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축구 K-리그가 3월 4일 개막전을 시작으로 대장정에 돌입했다. 안정환, 박주영 등 스타 군단이 쉴 새 없이 그라운드를 누빌수록 관중의 함성도 높아졌다. 이 함성은 4월 8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FC서울과 수원삼성의 라이벌전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K-리그 역대 한 경기 최다 관중인 5만5397명이 몰린 것이다. 5만의 관중 틈에서 좀 더 재미있게 축구경기를 즐기는 비법을 소개한다.
축구 선수의 기발한 골세레모니를 보는 일은 축구관전의 한 묘미다. 2002년 월드컵에서 안정환은 ‘미국 쇼트트랙 국가대표선수인 아폴로 안톤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을 패러디한 골세레모니를 선보여 관중의 갈채를 받았다. 팬 서비스 차원에서 선수들은 계획적으로 골세레모니를 준비한다.
하지만 골을 놓쳤을 때 선수가 보이는 반응은 사뭇 다르다. 눈앞에 놓인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아쉬움과 팀원?감독?관중에 대한 미안함이 한데 버무려진 행동을 한다. 얼굴을 양손에 푹 파묻은 채 엎드려 일어나지 못하거나 먼 산을 바라보는 선수까지 다양하다. 의도적으로 준비하지 않았음에도 여러 종류의 실축세레모니를 보이는 원인은 무엇일까.
머리 감싸면 편안해져
수만 명의 관중이 모인 축구 경기장에서 축구선수가 페널티킥을 실축했다 치자.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실축을 한 선수는 눈물이 앞을 가리며 사랑하는 가족을 떠올릴 테지만, 그라운드 밖에 있는 가족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길은 요원하다.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스스로 머리를 감싸쥐는 방법뿐이다.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했을 때 머리를 감싸쥐는 현상을 두고 영국 옥스퍼드대 심리학과 피터 콜렛 교수는 아기 때의 경험이 무의식에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아기 때 부모가 목욕을 시키면서 자신의 머리를 받쳐줬을 때처럼 스스로 뒷머리를 감싸쥐면 안정과 행복을 느낀다는 말이다. 비록 실축 때문에 관중의 야유를 받더라도 머리를 감싸는 간단한 행동으로 최악의 상황을 견디기 위한 위안과 힘을 얻는다.
콜렛 교수의 주장처럼 뒷머리를 감싸는 행동이 인간의 본능이나 무의식 때문이라면 아시아 같이 유럽 밖에서 온 선수도 비슷한 행동을 해야 한다. 사실 유럽 프리미어리그와 달리 국내 프로축구 K리그나 국가대표팀 경기에서는 실축 뒤 뒷머리를 감싸쥐는 선수가 별로 없다.
콜렛 교수는 심리와 행동에 큰 영향을 주는 ‘환경 요소’를 빼놓았다.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알베르트 밴듀라 교수는 인간의 행동은 개인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상호작용해 내놓은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밴듀라 교수의 ‘사회학습이론’에 따르면 사람의 행동은 다른 이의 행동이나 상황을 관찰한 뒤 모방하는 과정이다.
2007년 2월 28일,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FA컵 16강전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한 직후 이동국 선수는 허탈하게 골문을 쳐다봤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선수와는 다르게 말이다. 무엇이 두 선수의 차이를 만들었을까?
이 선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영국 미들즈브러 팀으로 이적한지 얼마 안 된 이 선수는 새 동료, 새 경기장, 새 관중 같이 온통 새로운 ‘환경’과 마주쳤다. 그는 TV나 경기 관전으로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축구 문화를 고작 몇 번 접했을 뿐 아직 몸에 익히지 못했다. 다시 말해 아직 다른 동료나 관중의 독특한 버릇을 모방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미들즈브러 선수로서 경기를 하다가도 페널티킥을 실축하면 한국에서 하던 버릇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다른 선수의 모습을 충분히 관찰하면 결과는 달라진다. 이 선수는 다른 선수들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뒷머리를 감싸는 모습을 보며 학습할 것이다. 결국 이 선수도 다른 나라의 축구 리그보다도 유독 뒷머리를 자주 감싸는 프리미어리그 선수와 닮아갈 것이다. 몇 년 뒤 그는 머리를 감싸쥐는 행동을 당연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밴듀라 교수의 이론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 선수가 뒷머리를 감싸기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프렌즈’(Friends) 같은 미국 드라마 주인공은 실수를 했을 때 ‘웁스!’나 ‘오 마이 갓!’ 같은 감탄사를 연발한다.
줄기차게 외국 영상물을 틀어주는 케이블 TV 같은 매체가 없던 십 년 전만 해도 흔치 않은 풍경이었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게 외국어로 된 감탄사를 내뱉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아기 때 경험이나 자기만의 기질 때문에 ‘웁스!’나 ‘오 마이 갓!’을 내뱉는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배웠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다.
선수가 페널티킥을 실축했을 때 관중들은 자신이 실수한 것도 아닌데 머리를 감싸 쥔다. 관중은 자신이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처럼 느껴 선수에게 감정을 이입하기 때문이다.
신경생리학자들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거나 상상하기만 해도 자신이 직접 그 행동을 한 것처럼 활성화되는 ‘거울뉴런’을 발견했다. 1986년 이탈리아 파르마대의 지아코모 리졸라티 교수는 원숭이 뇌에 전극을 심고 물건을 집을 때 뇌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관찰했다. 그런데 실험실에 연구원이 아이스크림을 갖고 들어오자 원숭이의 뇌에서 갑자기 반응이 일어났다. 놀랍게도 바로 원숭이가 직접 아이스크림을 들었을 때의 뇌반응과 같았다. 간접 경험을 했을 뿐인데도 자신이 직접 경험하는 것처럼 신경세포가 활성화됐다.
행동 따라하게 만드는 거울뉴런
최근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리사 아지즈-자데 박사는 실험참가자들이 ‘복숭아를 베어 먹다’라는 문장을 읽거나 복숭아를 먹는 사람을 볼 때, 자신이 직접 복숭아를 먹을 때와 같은 뇌반응이 일어났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 상황을 보는 것뿐 아니라 상황묘사를 듣거나 글자를 읽을 때도 거울뉴런이 활성화된 것이다.
신경생리학자들은 인간이 다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알 수 있는 것도 거울뉴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거울뉴런 연구가 계속 되면 ‘직접 경험’뿐만 아니라 독서나 관찰 등의 ‘간접 경험’으로도 사람이 감동을 받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거울뉴런이 망가지면 어떻게 될까? 단지 뉴런이라는 세포가 망가지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거울뉴런이 담당하는 감정이입 기능을 잃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 심하면 ‘왕따’가 될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슬퍼하는데 혼자만 덤덤하게 있거나 아예 기뻐한다면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집단에서 배제되기 쉽다. 거울뉴런은 사회생활에 매우 중요한 요소인 셈이다. 우리의 뇌가 오랜 동안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한 산물임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이야기다.
실축 뒤 축구선수와 관중이 모두 뒷머리를 감싸쥐는 행동에는 축구 문화를 공유하는 다른 동료의 행동을 모방해 집단의 일원임을 확인받으려는 의지가 숨어있다. 유럽 리그에서 뛰는 선수는 그 집단의 구성원들이 으레 그러하듯 뒷머리를 감싸쥐고, 아시아 리그에서 뛰는 선수는 고함을 치거나 허탈하게 골문을 쳐다보는 식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