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나는 로즈의 수행비서로 특별 채용됐다. 로즈의 비서들을 위해 마련된 건물의 침대방 하나를 숙소로 배정받았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로즈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비서들이지만 잠은 대부분 밖에서 잤다. 아무리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 해도 건물에 머물면 업무의 연장처럼 느껴진다는 이유였다.
간단히 짐만 꾸려 숙소로 들어왔다. 환경이 바뀐 탓인지, 밤에는 건물에 나 혼자밖에 없기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선잠이 들었다가 깨고 또 잠들기를 반복했다. 해안을 따라 달리는 꿈을 꾸었다. 푯말 하나 없었지만 나는 그곳을 마산 앞바다라고 여겼다. 조깅을 즐기는 사람들이 맞은편에서 달려오기도 했고 나를 지나 달려가기도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의 두 귀가 유난히 길다는 점이다. 모자 밖으로 삐죽 솟은 귀는 에펠탑 같기도 했고 피뢰침 같기도 했다……아니다! 그것은 토끼의 귀였다. 새벽 3시쯤 겨우 잠이 들었는가 싶은데 인기척에 눈을 떴다. 방문 옆에 누군가 서 있었다.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용감하셔라! 귀신 붙은 건물인 줄 몰랐어요?” 운동복 차림의 로즈였다. 농담 치고는 무척 썰렁했다. 나는 머리를 매만지며 이불을 걷고 일어서려 했다. 로즈가 내 어깨를 눌러 침대에 앉혔다. 팔목에서 향수 냄새가 났다. 새벽 운동을 나서면서도 향수를 뿌리는 모양이다.
칫! 나는 눈곱도 떼지 못했는데 멋은 혼자 다 내고. 로즈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부탁하듯 차분히 말했다. “하나만 약속해줘요. 그이는 점점 나빠질 거예요. 은해 씨가 솜씨도 좋고 또 마음씨도 따듯한 사람인 거 나 알아요. 하지만 미술치료를 해도 픽병이 멈추는 경우는 없죠.”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어요. 두려움이나 슬픔 같은 감정을 다스릴 수도 있고…….” “내, 말, 다시는, 자르지 말아!”
로즈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언제나 온화한 미소로 국민들을 만나던 그녀답지 않았다. 래빗의 병이 더 악화된 것인가. 불길한 예감과 함께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쉰 후 이야기를 이었다.
“화내서 미, 미안해요! 희망을 가지라는 식으로 날 설득할 생각일랑은 버려요. 나도 알 만한 건 다 아니까! ……어젯밤 그이는 저녁을 먹은 후부터 잠들 때까지 여섯 시간 내내 짜증만 냈어요.
매사에 깔끔한 성품이라 자기감정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그이지만, 여섯 시간이나 온갖 트집을 다 잡았거든요. 그리고 잠자리에 든 뒤 실례까지 했어요. 알겠어요? 키 쓰고 소금 얻어 다니러 가야 할 일을 저질렀다고요. 이제 시작이지요. 앞으론 더 끔찍한 일을 겪을 거예요. 미술치료를 하는 동안 그이 곁에서 보고 들은 일들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비밀로 해줘요.”
“미술치료사는 보호자나 본인의 동의 없이는 미술치료 과정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안심하세요.” 딱딱하게 교과서적으로 답했다. 나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불쾌했다.
“은해 씨! 나는 물론 은해 씨를 믿어요. 하지만 세상엔 유혹이 참 많지요.” “각서라도 쓰라는 건가요?” 톡 쏘아주었다. 부부가 똑 같군. 빈틈이 없어. “미술치료사 외에 그이를 전담해서 치료할 의사가 오늘 오후부터 붙을 거예요. 은해 씨는 그이와 관련된 모든 일을 그 의사와 상의하도록 하세요.” “상관으로 모시란 말인가요?” 합법적인 감시자를 붙이시는 건가요, 라고 꼬집어주고 싶었다.
“아니에요. 실력 있는 두 분이서 힘을 합쳐 그이를 정성껏 치료하시라는 부탁이지요.”
