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세포만 때려잡는 마법 방망이
최근 개봉한 SF영화 ‘트랜센던스’에서 천재과학자 ‘윌 캐스터(조니 뎁)’는 만능 나노입자를 만든다. 이 나노입자는 불치병을 고치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려서,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든다. 그런데 나노입자가 들어 있는 사람을 주인공이 원격으로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 함정. 결국에는 환자들을 이용해서 자기 군대를 만드는 지경에 이른다. 마법의 방망이 뺨치는 능력을 과시하는 나노입자, 현실에서는 가능할까.

암에 걸리면 지금 당장은 수술, 화학요법, 방사능치료, 세 가지 방법 외에 뾰족한 수가 없다. 이 한계를 극복하고자 나노과학자들이 나섰다. 이들은 나노물질로 암세포만 집중 공격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아직 동물실험 단계지만 일부 기술은 5년 안에 임상시험이 가능할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도대체 어떤 나노입자가 암과의 전쟁에 쓰이는 걸까.
가장 무서운 암에 다가가는 ‘나노목마’
암 중에서도 유독 치료하기 힘든 종류가 ‘교아세포종’이라는 뇌종양이다. 주로 신경조직에 생기는데, 화학요법이나 방사능치료로 잘 죽지 않는다. 미국 존스홉킨스의대의 알프래도 퀴노네스히노조사 교수는 “교아세포종은 가장 치명적이고 공격적인 암”이라며 “현재 기술로는 환자의 생존 기간이 15개월 정도”라고 했다.
수술을 하더라도 뇌라서 매우 조심스럽고 혹시라도 남은 암세포가 퍼질 수 있어 위험하다. 뇌의 정상세포는 건드리지 않고 암세포만 확실히 죽이는 방법은 없을까. 기존 약물은 잘 통하지 않으니까 대신 암세포에 치명적인 킬러 DNA를 보내려는 시도가 있다. 문제는 어떻게 암세포에 가까이 보내느냐다.
존스홉킨스의대 조던 그린 교수는 나노 크기의 생분해성 플라스틱 분자 안에 킬러 DNA를 담아서 뇌에 주입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마치 트로이목마에 군사를 숨겨서 적군에게 보내는 것과 같다. 연구 결과 쥐 뇌의 교아세포종 치료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확인돼 4월 ‘미국화학학회지 나노(ACS Nano)’에 발표했다.
나노 트로이목마는 지름이 143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에 불과하다. 연구팀이 암에 걸린 쥐와 건강한 쥐의 뇌에 킬러DNA가 담긴 트로이목마를 넣은 결과, 뇌에서 교아세포종만 표식인 형광 빛이 났다. 킬러 DNA가 암세포에만 들어가고 건강한 세포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음 과제는 행여 정상세포에 들어가도 전혀 해롭지 않은 킬러 DNA를 개발하는 것이다.

정상세포는 지켜주는 나노자물쇠
만약 암세포 앞에서만 열리는 나노주머니가 있다면 더 안전하 지 않을까. 그래서 암세포를 만나야만 열리는 나노자물쇠를 만드 는 곳이 있다. 항암 약물을 담은 나노주머니가 몸속을 돌아다니 다가, 암세포 앞에서만 나노주머니의 자물쇠가 풀리는 것이다. 서 정해 미국 라이스대 생명공학과 교수가 5월에 발표한 나노입자다.
서정해 교수는 종양, 특히 유방암의 경우 특정 효소가 많이 생 기는 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렇다면 이 효소를 열쇠로 이용 한 나노자물쇠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 서 교수는 먼저 바이러스 (AAV)의 껍질 단백질(캡시드)로 정20면체인 통을 만들어 약물을 넣었다. 그리고 펩티드라는 작은 조각으로 자물쇠를 만들어 껍질 을 꽉 잠그도록 조작했다. 앞서 말한 특정 효소만이 이 자물쇠(펩 티드)를 녹여낼 수 있다.
서 교수는 “껍질을 한 번만 잠그면 염증 부위 등 원하지 않는 부분에서 자물쇠가 풀려 약물이 흘러나올 수 있다”며 “서로 다른 두 가지 효소를 이용해 이중으로 잠그면 그럴 확률이 훨씬 낮아진다”고 했다. 연구팀은 이 기술을 유방암은 물론, 매우 좁은 부 위에 약을 투여해야 하는 신경질환, 심근경색, 심부전증 등에도 응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언젠가 정말 영화처럼 나노입자를 주사로 맞아서 병을 고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바퀴벌레 속에서 나노로봇 군단이 작전 수행
영화 트랜센던스의 나노입자는 사실 치유보다 더 황당한 능력 이 있다. 사람 몸속에 들어간 나노입자 하나하나가 무선인터넷으 로 연결돼 그 사람을 조종한다. 영화에서는 나노입자를 무력화시 키려고 사람을 구리 우리에 넣기도 한다(구리판은 무선통신을 차 단한다).

