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일(현지시각), 제인 구달 연구소가 제인 구달 박사의 타계 소식을 전했다.
향년 91세. 위대한 영장류학자로 후배에게 귀감이 된 아웃사이더 과학자, 동시에 지구를 지키기 위해 말년까지 세계를 돌아다닌 환경 운동가. 하나의 단어로는 수식이 불가능한 제인 구달의 다채로운 삶을 돌아본다.
영장류 연구자 제인 구달
인간을 새롭게 정의하다
1960년 11월 4일, 탕가니카(현 탄자니아) 서부의 곰베 지역. 푸르고 깊은 열대우림 속에서 스물 여섯 살의 제인 구달은 아침부터 멀리 떨어진 야생 침팬지 한 마리를 쌍안경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회색 수염을 가진 것처럼 보여 구달이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David Greybeard)’라 이름붙인 침팬지였다.
데이비드는 45m 떨어진 풀밭에 솟은 흰개미 둔덕에서 등을 돌린 채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는 살짝 몸을 돌린 뒤, 아주 신중하게 두꺼운 풀줄기를 자신 쪽으로 당겨 약 45cm 길이의 한 조각을 꺾어냈다.” 뭘 하고 있었을까? 이틀 후, 구달은 다시 흰개미 둔덕에 모인 수컷 침팬지 두 마리를 발견했다. 침팬지들이 풀줄기를 흰개미집에 꽂았다 빼내자 줄기에 무수히 많은 흰개미들이 딸려 올라왔다. 침팬지들은 “입을 줄기 중간에 대고 줄기를 따라 입술로 곤충들을 떼어냈다.” 구달은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이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장면을 사상 최초로 목격하고 있었다(‘The Chimpanzees of Gombe: patterns of behavior’ 535쪽에서 발췌).
구달은 1960년 7월부터 곰베에서 침팬지 관찰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케냐 나이로비 자연사 박물관장이었던 루이스 리키의 밑에서 비서로 일하다, 그의 추천을 받아 곰베로 갔다. 전설적인 고인류학자였던 리키는 고인류가 어떻게 살았을지 알아보려면 가까운 친척인 영장류를 관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연구에 자원한 사람이 구달이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나기도 전에, 구달은 다른 동물학자들이 한번도 보지 못한 침팬지의 흥미로운 습성을 관찰하는 데 성공했다. 우선 침팬지는 이전에 생각했던 것과 달리 초식동물이 아니었다. 침팬지가 멧돼지나 다른 종의 원숭이를 사냥해 섭취하는 모습이 발견됐다. 그뿐만 아니라 복잡한 사회 구조와 유대 관계도 가지고 있었다.
구달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침팬지가 도구를 만들어 사용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내용은 1963년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 8월호에 실리며 세계인을 놀라게 만들었다. 당시엔 ‘도구의 사용’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다른 존재로 만드는, 인간을 정의하는 특징이었다. 그러나 구달의 발견으로 ‘도구의 사용’이라는 정의는 흔들렸다. 리키는 구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이제 우리는 도구를 재정의하던가, 인간을 재정의하던가, 아니면 침팬지를 인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침팬지를 향한 애정어린 시선, 그리고 그 시선이 예리하게 포착한 침팬지와 인간의 차이는 구달이 수행한 영장류 연구의 핵심이었다. 침팬지의 부정적인 측면을 들여다볼 때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1974년부터 곰베의 두 침팬지 집단 사이에 싸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후에 ‘4년 전쟁’으로 불리게 될 이 갈등에서 침팬지들은 서로를 폭력적으로 죽이고 상처입혔다. 침팬지가 공동체의 아기를 훔쳐 먹는 식인 행위가 처음 관찰된 것도 이 시기였다. “침팬지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인간을 닮았다”는 구달의 말이 다시 한 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구달의 발견은 하루 아침에 인간의 존재와 가치를 새롭게 정립해주는 대사건이었어요. 지구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로 자부했던 인간을 겸허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나 진화론을 발표한 다윈과 동일선상에 있다 볼 수 있죠.”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10월 2일 과학동아와의 인터뷰)
아웃사이더 제인 구달
동물행동학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제인 구달의 업적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위대했고 독특했다. 이는 구달이 과학자 사회에서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 때문이었다. 먼저 구달은 영장류를 연구하기 위한 정규 동물학 학위를 받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리키의 비서로 일하다 곰베에서 침팬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이후 구달은 리키의 후원을 받아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동물행동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정규 동물학 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구달이 동물을 연구하는 방법도 기존의 연구자들과 전혀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은 동물을 각각의 개체로 대했다는 점이다. 영장류의 인지행동을 연구하는 이세인 스위스 취리히대 심리학과 연구원은 과학동아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구달이 연구를 시작하던 당시 주류 학계에서) 동물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고, 동물을 물건 대하듯 대했다”고 설명했다. 감정적으로 동물과 가까워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며, 심지어는 논문에서 ‘그’나 ‘그녀’ 대신 ‘그것’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
구달은 정반대 방식으로 침팬지에게 다가갔다. ‘그레이비어드’나 ‘골리앗’처럼 한 마리 한 마리의 침팬지에게 이름을 붙이고, 매일 그들을 따라다니며 행동을 관찰했다. 당대에는 파격적이었던 연구 방법으로 구달은 학계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지만, 비판자 그 누구도 구달과 같은 업적을 일구지 못했다. 이 연구원은 “구달의 행동 관찰 연구 방법은 기존 동물학의 관습을 새롭게 탈바꿈시켰고, 현재까지도 영장류 연구에서는 연구 대상에게 고유 이름을 붙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달의 업적은 아웃사이더의 접근법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침팬지에게 이름을 붙인 작은 시작은 동물을 개별적 존재로 존중하는 새로운 시각의 출발점이었다. 그 시각은 곧 도구 사용과 사회적 행동의 발견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다시 쓰게 했다.”
