기초과학, 정보통신, 항공우주, 인문사회과학 등 6개 분야며 양국 과학자 간 공동 세미나, 워크숍, 연구자 교환 프로그램 등이 진행될 예정이다.

민간차원의 교류도 활발하다. 현재 프랑스에 있는 한국과학자들이 ‘재불한국과학기술자협회’(이하 재불과협)를 조직해 프랑스 과학기술자들과 민간차원의 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재불과협 회장은 파리 국립자연사박물관의 박용향 교수다.

재불과협은 1976년에 결성됐으며 처음에는 회원 간의 친목도모가 목적이었으나 지금은 한국와 프랑스 양국의 과학기술을 교류하는 민간 중재자로서 기여하고 있다. 또한 툴루즈공대나 리용대의 INSA(응용과학연구소)에는 한국의 이공계 유학생들이 많다. 재불과협과 프랑스 대학 출신의 과학자들은 앞으로도 한국과 프랑스의 과학기술 교류에서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프랑스는 멀지만 가까운 나라가 됐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지리적인 거리는 중요하지 않게 됐다. 함께 꿈꾸고 희망을 나누면서 과학기술 교류를 강화한다면 프랑스는 우리에게 더 친근한 이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최근 영화 '다빈치 코드'가 개봉하면서 사건의 배경이 되는 루브르박물관이 다시 한번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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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최연구 경영혁신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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