로즈의 웃음을 미소로 받아 넘겼다. “저도 하나만 부탁할게요. 환자가 과잉 성욕을 보이거나 혹은 대소변을 실수하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에요. 저도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땐 힘들었지만 지금은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넘어간답니다. 혹시 다음에도 래빗이 그러면 얼굴 찡그리거나 화를 내시면 안 됩니다. 차라리 래빗의 손이라도 한 번 더 꼭 잡아주세요.”
“래빗이라뇨? 그이가 왜 토끼에요?” 아차, 싶었다. 로즈는 래빗과 내가 서로 별명을 부른다는 사실을 몰랐다.
“치료의 한 방편이에요. 미술치료사와 환자 사이의 벽을 허물기 위해 이름 대신 별명이나 애칭을 붙이는 거죠.” “헌데 왜 래빗이죠? 그이 별명이 토끼였다고요?” “래빗이라고 불러 달라 하셨어요. 이유는 저도 모르죠. 짜증을 낸다거나 침실에서 실례를 한 것 외에 래빗에게 또 다른 변화는 없는지요?” “그게…… 말이죠. 잠깐만 따라오실래요. 그이의 새로운 취미를 보여드리죠.”
19.....
해가 뜰 때까지 한 시간 남짓 대통령의 집무실에 머물렀다. 로즈는 이것저것 설명하려고 들었지만, 나는 그녀로부터 집무실을 찍은 미니 사진첩만 받은 후 혼자 잠시 둘러보게 해달라고 청했다. 래빗은 키를 쓰고 소금을 얻으러 가는 대신 집무실을 바꾸었다.
밤을 꼬박 새워 책상 위치를 바꾸고 천장에 야광 별들을 붙이고 낯선 그림들을 벽에 걸었다. 어떤 날은 바닷가에 나온 것처럼 아예 모래를 바닥에 깔기도 했고, 어떤 날은 숲에 들어온 것처럼 벽과 커튼을 초록색으로 바꾸기도 했다. 어떤 날은 모형 차들이 경주를 하듯 바닥을 돌아다녔고 어떤 날은 하얀 솜뭉치가 구름처럼 집무실 여기저기를 떠다녔다.
오늘은 풍선다발들이 꽃나무처럼 군데군데 뭉쳐 있었다. 세어보니 모두 열다섯 다발인데 크기와 색깔과 모양이 제각각이다. 집무실 책상을 한가운데 두고 둥글게 물결을 이루듯 풍선다발들이 늘어섰다. 책상에 가까울수록 다발을 이루는 풍선의 수가 적고 높이가 낮았다. 그러니까 책상에서부터 점점 회오리를 치듯 바깥으로 세차게 뻗어나가는 모양인 것이다.
천천히 풍선다발 사이를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풍선다발을 묶은 실에 관심이 갔다. 열다섯 개의 실은 모두 색깔과 길이가 다를 뿐만 아니라 굵기와 촉감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놈은 짧고 부드러우며 어떤 놈은 길고 거칠었다. 어떤 놈은 중간쯤인데 끈적댔고 어떤 놈은 중간보다는 짧으면서 유리가루를 뿌려놓은 듯 푸른빛이 반사됐다.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왼쪽 구석에 놓인 메모장에 눈이 갔다. 메모장 첫머리엔 어제 날짜와 함께 ‘국무회의’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글자가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직선과 곡선, 원과 삼각형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특히 풍선다발처럼 둥글둥글 뭉친 원들이 많았다. 한 시간 동안 그곳에 머문 결론을 밝히자면, 래빗은 일종의 설치미술을 집무실에서 선보였다. 미리 이런저런 구상을 하고 그에 맞춰 집무실을 다양하게 바꾼 것이다. 로즈는 픽병에 따른 비정상적인 행위로 이 일들을 받아들였고, 해가 뜨자마자 다시 집무실을 원래 상태로 바꾸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건 정신 나간 짓도 어리석은 혼돈도 아닌 예술품 그 자체였다.
20.....
한 번 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집무실의 놀라운 변신이 과연 래빗 혼자만의 힘으로 구상부터 설치까지 이루어진 것인지를. 여러 장의 사진을 통해 그의 행동이 일회적이거나 우연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확인했지만 그래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목요일 늦은 밤 서재로 갔다. 이번에는 감 박사 없이 나 혼자였다.
