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전인 1975년 필자는 독일(당시 서독)대사관에서 고등학생 3명을 선발하는 시험에 합격해 7월 20일부터 8월 19일까지 독일을 방문할 수 있었다. 당시 고3이었던 필자가 거의 두달간 학교공부를 하지 못하며 그 여행에 참가하는 것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행을 떠났지만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된 것은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그 시절 해외로 여행을 하려면 외무부에 가서 여권을 받고 국방부에서 특별허가를 맡고 중앙정보부에 가서 교육을 받은 뒤에야 겨우 출국할 수 있었다.
우리 여행단은 당시 수도였던 본, 동서로 갈라져 있던 베를린을 비롯해 여러 곳을 방문했다. 하지만 필자 기억에 가장 강하게 남은 곳은 본 근교 에펠스베르크라는 조그만 마을이었다. 왜냐하면 그 마을에는 안테나 지름이 100m, 면적이 축구장 4개에 맞먹는 거대한 전파망원경이 있기 때문이었다. 마을 어귀에만 가도 커다란 전파망원경이 야외음악당처럼 보인다.
30년이 지난 뒤인 2006년 10월 26일 필자는 에펠스베르크 100m짜리 전파망원경을 다시 바라볼 수 있었다. 다음날인 27일 한국천문연구원이 본에 있는 막스플랑크 전파천문연구소와 양해각서 조인식을 갖는 덕분이었다. 30여년만에 다시 만난 망원경 앞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필자는 속으로 ‘그동안 잘 있었니? 내가 천문학자가 돼 돌아왔다’고 외쳤다.
무게만 3000톤짜리가 움직이면?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의 지름 300m 아레시보 전파망원경에 이어 세계 두번째 크기를 자랑하는 이 망원경은 당시나 지금이나 독일 과학기술의 상징적 존재다. 전망대에서 보던 그 망원경의 모습이란 천문학에 이미 뜻을 두고 있던 어린 필자의 눈에는 ‘미래로 통하는 문’처럼 보였다. 필자가 독일어로 “난 천문학자가 되고 싶어요”(Ich hoffe ein Astronom zu werden)라고 말하자 천문대 안내자가 대단히 반가워했던 일이 기억난다.
일국의 천문대장 자격으로 방문하게 된 필자는 31년 전과 달리 막스플랑크연구소 홍보책임자 노버트 융케스 박사의 안내로 망원경의 내부까지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었다. 먼저 본부건물 안에 있는 망원경 제어실을 둘러본 뒤 밖으로 나갔다. 지하통로를 통해 나가자 거대한 망원경이 우리를 맞이했다. 망원경을 지지하고 있는 커다란 바퀴부터 인상적이었다. 엘리베이터로 지상 50m 지점에 있는 망원경 중앙부분에 올라갔다. 얼마나 높던지 현기증이 났다. 미로처럼 연결된 통로를 통해 망원경 구석구석을 둘러볼 수 있었다. 부엉이 한 마리가 망원경에 집을 짓고 살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아마 전생에 천문학자였는데, 끝내지 못한 연구가 있나 보다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망원경의 무게가 무려 3000톤이 나간다고 하는 말을 들으니 건설할 때 무척 고생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 무게면 망원경이 움직일 때마다 중력에 따라 변형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원경이 변형되더라도 초점이 항상 같은 위치에 놓이게 만들었다고 융케스 박사는 설명했다. 이는 건축학적으로 ‘호몰로지 기법’이라고 한다.
에펠스베르크 전파망원경은 1968년부터 3년에 걸쳐 건설됐으며 1972년부터 우주 관측을 시작했다. 그동안 천문학자들은 이 망원경으로 우리은하 중심부에서 엄청나게 큰 거품 구조를 발견했고 외부은하에서 은하 구조가 진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기장의 존재를 알아냈다.
