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널리 퍼지면서 바이러스에 대한 관심이 상당하다. 사실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번처럼 바이러스가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여러번 있었다. 아마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이런 현상은 계속될 것이다. 컴퓨터가 만들어지면서부터 컴퓨터바이러스가 나타나 계속 새로운 종류가 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새로운 바이러스가 갑자기 나타나 무서운 질병을 일으키면 적당한 치료법도, 예방법도 없어서 더욱 무섭게 인식된다. 인간으로부터 결코 완전히 떼어낼 수 없는 바이러스가 무엇인지,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 어떤 연구가 진행되는지 살펴보자.
놀랄 만큼 작고 간단한 생명체
‘맹독의’(virulent)란 단어에서 유래된 바이러스는 말 그대로 매우 독성이 높아서 인간에게 치명적인 병원체다. 사스뿐 아니라 독감, 에이즈, B형 간염, 일본뇌염과 같은 질병들이 바로 바이러스의 감염에 의해 발생한다.
바이러스는 인간뿐 아니라 식물, 곰팡이, 세균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최근 유행하는 돼지콜레라는 가축의 바이러스 감염증이고, 광견병은 동물과 사람 모두에서 나타나는 바이러스 감염증이다.
바이러스가 언제나 나쁜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는 구조가 간단하고 실험조작이 편리하며 세포에 침투해 자라는 성질을 갖고 있어 연구목적으로 중요한 생명체다. 현재 널리 연구되는 유전자치료(gene therapy)에서 바이러스는 유전자를 옮겨주는 벡터로 이용된다. 앞으로 주목받는 나노생명공학(nano biotechnology)에서도 바이러스는 주목받는 생명체다.
바이러스는 세균처럼 작은 미생물이고 전염병을 일으키지만, 세균과는 전혀 다른 생명체다. 예전에는 생명체가 아니라고 생각된 적이 있고,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자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바이러스가 생명체 밖에서는 아무런 생명활동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분명한 생명체로, 다른 생명체 안에서는 왕성한 생명활동을 보여준다.
바이러스의 특징은 우선 크기가 매우 작다는 점이다. 바이러스는 대체로 1백nm(나노미터, 1nm=${10}^{-9}$m) 정도의 크기를 갖는다. 기존에 가장 작다고 생각된 생명체인 세균이 보통 수μm(마이크로미터, 1㎛=${10}^{-6}$m) 정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얼마나 작은지 짐작할 수 있다. 나노세계를 지배하는 전투생명체인 셈이다. 세균은 광학현미경으로 볼 수 있지만, 바이러스는 전자현미경으로 봐야 그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작은 바이러스는 어떻게 생명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는 크기에 상관없이 세포라는 기본 구조를 바탕으로 생명현상을 유지한다. 세포에는 세포막, 세포질과 다양한 기능을 가진 작은 구조물들이 있어서 생명활동에 필요한 에너지와 단백질을 만들어 생명활동을 유지한다. 그런데 바이러스는 전혀 다르다.
바이러스는 단지 유전정보를 갖고 있는 핵산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단백질 껍질만 존재한다. 스스로 에너지도 만들지 못하고 세포대사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이러스는 살기 위해 다른 세포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바이러스는 단순히 게놈(genome, 유전체)만 갖고 있으며, 자신의 게놈을 많이 만들어 종족을 보존하려는 생명체다.
또한 바이러스는 세포로 구성된 생명체처럼 DNA와 RNA 핵산을 모두 갖고 있지 않고, 둘 중 하나만 갖고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 그래서 바이러스는 일반적으로 RNA 바이러스와 DNA 바이러스로 구분된다. 이번에 문제가 된 사스바이러스는 RNA 핵산만 갖고 있는 RNA 바이러스다.
대량생산으로 급속히 번식해
바이러스는 다른 생명체의 세포로부터 상당한 기능들을 빌려 사용한다. 그런데 아무 세포에서나 기능을 빌려쓸 수 있는 게 아니고 바이러스마다 숙주세포의 종류가 정해져 있다. 그래서 바이러스를 숙주세포에 따라 동물 바이러스, 식물 바이러스, 세균 바이러스로 나눈다.