래빗은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중이었다. 서재는 바뀐 점이 전혀 없었다. 집무실은 하루가 다르게 바꾸면서 서재만은 그대로 둔다는 점이 특이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겠소? 냉장고에 오렌지 주스가 있을 테니 꺼내 먹어도 좋소. 10분만 더 읽으면 되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래빗은 책읽기에 몰두했다. 내가 주스를 다섯 잔이나 마셨는데도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난 번 밀실에서 미술치료를 받은 후 그래도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느꼈는데 내가 마산에 머무는 사이 다시 거리감이 생겼다.
그는 차갑고 단정하며 세련되게 자신을 드러내고 감출 줄 아는 사람이다. 기린처럼 목을 빼고 그가 보는 책을 훔쳐보았다. 두툼한 사진첩이다. 이런저런 별무리가 어지럽게 펼쳐진 우주를 담은 사진들이 한 페이지에 하나씩 담겼다. 그 아래 간략한 설명이 덧붙었지만 래빗의 시선은 사진에만 머물렀다.
“박석재 전임 천문연원장이 언젠가 이런 비유를 했다오. 우주가 지구만 하면 지구는 원자보다도 훨씬 작을 거라고. 그럼 그 원자보다도 작은 지구에서 살고 있는 인간은 과연 크기가 얼마만 할까? 나노 단위로도 측정이 불가능하진 않을까? 그런 내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은 우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참으로 미미한 일이겠소. 과학이라는 건 때로는 제법 큰 슬픔을 담고 있기도 하오. 그렇지 않소?”
“과학은, 잘, 모릅니다.” 사실이었다.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수학이나 과학 과목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냈다. “과학은 몰라도 이 풍광이 아름다운 건 알겠지요?” 래빗이 책을 돌려 내밀었다.
소용돌이였다. 집무실에서 풍선다발로 만든 둥글게 꽈배기처럼 말려 들어가는 모습이 밤하늘에 펼쳐져 있었다. 가운데 검은 부분이 블랙홀이다. 몇 년 전 전시회에서 이 사진을 얼핏 본 기억이 났다.
“이것이었군요. 집무실에다가 이걸 만드신 거예요. 블랙홀처럼 방안의 모든 기운을 빨아들이고 싶으셨나 봐요.” 래빗의 눈빛이 달라졌다.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던 것이다.
“참고는 했소.” 그가 다시 짧게 답한 후 책을 돌려 사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누군가가 자신의 의도를 알아주었을 때 느끼는 기쁨과 비밀을 들켰을 때 감추고 싶은 경계심이 동시에 밀려든 모양이다.
풍선다발로 집무실을 꾸민 후에도 계속 이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낀 탓이리라. 아침 집무 전에는 로즈의 명령에 따라 집무실이 다시 원래 모습을 되찾았을 테지만, 야음을 틈타 집무실을 거대한 블랙홀로 바꾸는 것은 래빗에게 일도 아니었다. 이번에 다시 집무실을 바꾼다면, ‘블랙홀 2’ 정도가 되는 것인가.
“풍선다발들 사이에 뭔가 속도를 느낄 수 있는 장치를 하는 건 어때요?” 나는 슬쩍 미끼를 던졌다. 래빗이 책을 아예 덮고 흔들의자 손잡이를 양손으로 꽉 쥐며 엉덩이가 거의 들릴 만큼 몸을 당겼다.
“투명 천들을 다발과 다발 사이 허공에 늘어뜨리고 바닥에는 센서를 달까 하오. 사람이 그 센서를 밟는 순간, 그림자가 먼저 휘청거리며 나아가도록 장치를 하는 게지. 동시에 풍선다발에 숨겨둔 소형 선풍기들이 돌아가면서 천들을 날리고 조명까지 어지러우면 속도감이 나지 않겠소?”
“멋지네요.” “아니지. 이왕이면 반투명 천에 사람의 일생을 주제로 자료영상들을 쏘는 게 좋겠소. 그 사람의 그림자를 센서가 인식하면서 그때그때 기분에 맞춘 영상들이 투명 천에 깔리고, 이왕이면 자동합성기술로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의 얼굴이 편집되어 자료 영상에 등장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소.”
