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년에 선보인 MP3 플레이어 아이팟의 후폭풍은 어마어마했다. 출시 직후부터 일었던 소비자의 폭발적인 반응 덕분에 누적 판매대수가 1억대까지 치솟았다. 현재 미국 시장의 80%가 아이팟의 몫이다. 전문가들과 소비자들은 뛰어난 디자인을 성공요인으로 지적한다. 이는 회사 부사장이며 수석 디자이너이기도 한 조너선 아이브의 공이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디자인학과 소속의 ‘ID+IM’ 연구실을 이끄는 배상민 교수는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I design, therefore I am(나는 디자인한다, 고로 존재한다)’. 을 줄인 연구실 이름에서 보듯 디자이너로서 이들이 느끼는 자부심은 대단하다.
ID+IM 연구실은 지난해 대만에서 열린 국제디자인공모전에서 금상과 장려상 수상자를 한꺼번에 배출하며 ‘한국산’ 조너선 아이브의 산실로 주목받고 있다.
‘하이테크’ 아닌 신선한 발상으로 세계 1위
‘ID+IM’ 연구실은 대만 국제디자인공모전에서 ‘소비자에게 호소력을 갖는 제품은 수준 높은 기술이 아니라 생활 속을 파고드는 아이디어와 디자인에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배 교수는 “최고상인 금상을 받은 ‘바텀업’은 위생 상태가 좋지 않은 곳에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한 휴대형 정수기”라며 “다른 팀은 공모전의 주제였던 ‘유목민’을 소화하려고 ‘하이테크’에 매달렸지만 우린 오히려 평범한 기술을 바탕으로 접근했다”고 말했다.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플라스틱 페트병의 주둥이 크기가 같다는데 착안해 제작한 ‘바텀 업’은 엄지 크기의 몸체에 필터를 내장했다. 또 입맛에 따라 필터에 각종 차를 넣어 마실 수 있도록 했다. 기술 수준을 높이는 대신 ‘휴대형 정수기’라는 신선한 발상을 시각적인 디자인으로 표현해 1등에 오른 것이다.
한발 앞선 상상력
배 교수팀의 톡톡 튀는 상상력과 디자인의 원천은 학창시절부터 정평이 난 배 교수의 감각에 있다. 패션 분야의 미국 최고명문학교 파슨스디자인스쿨을 다닌 그는 졸업하던 해인 1997년에 미국 전체 디자인학과 학생을 대상으로 한 경진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출품작은 인체를 형상화한 오디오 시스템. 배 교수는 “심장과 갈비뼈, 동맥을 기계장치를 통해 표현했다”며 “특히 광섬유가 음악에 맞춰 각양각색의 빛을 내도록 해 혈관의 느낌을 화려하게 보여줬다”고 말했다. 당시 수상을 계기로 그는 졸업하자마자 파슨스디자인스쿨 교수로 임용됐다.
그 뒤 배 교수는 산업디자인계의 ‘미다스 손’으로 성장했다. 국내외 전자회사와 기계회사들이 앞다퉈 자사 제품을 디자인해달라는 러브콜을 던진 것. 실제로 지난 2003년에 코닥에서 의뢰받아 누구나 쉽게 조작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 디지털 카메라는 유럽 시장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배 교수가 상용화 목전에 있는 제품에만 관심을 쏟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디자인이 제품시장을 이끄는 시대가 왔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현실보다 한발 앞선 상상력이 묻어 있다. 최근엔 발광다이오드(LED)를 넣은 탁구공을 여러 개 늘어뜨려 광고판이나 조명등으로 쓸 수 있도록 한 작품인 ‘핑퐁 스크린’을 만들었다.
배 교수는 “앞으로는 어느 회사 제품이냐보다 누가 디자인했느냐가 가치를 결정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며 “창의력을 갖춘 ‘스타 디자이너’를 기르는데 최선을 다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