(장이권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동아사이언스 기고문 발췌)
여성과학자 제인 구달
수많은 여성들의 롤모델이 되다
아웃사이더 제인 구달이 과학계에 미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과학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1989년 저서 ‘영장류의 시각(Primate Visions)’에서 제인 구달을 남성 중심적 과학 서사에 대한 전복적 행위자로 규정했다. 침팬지 한 마리 한 마리에게 이름을 붙이고 감정적으로 다가가는 것, 그들의 행동을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 객관적이고 분석적으로 작동하던 남성 중심적 과학에 균열을 냈다는 것이다.
구달이 만들어낸 연구의 새로운 경향은 더 큰 흐름으로 이어졌다. 구달이 연구할 수 있도록 주선한 리키는 침팬지를 연구한 구달 말고도 두 명의 여성 영장류학자를 후원했다. 고릴라 연구자 다이앤 포시, 오랑우탄 연구자 비루테 갈디카스였다. 포시와 갈디카스 또한 구달의 연구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각각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열대우림에서 야생 영장류들과 함께 지내며 오랫동안 그들의 습성을 관찰하고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
구달을 포함한 이 세 명은 ‘트라이메이츠(The Trimates)’라 불리며 20세기 후반 영장류학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연구 업적은 물론, 여성과학자 롤모델로서도 대단한 성과였다. 구달은 여성 후배들에게 영장류학의 문을 넓게 열어줬다. 국제영장류학회 회원 중 여성 비율은 1990년대 초 38%에서 2008년 57%까지 상승했다. doi: 10.1371/journal.pone.0030458 세 여성 선배 과학자의 영향으로 영장류학이 과학계에서 보기 드문 여성 비율이 높은 분야가 된 것이다. 대중매체를 통해 비친 구달의 이미지는 영장류학을 넘어 과학계 전체에 퍼졌다. 구달 이후, 과학자의 꿈을 꾸는 여자아이들은 미래의 제인 구달이 되길 상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지금보다 더 입지가 약했을 과거에 제인 구달 박사님이 여성 과학자로서, 영장류 연구자로서 그 길을 어떻게 텄을지 상상이 어렵습니다. 당시 남성 연구자들이 주를 이뤘던 학회와 학교 위원회 사람들의 비판을 이겨내고 올곧게 영장류 연구자의 길을 걸으셨다는 점이 저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세인 스위스 취리히대 심리학과 연구원, 10월 7일 과학동아와의 인터뷰)
환경운동가 제인 구달
지구를 지키기 위한 희망
침팬지와 인간이 비슷하다는 통찰은, 곧 침팬지를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자랐다. 그리고 침팬지로부터 시작된 구달의 보전 활동은 곧 전 인류와 지구를 대상으로 확대됐다. 구달의 인생 2막, 환경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이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구달은 여러 인터뷰와 글에서 “1986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제1회 ‘침팬지 이해하기’ 컨퍼런스가 자신의 관점을 연구에서 보전으로 바꿔놨다”고 말했다. 그런데 구달은 1970년대부터 이미 침팬지 보호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곰베의 숲은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 활동에 의해 급속하게 파괴됐고, 그에 따라 침팬지의 서식지가 줄어들었다. 여기에 더해 침팬지는 식용으로, 애완용으로, 실험용으로 무차별하게 사냥당하고 있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구달은 1977년 ‘제인 구달 연구소’를 설립했다. 제인 구달 연구소는 침팬지를 비롯한 야생 영장류 서식지를 보호하고 연구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서식지를 보호하려면 주변 원주민들의 협력이 필수적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빈곤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청소년 활동도 중요했다. 1991년 12명의 청소년으로 시작한 ‘뿌리와 새싹’ 풀뿌리 환경운동 모임은 현재 120여 개국에 걸쳐 수십만 명의 청소년이 참여하는 프로젝트로 성장했다.
생애 후반기, 제인 구달의 무대는 전 세계였다. 환경운동가로 변신한 후, 구달은 연 300일 이상을 여행하며 자연 보전과 생태계 보존에 관한 가치를 설파했다. 한국도 그 무대 중 하나였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는 10월 2일 진행한 전화 인터뷰에서 “1996년도 한국에 처음 오셨을 때 제인 구달 박사님을 만나뵀다”며, “당시 과학동아의 요청으로 구달 박사의 인터뷰를 진행했다”고 술회했다. 그후로 구달은 자주 한국을 찾아 환경보호의 중요성을 설파했음은 물론, 생명다양성재단 설립에 참여하면서 한국의 환경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구달 박사는 재단의 명예이사로 명시돼 있다. “그분의 강연을 들을 때마다 천여 명 되는 관객들이 감동을 받는 모습을 봤어요. 항상 대체불가능한 분, 특별한 분이라고 생각했죠.”
“우리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위해 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조금씩, 매일, 함께 노력한다면, 지구의 미래에는 희망이 있을 겁니다.” 구달이 1996년 과학동아에 실린 인터뷰에 남긴 말이다. 구달은 이 사명을 위해 진정으로 남은 평생을 바쳤다. 2025년 3월, 사후 공개를 전제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구달은 지구에 남은 이들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다음 페이지에서 그 일부를 전한다.
“오늘날 지구가 암흑에 빠져 있을 때에도 여전히 희망은 있습니다.
희망을 잃지 마세요. 희망을 잃으면 무관심해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됩니다.
…변화를 만들 수 있는 힘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당신의 미래는 열려 있습니다. 제가 내려다보고 있을 테니,
이 아름다운 지구에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세요.”
(제인 구달, 사후 공개 인터뷰인 ‘Famous Last Words’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