망원경의 커다란 접시안테나 표면을 살펴보니 많이 낡아 보였다.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융케스 박사가 최근 무거운 접시안테나를 교체하는 대신 표면의 굴곡을 보완할 수 있는 기술(적응광학)을 도입했다고 자랑했다. 기술을 도입하기 전보다 표면 효율이 30~40% 좋아질 것이라고 한다.
망원경 크기는 국력의 척도
10월 27일 필자는 ‘초장거리 간섭계’(VLBI) 수신기 핵심기술을 개발하고 VLBI 분야를 공동 연구하기 위한 양해각서 조인식을 하기 위해 막스플랑크 전파천문연구소를 방문했다. 우리 일행은 장비들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주에 관심이 많은 주독 대사관 김영훈 총영사는 감탄한 나머지 “참, 사람이 모르면 용감하지요”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자신 같은 일반인이 쉽게 우주를 말하는데, 실제 우주의 신비를 알아내려고 사투하는 천문학자들의 노력을 어깨 너머로 보니 앞으로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겠다는 뜻인 듯했다. 김 총영사는 송기동 과학관과 함께 이번 조인식을 막후에서 도와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필자에게 우리 외교관들이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고 또한 고생을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줬다.
전파망원경의 크기는 곧 국력의 척도다. 현재 우리는 대덕전파천문대에 지름 14m 전파망원경 한대를 가지고 있지만, 일본은 노베야마라는 곳에 지름 45m 전파망원경을 가지고 있다. 다행히 지름 21m 전파망원경 3대를 연세대, 울산대, 탐라대에 동시에 세우고 있는 한국우주전파관측망(KVN)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 중인데, 이 망원경들의 운용센터가 설립되면 동북아 전파천문연구의 허브가 된다.
예정대로 막스플랑크 전파천문연구소 안톤 첸수스 소장과 양해각서의 조인식을 마친 필자는 귀국길에 올랐다. 30여년 전 고등학생 때 방문했던 독일과 천문학을 공동 연구하기 위해 힘을 합치다니, 이제 우리나라도 독일의 훌륭한 파트너가 된 것이다. 앞으로 30년 뒤엔 독일과 어떤 인연이 이어질지 궁금하다. 우주의 놀라운 비밀 하나를 벗기지 않을까.
![2007년 지름 21m짜리 전파망원경이 들어설 연세대(01), 울산대(02), 탐라대(03)의 조감도. 3대의 망원경이 동시에 운용돼 한국우주전파관측망(KVN)이 완성될 예정이다.](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article/Contents/200701/S200701N029_IMG_04.jpg)
망원경이 커지면 그만큼 분해능(가까이 붙어 있는 두 천체를 구별해낼 수 있는 능력)이 좋아진다. 망원경 하나를 크 만드는데는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다. 현재 단일구경으로 가장 큰 망원경인 아레시보 망원경의 지름이 300m에 불과한 이유다. 하지만 여러 대의 망원경을 동시에 운용하면 하나의 대형망원경을 사용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100km 떨어져 있는 2대의 전파망원경으로 하나의 천체를 동시에 관측하면 지름 100km짜리 초대형 전파망원경의 성능을얻을 수 있다.
한국우주전파관측망(KVN)은 한국형‘초장거리 간섭계’(VLBI) 네트워크란 뜻이다. 연세대, 울산대, 탐라대에 지름 21m짜리 전파망원경을 1대씩 설치한 뒤 3대를 동시에 운용할 계획이다. KVN이 완성되면 대한민국 크기의 전파망원경이 생기는 셈이다. 한국천문연구원 손봉원 박사는“2007년 3곳의 전파망원경이 건설돼 시험 관측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2010년 이후 한국은 일본, 중국과 함께 3개국의 전파망원경을 동시에 운영할 계획이다. 손 박사는“KVN뿐 아니라 일본의 VERA, JVN, 중국의 CVN이 이 계획에 참여하는데, 최대 16대 전파망원경에서 오는 신호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동북아 센터가 국내에 설치될 것”이라고 말했다. 동북아시아만 한 망원경을 한국에서 운용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