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를 공격하는 바이러스는 성향이 제각각이다. 고집 세고 고지식한 바이러스가 있는 반면, 유들유들한 녀석도 있다. 고지식한 바이러스는 항상 똑같은 항원으로 인체를 공격한다. 그런데 이미 인체는 단순 공격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백신으로 중무장한 상태다. 백신은 융통성 없는 바이러스를 무력화시켜 더는 지구에 존재할 수 없도록 ‘압박수비’를 펼친다. 1977년 지구상에서 사라진 천연두 바이러스가 좋은 예다. 당시 세계보건기구(WHO)는 “백신개발 역사상 가장 통쾌한 개가”라고 평가했다.
반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변화무쌍한 성격의 소유자다. 이 바이러스는 항상 새로운 항원을 만들어 인체를 공격한다. 인체가 간신히 항원에 대항하는 항체를 만들어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곧 새 항원을 만들어 다음 공격을 준비한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항원이 변하는 속도는 천연두 바이러스보다 1만~10만 배 정도 빠르다.
고지식한 바이러스가 공격했을 때보다 유연한 바이러스가 공격했을 때 인간은 더 큰 피해를 본다. 과학자의 숙원은 ‘카멜레온’처럼 시시각각 변신을 거듭하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항할 효과적인 백신을 만드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지금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서 새로운 항원을 찾아 바이러스가 변해도 예방 효과는 같은 ‘유니버설 백신’에 도전하고 있다.
작년 백신은 올해 맞아도 소용없다!?
인류 역사상 사망률이 가장 높았던 전염병은 스페인 독감(1918년)이다. 4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2000만 명이 사망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사람이 1500만 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놀랄 수치다. 미국 국방병리연구소 제프리 토벤버거 박사는 스페인 독감 사망자가 많았던 이유가 당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유전자에 큰 변이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2005년 10월 6일 ‘네이처’에 발표했다. 조류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에 돌연변이가 생겨 사람에게 치명적인 감염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로 변형됐다는 것.
바이러스는 집에서 키우는 돼지의 몸속에서 돌연변이를 일으켰다. 돼지의 세포 표면에는 사람을 감염시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와 조류를 감염시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동시에 인식하는 수용체가 있다. 돼지가 이 둘로부터 동시에 감염되면, 돼지 몸속에서 두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조합하면서 다양한 변종 바이러스가 생긴다. 미국 뉴욕의대 에드워드 킬버른 교수는 바이러스가 ‘돼지’를 매개로 유전적 변이를 한다는 사실을 밝혀 바이러스학 분야 권위지인 ‘새로운감염질환저널’ 2006년 1월호에 발표했다.
중국 남부지역에는 인가와 가축우리를 분리하지 않은 농가가 많아 인체 바이러스와 동물 바이러스가 섞이기 쉽다. 그래서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가 등장할 확률이 세계 최고다. 흔히 ‘전세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진원지’로 불릴 정도다. WHO는 매년 초 중국 남부지역에서 바이러스를 조사한다. 여러 곳을 조사해 출현빈도가 높은 바이러스 유형을 간추린 뒤 WHO의 바이러스 목록에서 가장 비슷한 유형을 고른다. 이 바이러스가 ‘올해의 백신’용 표적이 된다.
WHO가 매년 새로운 백신 유형을 발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맞는 독감예방백신 수명이 1년이기 때문이다. 작년 백신은 올해 효과가 없다는 뜻이다. 독감 백신은 세포를 공격하는 특정 바이러스 유형에만 특별히 대응하는 항체 1종류만 만든다. 항원 모양이 다른 바이러스가 인체에 침입하면 기존에 갖고 있던 항체는 쓸모가 없다. 자물쇠를 바꾸면 예전에 쓰던 열쇠가 들어맞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다.
보통 인플루엔자 백신은 바이러스 캡슐 표면에 있는 단백질인 헤마그글루티닌(HA)과 뉴라미니다제(NA) 2가지를 항원으로 사용해 인체 면역반응을 유도한다. 그런데 바이러스는 이들 단백질에 변이를 계속 일으킨다. 결국 백신 디자이너는 바이러스 돌연변이 단백질을 예측해 올해 유행할 인플루엔자 백신을 개발하는 셈이다.
우리가 매년 가을마다 맞는 독감 백신은 그해 겨울에서 이듬해 봄까지 유행할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예상해 특별히 디자인한 것이다. 매년 유행하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항원의 유형에 따라 H1N1, H3N2, B형의 아형 3종류가 있다. 독감백신은 3가지 항원을 모두 포함한 3가백신이다. 말하자면 조그만 우산 세 개를 동시에 펴 폭우를 피하는 격이다.
WHO의 예측이 정확하다면 그 해 사용하는 백신은 효력이 좋다. 그러나 예측이 빗나가는 경우에는 예방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우산이 폭우에 찢기거나 강풍에 뒤집히는 격이다. 올해 WHO가 얼마나 정확하게 예측했는지는 겨울에 드러날 것이다.
만약 WHO가 예측한 바이러스의 정확도가 낮다면 전세계 독감 환자 수가 증가할 수도 있다. 따라서 바이러스 돌연변이에 대항할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요즘은 매년 접종할 필요 없이 한 번만 접종해도 다양한 바이러스를 한꺼번에 방어하는 ‘유니버설 백신’ 연구가 활발하다. 기존 백신이 작은 우산을 여러 개 쓰고 빗길을 가는 것에 비유한다면, 유니버설 백신은 큰 우산 하나로 빗길을 가는 것이다. 작은 우산은 3개 써도 비를 맞을 수 있지만 온몸을 가릴 정도로 큰 우산을 쓰면 비에 젖지 않는다.