바이러스가 숙주세포를 감염시키고 증식하는 과정은 종류에 따라 조금 차이는 나지만 근본적으로는 매우 유사하다. 숙주세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이러스의 단백질이 숙주세포 표면에 있는 특정한 수용체와 결합해야 한다. 이 상호작용이 특이적이어서 바이러스가 감염할 수 있는 숙주세포가 정해지는 것이다.
숙주세포에 결합한 바이러스는 숙주세포 안으로 이동하고, 자신의 핵산을 둘러싼 단백질 껍질을 제거해 증식할 준비를 한다. 이 과정을 껍질벗기(uncoating)라고 부르는데, 바이러스의 핵산이 숙주세포의 세포질에 완전히 노출된다. 바이러스는 이때부터 자신의 핵산을 대량 복제하고, 복제된 핵산을 이용해 핵산을 둘러쌀 껍질단백질을 대량으로 생산한다.
만들어진 핵산과 껍질 단백질들은 서로 결합해 한꺼번에 다량의 바이러스를 만든다. 이 과정을 조립(assembly)이라 부르는데, 마치 공장에서 부품을 조립해 물건을 대량 생산하는 것과 같다. 다른 어떤 생명체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매우 효율적인 증식방법이다.
숙주세포 안에 새로운 바이러스 입자가 많이 만들어진 후 바이러스는 숙주세포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밖으로 나온 바이러스는 근처의 숙주세포를 감염시켜 더 많은 바이러스를 생산한다. 바이러스가 숙주세포에서 자라는 동안 숙주세포는 기능적으로 많은 피해를 받는다. 바이러스는 인간의 모든 세포를 동일하게 감염시키지 않는다. 인체에서도 감염되는 숙주세포의 종류가 정해져 있다는 의미다. 사스바이러스는 호흡기 세포를 감염시키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결과 호흡기 질환을 일으킨다.
바이러스에 감염돼 질병이 발생하는 이유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가 그 기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에이즈의 경우는 HIV란 바이러스가 사람의 면역세포를 감염시켜 기능을 망가뜨려 면역결핍증을 발생시켜 나타난다. 독감 바이러스의 경우는 호흡기 세포를 감염시켜 호흡기의 기능이 약해지면서 독감에 걸리게 한다.
호흡이나 음식물 타고 이동
바이러스의 침투가 오히려 이에 대항하는 인체의 면역반응을 과도하게 만들어 나타나는 질병도 있다. B형 간염이나 일본뇌염이 대표적인 경우다. 또 바이러스는 감염된 숙주세포의 성질을 바꾸어(형질전환, transformation) 감염된 세포를 종양세포로 만들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 감염은 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감염된 사람에서 증식한 바이러스는 다른 사람으로 이동할 수 있다. 숙주의 호흡, 소화기 분비물, 혈액과 상처 등을 통해 바이러스는 몸밖으로 나올 수 있다. 몸밖으로 배출된 바이러스가 새로운 숙주를 만나면 전염이 된다.
바이러스가 전염되기 위해서는 완전한 바이러스 입자가 사람 몸으로 들어와야 한다. 우리 몸의 표면은 피부로 덮여 있는데, 피부는 미생물이 가장 먼저 접촉하는 부위다. 피부는 세포로 구성되긴 하지만, 보호막을 갖고 있어 바이러스 감염의 문이 아니라 장벽 역할을 한다. 그러나 피부에 상처와 같은 틈이 있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수혈환자나 마약사용자에게 HIV가 전염되는 경우나 미친개에 물려서 광견병에 걸리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또다른 경로는 음식물을 통해서다. 주로 배설물에 섞여 배출된 바이러스가 손을 통해 음식물로 이동하는데 이런 음식물을 먹으면 바이러스가 침투한다. 위산에 노출될 때 바이러스가 죽지 않아야 하고 장에서 숙주세포를 만나야 전염이 이뤄진다. 손을 깨끗이 씻고 음식물을 끓여먹는 것만으로도 이런 전염경로를 막는데 도움이 된다.