실제로 동물의 몸속에서 서로 소통하는 나노로봇이 최근 개발 됐다. 미국 하버드대 위스연구소의 생명공학자 다니엘 레브너가 만든 ‘DNA 오리가미 나노로봇’이다. 이 로봇은 긴 사슬 형태의 DNA로 이뤄져 있는데 외부 환경에 따라 접히거나 늘어져 원하 는 모양을 만들 수 있다. 마치 종이접기(오리가미)처럼 로봇을 만 든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로봇들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며 소통을 할 수 있다. 주변을 인식하거나 짐을 실은 로봇, 정보를 모아 명령을 내리는 로봇 등이다. 이들은 주변 환경을 인식해서 AND, OR, NOT 등 정해진 논리에 따라 연산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약물을 배출한다. 예를 들어 주변에 ‘1번과 2번 물질이 모두 있으면 A약을 줄 것’ 또는 ‘1번이나 3번 중 한 가지 물질만 있으면 B약을 줄 것’ 등이다. 1980년대 8비트 컴퓨터 정도의 연산 능력이다.
연구팀은 바퀴벌레 안에 나노로봇을 넣고 정상적으로 활동하는지 실험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마치 바퀴벌레 속에서 로봇들이 생각하고 의견을 모아서 행동하는 것 같이 보였다. 연구팀은 외부 환경에 따라 9가지 ‘처방전’을 내렸다(오른쪽 그림 참조). 이론적으로는 더 많은 경우의 수를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 이 연구는 ‘네이처 나노테크놀로지’ 4월호에 실렸다.
이스라엘 바이안대 나노재료공학연구소의 이도 바체레트 박사는 “생물학적인 치료과정이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똑같은 건 처음”이라며 “로봇의 수가 많을수록 더 복잡한 미션을 수행할 수 있어 조직마다 다른 처방을 해야 할 때 유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팀의 목표는 5년 후에 임상시험을 시작하는 것이다.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격은 아닐까
하지만 나노입자가 과연 안전한 걸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재앙이 되지는 않을까. 영화에서 ‘기적의 나노입자’가 강과 바다, 비를 타고 멀리 퍼져서 결국은 지구를 마비시킨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나노물질인 그래핀도 그럴 수 있다. 그래핀은 탄소가 육각형 그물처럼 편평하게 연결된 것으로 전기가 잘 통하고 강도가 세다. 이 때문에 꿈의 나노물질로 불린다.
미국 UC리버사이드 환경공학과의 샤론 워커 교수는 산화그래핀이 생태계에 미칠 잠재적 위험에 대해 미국 ‘환경공학과학’ 저널 3월호에 발표했다. 그래핀이 자연의 물에 흘러들어갔을 때 분해되지 않고 멀리 퍼진다는 것이다. 특히 바람, 증발, 비 등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표층수에서 더 안정적으로 오래 남는다고 밝혔다.
연구에 참여한 랜스피어 연구원은 “현재의 나노기술은 30년 전 약학계의 상황과 비슷하다”며 “많은 약품의 성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산업계에서 쓰기 시작했는데, 나노기술 역시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예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노입자가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먼저 퍼져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