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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우울 날려버리는 거침없이 하이킥!

‘내’안에‘또 다른 나’있다


거침없이 하이킥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복잡하게 얽힌 인간 먹이사슬을 볼 수 있다. 언뜻 보면 ‘순재’가 먹이사슬의 최고 자리를 차지한 듯 보인다. 그러나 사실 순재는 며느리 ‘해미’에게 꼼짝 못한다. 해미는 순재뿐만 아니라 남편인 ‘준하’와 시어머니인 ‘문희’까지 제압한다. 하지만 유독 시동생 ‘민용’ 앞에서는 기를 못 편다.

민용은 다른 사람에게는 다 까칠하게 굴어도 ‘민정’에게는 그러지 못한다. 민정도 민용 앞에서 쩔쩔맨다. 한편 학교 일진인 ‘윤호’는 집에서나 학교에서 거칠 것 없이 행동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민정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된 듯 하다.

복잡한 천적관계 속에서 기상천외한 모습을 보여주는 주인공들이 시청자를 즐겁게 하고 있다. 그런데 주인공들이 엮어내는 먹이사슬을 관통하는 중요한 축이 있다. 그것은 바로 ‘화’다. 등장인물은 사소한 일에도 쉽게 화를 내는 사람과 그 화에 억눌리며 사는 사람으로 나뉜다.

가장 화를 잘 내는 사람부터 차례대로 꼽으면, 순재-윤호-민용-해미-준하-민호-문희-민정 순이다. 그런데 화를 잘 내는 순재나 윤호, 화를 못내는 문희와 민정 모두 비슷한 심리 상태에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사람은 저마다 자기에 대한 생각이 있는데 이를‘자기개념’ (self concept)이라고 한다. 사회심리학의 ‘자기차이이론’ (self-discrepancy theory)에 따르면 사람은 세 종류의 자기개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은 실제 무엇이라는 ‘실제적 자기’,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의무적 자기’, 마음 속으로 바라고 있는 ‘이상적 자기’가 그것이다.

1989년 미국 뉴욕대 토리 히긴스 교수는 실험 참가자에게 자기 상태에 해당하는 설문에 답하도록 해 실제적 자기를 가려냈다. 그리고 참가자의 부모가 바랄만한 내용을 뽑게 해 의무적 자기와 이상적 자기를 선별했다. 끝으로 심리검사에서 참가자들의 정서를 파악했다.

그 결과 실제적 자기와 이상적 자기의 차이가 크면 우울하고, 실제적 자기와 의무적 자기의 차이가 크면 불안하고 초조해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즉 자기개념의 차이에 따라 다른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등장인물도 자기차이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꽈당 민정 | 불안한 소심녀


불안한 소심녀 꽈당민정


‘민정’은 소심하기 그지없다. 항상 약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과 초조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민정은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맞게 학생들 앞에 당당히 서고 싶지만 매번 불안하기만 할 뿐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소심함을 뛰어넘으리라 굳은 결심을 하며 자율학습 시간에 도망간 학생에게 매를 들지만, 그만 몽둥이가 부러지고 만다.

민정은 끝까지 밀어붙이지도 못하고, 결국 학생들 앞에서 ‘이게 아닌데…’ 하며 약한 모습을 보이고 만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화장실에 숨어서 남학생 제자인 윤호에게 생리대를 사달라고 부탁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이런 식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실수는 실제적 자기와 의무적 자기의 차이를 더 넓게 벌리고, 그만큼 불안과 소심함도 커진다.

밍크 문희 | 우울한 안주인


우울한 안주인 밍크문희


‘문희’는 불안하다기보다 우울하다. 당당하게 시어머니 노릇을 하는 이상적 자기와 며느리의 ‘오케이’를 기다려야 하는 실제적 자기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며느리의 기가 세다’는 친구의 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며느리의 기를 못 누르는 실제적 자기와 이상적 자기의 차이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문희’는 며느리의 기를 꺾겠다고 부적을 받으러 점집에 갔다가 퇴치가 불가능할 정도로 기가 세다는 말을 듣자 오열할 정도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런 우울한 상태가 계속되면 뇌를 안정시키는 세로토닌이나 사람을 흥분시키는 노르에피네프린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정서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조만간 시청자들이 문희 구명운동을 벌여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야동 순재 | 집에서만 큰소리치는 바깥양반


집에서만 큰소리치는 바깥양반 야동순재


집안의 가장인 ‘순재’는 어떨까? 순재는 사회에서 경제적 지위가 꽤 높은 한의사다. 세상에 어떤 것이든 거침없이 휘두르고 떵떵거리며 살 만한 위치다. 그러나 그는 며느리보다 실력이 못한 한의사다. 가부장적이고 남성 우월적인 성격이지만 성질대로 자기 힘으로 뭘 화끈하게 밀어붙이기에는 몸이 이미 늙었다. 누워있는 문희를 보면서 ‘S라인’이 살아있다고 말을 던져 보지만 어떻게 하지 못하고 결국 몰래 ‘야동’이나 봐야 하는 처지다.