“그게 가능한가요?” “물론이오. 아주 간단한 기술만 쓰면 되오. 인터넷을 뒤져보면 돈 한 푼 내지 않고 사용할 기술들이 가득가득 하다오. 여러 사람 도움 받을 필요도 없소. 이제 혼자서, 아니지 인터넷과 연결된 컴퓨터만 한 대 있으면 상상하는 대로 만들어 볼 수 있다오. 자, 이럴 게 아니라…….”
래빗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뇌 관련 서적들이 꽂힌 책장으로 나아갔다. 손뼉을 두 번 짝짝 치며 “블랙홀을 보여줘!”라고 또박또박 발음하자, 풍선다발 가득한 집무실 공간이 입체영상으로 떴다. 래빗이 손을 뻗어 풍선다발을 집어 옆으로 옮겼다. 그 다발이 이동하자 방의 명암과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대단한데요.” “아직 완전히 상용화된 건 아니오. 허나 대통령이란 이 자리가 좋은 점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신기술을 바로바로 쓸 수 있다는 게지. 자 그럼 여기다가 시뮬레이션을 한번 해봅시다.” 래빗이 “선풍기”라고 말하자, 선풍기가 종류별로 왼쪽에 주욱 늘어섰다. 그 중에서 가장 작고 바람이 강한 녀석을 골라 풍선 안에 숨겨 넣었다.
그리고 투명 천을 바닥에 거의 닿을까 말까한 정도로 다발 사이에 늘어뜨렸다. 그 다음에 두 가지 프로그램을 찾았다. 하나는 그림자를 통해 그 사람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는 프로그램이었고, 또 하나는 인간의 삶을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인터넷에 떠 있는 동영상들로 편집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래빗은 잠시 오른쪽 아래에 디지털 노트를 불러내서, 두 프로그램이 연동작용을 하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래빗이 손뼉을 두 번 짝짝 치자, 입체 영상 안에 래빗이 방금 내게 설명한 모든 상황들이 설정됐다. 벽에는 인생을 차례차례 비출 소형 프로젝터가 꽂혔고 바닥에도 그림자에 반응할 센서가 놓인 지점이 표시됐다. 래빗이 다시 우주를 찍은 사진첩을 들고 그 사이에 책갈피처럼 끼워둔 나비 모양 핀을 꺼내들었다.
“그냥 작동하는 걸 봐도 되지만 이왕이면 더 생생하게 느끼는 게 좋을 듯하오.” “생생하게 느끼다니요?” “자, 이 핀을 우선 뒷머리에 꽂고 끝에 있는 나비의 더듬이들을 가볍게 왼쪽으로 한 번만 돌리시오.”
나는 일어서서 래빗이 내민 핀을 뒷머리에 꽂았다. 핀은 보기보단 무거웠다. 그리고 왼손을 뒤로 돌려 더듬이를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그러자 갑자기 더듬이 끝에서 붉은 빛이 쏟아지면서 내 몸 전체를 감쌌다. 가상의 옷을 한 겹 더 껴입은 기분이었다.
“T! 이쪽이오.” 집무실이 차려진 입체영상 안으로 걸음을 뗐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주변 풍광이 잠깐 흐려졌다가 곧 집무실 안에 내가 서 있었던 것이다. 서재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고, 래빗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계신 거예요? 여기가 어디죠?”
목소리만 귓전을 울렸다. “걱정 마시오, T. 바로 당신 앞에 있으니. 자 어서 내가 새롭게 만든 블랙홀이 어떤지 들어가 보오.”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풍선다발 속으로 들어섰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내 소중한 기억들이 영상에 담겨 타나났다.
아버지와 싸우고 골방에 숨어 있는 나, 그림에 미쳐 사흘 밤 사흘 낮 동안 그리고 또 그렸던 변산반도에서의 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주 두 병을 거푸 마셨던 나……. 구구절절 실험의 결과를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이틀 뒤 입체영상으로 만든 것과 똑같은 작품이 집무실에 등장했다. 래빗의 놀라운 재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