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국내 언론은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처음으로 여성과학자가 오르게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사이자 과학자인 김점동(金點童, 1877~1910) 여사가 그 주인공이다. 서재필 이후로 두번째 한국인 의사인 그는 열정적인 의료활동과 헌신적인 무료 진료활동으로 당대 여성들의 귀감이 됐다.
김점동 여사처럼 역사를 만들어온 여성과학자들은 남겨진 사료가 적거나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왔다. 이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당대 남성을 능가할 만한 능력을 품고 있던 ‘알파걸’인데 말이다.
1980년대 이후 다양한 여성과학자를 새롭게 조명하면서 과학 활동에 참여한 많은 여성의 얼굴이 하나둘씩 드러났다. 남성 중심의 과학사 속에서 알파걸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자.
남편의 이름으로
1786년 프랑스 천문학자 제롬 드 라랑드는 ‘여성을 위한 천문학’이란 책자에 여성 천문학자들을 연대순으로 소개해 과학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당시까지 천문학 분야에서 활동하던 여성들이 적지 않았던 덕분에 이런 책자가 가능했을 것이다. 실제 여성 과학사학자 론다 쉬빙어에 따르면 1650년에서 1710년까지 독일 천문학자의 14%가 여성이었을 정도로 여성의 과학 활동이 활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공식적인 과학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이 과학자의 아내나 딸이라면 남편이나 아버지 이름을 빌리거나 남성의 필명을 사용해 자신의 업적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혜성을 발견해 18세기 천문학사에 큰 공헌을 했지만 남편의 이름 뒤로 자신을 숨겨야 했던 여류 천문학자 마리아 빙켈만(1670~1720), 자신의 살롱을 운영하며 화학 실험을 직접 하면서 연구 논문을 작성했지만 남성의 필명으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라부아지에의 아내인 마리안 폴즈(1758~1836) 등이 그런 익명의 여성과학자에 속한다.
또 여성이면서도 아버지가 운영하는 작업장에서 일을 도우며 세밀화를 그리는 법을 익힌 마리아 메리안(1647~1717)은 독학으로 ‘수리남 곤충의 변태’라는 저서를 써 곤충학에 족적을 남겼다.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은 당대 과학자 사회도 자연에 대한 여성과학자의 호기심을 잠재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남편의 이름으로, 혹은 남성의 필명으로 과학 활동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과학 활동이 이뤄지는 공식적인 장으로 학회가 성립되면서부터였다. 과학자 전문집단이 형성된 토대이며, 오늘날 과학이 갖는 권위를 정립해준 학회는 처음부터 여성을 배제했다. 영국 왕립학회 창설 회원들은 여성을 ‘지혜의 배신자’ ‘자신들을 악덕과 불경건, 파멸로 몰고가는 선동자’라 해 학회가 여성을 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순수한 남성적 정신만이 진정한 지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이 17세기 영국 왕립학회,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를 지배했다. 따라서 여성을 정식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마리 퀴리도 거부
영국 왕립학회는 1902년 케임브리지대 출신 여성물리학자 헤르티나 에이턴(1854~1923)의 회원 가입을 처음으로 논의했으나 부결했다. 1945년에서야 X선 결정학 연구에 기여한 물리학자 캐슬린 론즈데일(1903~1971)과 미생물학자 마저리 스티븐슨(1885~1948)을 첫 여성 회원으로 선출했다.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190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마리 퀴리(1867~1948)를 8년 뒤 회원으로 추천받았으나 여자라는 이유로 선출하지 않았다. 1979년에야 수리물리학자 이본 쇼케브뤼아를 첫 여성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은 뇌가 작아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다’ ‘고등교육은 모성에 해롭다’는 식으로 고대부터 내려온 여성에 대한 편견을 들어 여성에게 고등교육은 불필요하고 오히려 해롭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1732년 이탈리아 물리학자 라우라 바시(1711~1778)가 예외적으로 볼로냐 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됐고, 볼로냐대에서 학위를 받아 볼로냐대 교수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는 뉴턴 물리학에 정통한 여교수에게 대중 강연을 맡김으로써 볼로냐대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대학 당국의 계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독일에서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은 도로테아 슐뢰처도 아버지 친구의 청에 의해 겨우 박사 학위를 딸 수 있었다. 박사 학위 시험을 보는 날 그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시험장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례를 요구받았다.
대학이 여성에게 문호를 개방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다. 1848년 영국이 여자대학을 설립하더니, 1861년에는 미국이 여성의 대학 입학을 허용했다. 유럽 대륙은 이보다 늦어서 오스트리아가 1901년에, 독일이 1908년에 정식으로 여성 입학을 허용했다. 여성도 대학에서 정식으로 과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은 셈이다.
하지만 공식적인 제도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스며들어 있던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여성과학자를 가로막았다. 1877년 영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제임스 맥스웰은 자신의 강의를 청강하고 싶어하는 여자대학 수강생들에게 “케임브리지대 캐번디시실험실 학생은 남성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규칙”임을 강조했다. 천문학자가 되기 위해 케임브리지대에서 수학과 물리학 강의를 들어야 했던 여학생들은 1899년에 이런 규칙이 정식으로 폐지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맥스웰, “여대생 청강은 안돼!”
오스트리아 빈대학 물리학부에 처음으로 입학한 리제 마이트너(1878~1968) 역시 베를린대에서 최신 물리이론을 수강하기 위해 보수적인 막스 플랑크에게 관용을 청해야만 했다.