세상은 또 얼마나 빨리 바뀌는지 MP3 플레이어, DMB폰 같은 첨단 제품이 쏟아지고, 밖에 나가면 마음이 편하기보다는 오히려 긴장의 연속이다. 한마디로 살만큼 산 70대 남성이 ‘하이킥’을 날리기에 세상은 너무 버겁다. 결국 그가 하이킥을 날릴 장소는 좁은 집안 밖에 없다. 실제로 순재는 집안에서 아들을 향해 발길질을 해댄다.

가부장 시대로 따지면 최고 권력자여야 하는 위치, 능력남 등의 이상적 자기와 뭘 해도 항상 여지없이 무너지는 실제적 자기의 차이가 엄청나니 순재는 우울할 수밖에 없다. 우울하면 으레 무기력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울이 ‘공격성’으로 바뀌어 나타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우리는 우울증 때문에 폭력, 살인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끔찍한 뉴스를 심심찮게 보고 있지 않은가.

백치 윤호 | 착하고 명랑한 불량소년


착하고 명랑한 불량소년 백치윤호


‘윤호’는 형을 존중해야 하는 의무적 자기와 실제적 자기의 차이가 크다. 모처럼 마음잡고 의무적 자기에 가까운 행동을 해도 남들은 동생으로서 당연한 일이라며 알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의무적 자기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했을 때는 사람들이 욕을 하니 미칠 노릇이다. 예를 들어 형과 티격태격하다가 2층에서 떨어졌을 때도, 사람들은 윤호의 상태엔 별 관심이 없고 형의 눈이 시퍼렇게 됐다며 윤호를 몰아세웠다.

‘아동 학대’나 ‘아동 유기’에 대한 자기차이이론 연구에 따르면, 긍정적인 결과를 하나도 얻지 못한 아동은 우울증에 걸리기 쉽고, 부정적인 결과만 계속해서 얻은 아이는 분노를 일으키기 쉽다.

만약 심리학 이론에 따라 윤호의 어릴 적 모습을 그린다면 이런 장면이 필요하다. 엄마는 한의사라는 직업 때문에 바빠서 애정을 보이지 않고(긍정적인 결과를 하나도 얻지 못하는 조건), 할아버지는 형에게 대든다고 계속 혼낸다(계속 부정적인 결과만 얻는 조건). 결국 우울과 분노가 공격성으로 변해, 윤호는 일진회에 가입한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윤호는 정서 불안 때문에 감정에 휩쓸린 생활을 하다가 인생을 망친다. 그러나 이것은 다큐멘터리에나 나올 만한 이야기다. 시트콤이기 때문인지 윤호는 어두운 부분이 있어도 평상시는 명랑하다. 또 현실의 일진회 아이와는 다르게 선생님을 도울 정도로 착하다. 영어학원에서 원어민 선생님 얼굴만 봐도 기가 죽을 정도로 이상적 자기와 실제적 자기의 차이가 큰 것이 문제이지만 말이다.

여하튼 윤호는 할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자주 화를 내고 불평을 한다. 그런데 순재와 윤호는 단순히 다른 사람을 공격하려고 화를 내지는 않는다. 그가 화를 낼 때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알아달라는 것이다. 사실 다른 가족들이 서로 티격태격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나를 알아주세요

가족치료 분야의 선구자인 버지니아 사티어에 따르면 모든 대화의 근본 메시지는 ‘나를 알아주세요’다. 순재는 준하에게 주식투자를 잘 못 한다며 항상 화를 낸다. 그런데 폐업을 선언한 준하에게는 별로 화를 내지 않는다. 대신 개인자산관리사를 부른다. 이를 통해 자기가 그저 돈이 많아서 실업자인 아들에게 주식 투자를 맡긴 것이 아님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순재의 화에는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족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과, 아들을 돌보는 아버지로서의 마음이 녹아 있다. 그렇게 순재는 성격이 못돼 이성을 잃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아직 건강히 살아있기 때문에 화를 낸다. 화는 순재와 윤호가 자신의 우울함을 떨쳐버리기 위한 몸부림이다.

결론적으로 ‘거침없이 하이킥’의 메시지는 이렇다. “시청자들이여, 하이킥 날리려다 ‘꽈당’해도 죽지 않는다. 견딜 수 없을 때는 사회를 향해, 남을 향해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려라!” 공중파치고는 도발적인 메시지다. 그러나 꽉 막혀 죽는 것보단 하이킥을 날리고 ‘순재’처럼 도망치는 것이 당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 좋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등장인물 민정, 윤호, 문희, 순재는 자기개념의 차이에 따라 비슷하게 우울과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그 정서적 문제를 해결하는 행동방식은 다르다. 만약 여러분이 민정이나 문희의 행동보다 순재에게 더 끌린다면 시트콤의 메시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셈이다. 부디 여러분이 공감한 대로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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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이남석 교양소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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