카멜레온 바이러스도 변하지 않는 곳이 있다
영화 ‘비트’의 주인공은 17대 1로 맞서 이긴 경험을 자랑스럽게 늘어놓는다. 이는 유니버설 백신에도 해당한다. 여러 변종을 맞아 홀로 싸울 수 있는 독감예방 유니버설 백신은 모든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공통으로 있는 항원을 공격해 무력화한다. 2000년 벨기에 겐트대 사비에르 살렘 교수팀은 영국 의학전문저널인 ‘네이처 메디신’(Nature Medicine)을 통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마다 똑같은 구조가 있음을 밝혔다. 바로 캡슐 표면에 있는 M2단백질이다. M2단백질은 변화무쌍한 HA나 NA단백질에 비해 유전적 변이가 거의 없다.
M2단백질은 바이러스 캡슐 표면 막단백질로 수소이온(H+)이 캡슐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다. 감염초기 바이러스는 헤마그글루티닌을 이용해 숙주세포 표면에 붙는다. 수소이온이 헤마그글루티닌의 구조를 변화시켜 바이러스 표피와 숙주세포막이 융합한다. 이 과정에서 M2단백질을 통해 수소이온이 바이러스 안으로 들어간다. 수소이온은 바이러스의 핵산을 활성화하고 숙주세포로 침투하도록 돕는다. 만약 막단백질인 M2를 차단한다면 수소이온이 바이러스캡슐 속으로 들어가지 못해 핵산이 숙주세포로 옮겨오지 못한다. 결국 바이러스가 증식하지 못한다.
M2단백질 항원을 재료로 만든 백신은 몸속에서 M2에 대항하는 항체를 만든다. M2항체는 M2단백질에 붙어 수소이온이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따라서 바이러스는 더이상 숙주세포인 인간의 몸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과학자들은 M2단백질 항원의 표피인 M2e단백질 항원을 백신의 재료로 이용한다.
살렘 교수팀이 쥐에 유니버설 M2e백신을 주사하자 호흡기관에서 더 이상 바이러스 복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예방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살렘 교수는 “M2e단백질은 바이러스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에 유전적 변이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며 “일단 M2e항체가 생기면 예방 효과는 수년 동안 지속된다”고 설명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외에도 뇌수막염과 패혈증균(Neisseria meningitidis), 대상포진균(varicella-zoster virus) 등 항원의 종류가 다양한 병원균의 유니버설 백신도 등장할 전망이다.
코에 스프레이 형태로 뿌리는 생백신도 유니버설 백신 효과를 낸다. 생백신은 살아있지만 독성은 없는 병원체다. 약품이 기관지에 묻으면 기관지가 감염돼 면역반응이 일어난다. 하지만 독성이 없어서 백신을 맞은 뒤 고열이나 기침 같은 증상은 없다. 즉 인체는 감염이 되고 항체도 만들지만 아픈 증상이 없다.
흥미롭게도 콧속에 생백신을 스프레이로 뿌리면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신호물질인 사이토카인이 48시간 안에 분비된다. 이는 선천적인 면역체계를 활성화해 다양한 바이러스를 공통으로 방어한다. 아직 효과적인 조류인플루엔자(AI)백신을 개발하지 못한 상황에서 조류인플루엔자가 급격히 퍼진다면 스프레이 생백신으로 감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WHO는 몇 년 안에 수퍼독감이 출현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수퍼독감 바이러스가 어떤 모습일지 예측할 수 없다. 전염성이 큰 바이러스가 만들어진다면 인류를 재앙에 몰아넣을 수도 있다.
그런데 유니버설 인플루엔자 백신이 개발된다면, 인류는 현존하는 독감 바이러스는 물론 앞으로 출현할지도 모르는 새로운 바이러스들까지 물리치는 ‘만능’ 독감백신을 보유할 수도 있다. 위험요소를 미리 방지하는 유니버설 백신이 그 위력을 보여줄 때가 멀지 않았다.
변종 바이러스의 비밀은 RNA
매년 새로운 독감이 유행하는 이유는 독감바이러스 유전자의 변이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천연두 바이러스 유전자는 DNA로 구성돼있다. DNA복제효소는 자신이 복제한 DNA가 정확한지 점검하는 능력이 있다. DNA를 복제할 때 염기 일부가 떨어져나가거나 중복되면 DNA복제효소가 작동해 스스로 부족한 염기를 채우거나 잘라낸다. 그 결과 복제를 거듭하더라도 원본과 최대한 비슷하게 모양을 유지한다.
반면 독감바이러스 유전자는 RNA로 구성돼 있다. 일반적으로 RNA 유전자의 복제효소는 DNA유전자복제 효소보다 정확도가 떨어진다. 따라서 유전자를 복제할 때 변종이 발생할 확률이 DNA 유전자에 비해 약 10만 배나 높다. 또한 독감바이러스 유전자는 8개로 조각나있다. 따라서 독감바이러스 두개가 한 세포에 동시에 감염되면, 감염된 세포 내에서 서로 섞일 수 있다. 간단한 계산만으로도 28=256개의 변종이 생길 수 있다. 이제까지 알려진 독감바이러스가 수백개에 이른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로부터 만들어질 변종의 개수는 천문학적 수치가 된다. 바로 이 때문에 매년 고열을 동반하는 새로운 변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유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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