제도의 장벽이 없어지면서 여성이 비교적 활발하게 과학자 사회로 진출했지만 이들을 맞이한 것은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차별이었다. 17세기 이후 뿌리 깊게 이어져온 여성에 대한 차별 의식은 여성과학자의 업적을 평가하는데 영향을 줬다.
핵분열과 연쇄반응의 메커니즘을 명확히 규명해낸 사람이 바로 마이트너였다. 마이트너는 조카 오토 프리쉬와 함께 우라늄 원자핵이 분열할 때 나온 중성자가 다른 원자핵을 때리는 연쇄반응을 일으키고 이때 생긴 질량 결손으로 인해 막대한 에너지가 쏟아져 나온다는 원리를 처음으로 밝혀냈다. 그리고 핵분열이란 이름도 마이트너가 처음으로 붙였다.
하지만 그는 동료 과학자 오토 한과 달리 자신의 업적으로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독일인 동료의 후원을 받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노벨상 선정 심사위원회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을 것이다. 여러 차례 후보가 됐지만 끝내 노벨상은 마이트너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로절린드 프랭클린(1920~1958)도 비슷한 예다. 과학사가 존 데스몬드 버널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X선 사진’이라고 극찬한 DNA X선 회절사진으로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하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프랭클린 역시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왓슨과 크릭이 노벨상을 받던 그 해 이미 세상을 떠난 탓이기도 했지만, 동료의 인정을 받지 못해 심사에서 제외됐을 것이 분명하다.
비록 후에 프랭클린의 동료 왓슨이 ‘그녀의 용기와 성실성’을 인정하는 글을 썼지만, 평소에 왓슨이 프랭클린을 대한 태도는 이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왓슨의 글에는 프랭클린의 연구 내용보다는 ‘31살의 나이에 영국의 10대 같은 옷차림’ ‘여성적인 매력을 보이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 사람’이란 표현이 더 눈에 띈다. 동료로서 여성과학자를 인정하는데는 매우 인색했던 셈이다.
사회가 여성과학자를 보는 눈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지도교수인 앤터니 휴이시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천체물리학자 조슬린 벨 버넬이 펄서 발견에 관한 기자회견에서 기자로부터 받은 질문은 남자 친구가 있는지 하는 따위였다.
여성의 업적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외국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이자 과학자인 김점동 여사도 그러하다. 미국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에 가장 어린 나이로 입학한 그는 어려운 학업을 마치고 바로 귀국해 10달간 3000여명을 돌볼 정도로 정열적으로 의술활동을 펼쳤다. 과로 탓에 폐결핵에 걸려 34살에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열정적인 삶은 후학 여성들이 의사의 길을 걷도록 하는데 큰 영향을 줬다.
하지만 이런 선구적인 업적은 ‘명예의 전당’ 후보에서 몇 차례 탈락하는 과정에서 보듯이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자료가 불충분하다는 점이 탈락 이유로 제기됐지만 그보다는 여성과학자를 인정하는데 인색한 우리 사회의 시각에서 비롯된다.
2차대전 뒤 여성이 과학 분야로 활발히 진출하면서 퀴리 이후 노벨상을 수상한 여성과학자도 하나둘씩 늘어갔다. 여성 역시 남성과 동일한 과학적 능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더 나아가 여성과학자들은 남성 중심의 편향된 과학 이론을 바로잡기도 했다.
여성만의 독특함, 노벨상 단독 수상하다
1973년 여성 영장류학자 제인 랭카스터는 수컷이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해 보이는 공격적인 행동을 암컷도 똑같이 한다는 이론을 밝혀 영장류학 이론 모델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역시 영장류학자인 사라 홀디도 1981년 성선택 과정에서 암컷의 적극적이고 경쟁적인 행동 가능성을 밝혀 다윈의 성선택설 이론에 반하는 결과를 내놓았다.
이들 연구는 그동안 사회에 은연 중에 내재된 이데올로기 탓에 ‘암컷에 초점을 맞춘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던 관행을 깨뜨린 사례였다. 관찰 과정에서 수컷에 대한 데이터만 모았다거나 수컷의 행동에 맞춰 이들 데이터를 해석해온 점이 여성과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즉 여성과학자들은 남녀 차별 이데올로기 때문에 편향돼 있던 과학 이론을 바로잡는데 큰 기여를 했다.
과학사학자 에블린 폭스 켈러는 1983년 81세의 나이에 단독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바버라 맥클린톡(1902~1992) 전기를 통해 여성과학자의 독특한 경험이 과학의 새로운 발견으로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줬다.
맥클린톡은 오랫동안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에서 얼룩진 옥수수를 연구했는데, 이 얼룩이 색소 유전자의 변이 때문이 아니라 유전자가 한 염색체에서 다른 염색체로 자리를 바꾸기 때문에 생긴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독립된 유전자 단위로 모든 유전현상을 해석하고자 하던 분위기에서 맥클린톡은 옥수수 세포라는 복잡한 유기체 전체로 유전자를 해석하는 방법을 홀로 고집했다. 그는 당대 남성 유전학자들의 연구 경향에 휩쓸리지 않고 생명현상에서 상호 협력적인 연관을 보려는 여성적 관점 덕분에 ‘유전자 자리바꿈’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발견하고 이를 규명할 수 있었다.
과학에서 양성 평등이 구현돼야 하는 이유가 인권 문제 때문만은 아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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