사스바이러스처럼 많은 바이러스들이 호흡기를 통해 전염된다. 바이러스가 감염된 사람의 호흡기 분비물을 다른 사람이 호흡으로 직접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바이러스가 공기나 먼지 중에 존재하다가 호흡을 통해 전염되는 경우도 있다. 마스크를 착용한다든지, 집에 돌아와서 양치질을 하면 호흡기에 들어오는 바이러스를 줄일 수 있다. 사스바이러스 역시 호흡기로 전염되므로, 마스크를 착용하면 전염을 막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외에도 바이러스는 성적 접촉이나 눈, 입안의 상처를 통해 감염이 될 수 있다.
항바이러스약물과 백신 개발이 관건
1945년 페니실린이 발견된 이래로 다양한 종류의 항생물질(antibiotics)이 개발돼 많은 종류의 세균 감염증이 손쉽게 치료되고 있다. 항생물질은 인간의 평균수명 연장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런데 항생물질은 세균의 증식을 억제해 세균 감염증에 치료효과가 있지만, 바이러스는 세균과는 전혀 다른 생명체이기 때문에 얘기가 달라진다. 기존의 항세균성 항생물질을 이용해서는 바이러스 감염증을 치료할 수 없다는 의미다.
현재 바이러스 감염증을 치료하는 역할을 하는 항바이러스약물(antiviral agent)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여러 바이러스 감염증을 치료하는 효과적인 항바이러스약물은 개발되지 않은 상태다. 다양한 종류의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한다는 인터페론(interferon)이라는 물질이 발견됐지만, 여전히 유효성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항바이러스약물을 만들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보다 바이러스의 크기가 작고 대부분의 기능을 숙주세포로부터 빌려쓰기 때문이다. 빈대 한마리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처럼 항바이러스약물은 자칫 숙주세포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
또한 바이러스는 유전자가 적기 때문에 만드는 단백질의 종류도 적다. 문제는 이런 단백질이 희귀하다는데 있다. 기존의 화학물질중에서 이처럼 특정 단백질을 억제하는 약물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더욱이 바이러스의 유전자에는 돌연변이가 쉽게 일어나기 때문에 항바이러스약물의 공격목표를 정하기도 쉽지 않다.
현재까지 등장한 항바이러스약물에는 입술물집을 만드는 포진바이러스(herpesvirus) 치료제가 있다. 연고나 내복약 형태로 약품이 개발돼 시판되고 있는데, 포진바이러스가 많은 유전자를 갖고 있어서 가능했다. 독감바이러스나 HIV의 경우는 바이러스가 가진 독특한 단백질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돼 항바이러스약물이 선보이고 있다.
생명공학기술이 크게 발달하면서 최근에는 새로운 바이러스가 등장해도 단백질의 종류와 구조를 빠른 시간 내에 알 수 있게 됐다. 이런 정보는 바이러스와 작용할 수 있는 약물을 디자인하고 합성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바이러스 질환 치료 약물의 개발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비록 일부의 바이러스에 대해 몇가지 약물이 개발됐지만, 인류는 대부분의 바이러스 감염증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약물을 갖고 있지 못하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사스바이러스와 같은 새로 나타나는 바이러스 감염증을 치료해주는 약물은 거의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고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감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접종하면 바이러스의 감염을 막을 수 있는 백신(vaccine)은 여럿 개발돼 있다. B형 간염, 독감, 일본뇌염, 홍역, 풍진, 볼거리, 소아마비, 천연두 등의 백신이다. 그러나 사스를 포함한 많은 바이러스 감염증에 대한 백신은 아직 개발돼 있지 않다.
바이러스 감염중에 대한 백신은 바이러스를 죽이거나 약화된 바이러스를 이용한다. 인체에서 일을 할 수 없는 바이러스를 몸에 넣어서 면역계에 대비책을 미리 세우도록 하는 것이다. 바이러스에 대한 생물 · 의학적인 연구들이 새로운 백신 개발에 큰 도움이 된다. 백신을 만드는 일 역시 어려운 일이지만 감염증의 치료법은 더욱 힘들다. 이번 사스바이러스처럼 새로운 바이러스가 등장하면 백신 개발에부터 힘을 쏟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