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축구클럽 레알 마드리드의 별명은 ‘지구 방위대’다. 선수 개인의 엄청난 몸값과 뛰어난 기량을 빗댄 말이다. 문제는 레알 마드리드의 전력이 지구를 지킬 정도로 독보적이지 못하다는데 있다. 챔피언스리그에서 통산 9번이나 우승했지만 2000~2001 시즌 이후에는 한 번도 왕좌를 차지하지 못했다.
이유가 뭘까. 일부 축구전문가들은 조직력의 부재를 지적한다. 지단, 호나우두, 라울, 피구, 베컴, 카를로스 등 쟁쟁한 스타들을 끌어들였지만 정작 이들을 일사불란하게 엮을 전략이 부족했다는 얘기다. 단체 경기인 축구에서 선수 개인에만 초점을 맞춘 채 ‘팀워크’를 도외시한 결과다.
두 유전자 협력해 병균에 대항
‘팀워크’는 비단 축구에서만 중요한 건 아니다. 게놈기능제어연구단을 이끄는 연세대 생화학과 김영준 교수는 “최근에 발표된 게놈 연구들은 게놈 간 ‘팀워크’를 밝히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게놈 하나하나의 기능을 규명하는데 힘을 기울였지만 최근에는 게놈끼리의 상호작용을 알아내는 연구가 중요해졌다는 설명이다.
게놈이 상호작용한다는 사실이 왜 중요할까. 김 교수는 지난 2005년 2월 과학전문지 ‘네이처 면역학’에 게재한 논문에서 답을 내놨다. 그는 논문에서 우리 몸의 대식세포(세균을 잡아먹는 면역세포)에 있는 AP-1과 NF-kB라는 두 유전자가 병균이 침범한 직후 상호작용해 면역체계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그동안 면역반응은 일부 유전자의 단독 기능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상호작용’이 핵심열쇠라는 점을 규명한 것이다. 이전까지 세계 생명과학계는 상호작용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연구는 발표되자마자 큰 파란을 일으켰다.
김 교수에 따르면 두 유전자의 상호작용은 매우 조직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면역반응의 수위를 정확히 조절한다. 몸 안으로 병균이 들어오면 AP-1은 병균을 포위 공격할 수 있도록 대식세포의 움직임을 촉진한다. NF-kB는 항균 단백질인 ‘사이토카인’을 분비한다.
그러다 병균이 모두 소멸하면 AP-1이 NF-kB에 기능을 멈추도록 신호를 보낸다. 두 유전자가 침투한 병균을 물리칠 때까지 상호작용하면서 면역반응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두 유전자의 관계를 서로 다른 임무를 띠는 군대가 원거리에서 협력하는 것에 비유했다. 그는 “육군(NF-kB)과 공군(AP-1)이 긴밀히 협력할 때 적(병균)을 효과적으로 제압(면역반응)하고 엉뚱하게 아군(환자)이 다치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연구결과는 개별 유전자의 기능을 제어하는데 집중하던 이전까지의 제약기술 방향이 수정돼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개별 유전자의 기능이 아니라 유전자 간 상호작용을 조절하는 약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면역반응 조절하는 치료제
지난해 김 교수는 AP-1이 없는 돌연변이 초파리에서 면역반응이 과도하게 일어나는 현상을 확인해 NF-kB와의 상호작용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NF-kB가 AP-1과 짝을 이뤄 협력하지 않으면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면역반응이 폭주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또 ‘히스톤 디아세틸레이즈’라는 효소가 AP-1과 함께 작용해 NF-kB의 기능을 억제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 분야 연구가 활성화된 것이 5년 내외라는 점을 감안하면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 성과를 축적한 셈이다.
연구단의 성과 덕분에 면역체계의 이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신약 개발의 가능성이 열렸다. 면역과민 반응 때문에 나타나는 아토피와 패혈증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앞으로 연구가 진척되면 젊은이들에게 주로 일어나는 염증성 장질환인 크론병을 비롯해 각종 난치병의 해결법이 잇달아 등장할 전망이다.
그러나 최근 2~3년 사이 터져 나온 성과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는 상용화 전망에 신중한 입장을 내비쳤다. 당장 내년부터 약국에 면역반응을 조절하는 치료제가 나올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생명과학 연구의 흐름에 비쳐볼 때 상용화까지는 적어도 10년 이상이 걸린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김 교수는 “현재 진행하고 있는 게놈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가 질병 치료의 새로운 길을 열 것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질병 치료에 대한 단서가 게놈 간 상호작용 연구를 통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 개발의 정확한 타깃이 발견되면 제약회사를 비롯한 바이오 업체들의 투자가 뒤따를 것이고, 이렇게 되면 상용화의 속도도 빨라질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의 손끝에서 시작될 신개념 치료제가 질병으로 신음하는 환자들에게 어떤 희망을 던질지 주목된다.
암 치료 가능성 여는 국제연구 주도
바이오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린다. 성장 잠재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540억 달러 수준이던 세계 바이오산업 규모는 2005년 910억 달러에 이르렀다. 오는 2015년에는 30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문제는 우리나라 바이오산업의 낮은 경쟁력이다. 시장이 확대돼도 팔 상품이 없다. 전반적인 기술수준은 선진국의 60~70%, 특히 신약개발을 위한 ‘신물질 창출기술’은 30% 수준이라는 게 정부와 업계의 분석이다.
김영준 게놈기능제어연구단장이 참여하고 있는 국제 공동연구인 ‘에피제노믹스’는 이 같은 열세를 만회할 수 있는 방안 중 하나다. 에피제노믹스는 환경 영향으로 DNA가 메틸화(유전자의 발현에 영향을 주는 화학적인 변형)되거나 단백질의 구조가 바뀌는 현상을 연구하는 분야다. 유전자 자체보다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를 탐구한다는 얘기다.
연구단의 이욱빈 연구원은 “실제로 유전자 자체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생기는 암은 전체 발생 건수의 5%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나머지는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다. 나무(유전자)에서 숲(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과정)으로 연구의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얘기다.
에피제노믹스는 현재 본격적인 연구 단계에 진입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앞으로 2년간 진행되는 시범 연구에만 3000만 달러가 들어갈 정도로 규모가 큰 프로젝트다. 게놈기능제어연구단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김 교수는 “1990년 게놈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을 때 우리나라에는 그 중요성을 아는 연구자가 많지 않았다”며 “당시 연구에 참여했다면 생명과학의 수준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태동 단계에 있는 에피제노믹스에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암과 같은 난치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열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