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소설은 없다.”
1977년 비운의 교통사고로 42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 이휘소박사. 물리학에 대한 일반인의 무관심에 비춰볼 때 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놀라울 정도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이 박사가 대중에 알려진 것은 몇몇 소설을 통해서다. 대중이 알고 있는 이미지도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우리나라 핵무기 개발에 앞장선 용감한 과학자이자 애국자다. 또 미국 정보기관이 그의 죽음에 관련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 박사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인 저자는 “사실이 아니다”며 “이 박사의 학문적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휘소 박사는 생전에 이룬 업적만으로도 세계적인 명예를 얻었다. 그런데 소설의 왜곡된 이미지로 명예가 덧칠해져선 안 된다. 학자는 학문적 업적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그가 평전을 쓴 이유다. 유신정권에 반대했던 고인의 신념과 달리 핵무기 개발에 앞장선 물리학자 이휘소로 알려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5년 법원은 이 박사의 유족이 명예훼손을 이유로 낸 가처분소송에서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소설 이휘소’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사회 통념상 이휘소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유가족이 생각한 ‘명예’와 법원이 생각한 ‘명예’가 달랐던 셈이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지난 4월 이휘소 박사를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했다. 이 박사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박사가 연구했던 주제나 내용을 아는 일반인은 드물다. 소설 속에도 이 박사가 핵무기 설계에 관여했다는 언급만 있을 뿐이다.
저자는 “스승의 전공은 고에너지 소립자물리학”이라며 “핵무기 개발은 공학적인 문제이지 과학적인 문제가 아니다”고 일갈한다. 핵무기 설계도는 1970년대 미국 학부생의 졸업논문에 실릴 정도로 공개된 정보라고 설명했다. 만약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다면 핵무기의 원료인 ‘농축 우라늄’ 확보가 관건인데 이는 이 박사의 전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한편 저자가 뽑은 이 박사의 업적은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와 ‘참’(charm)입자의 탐색 두 가지다. 이들 연구 분야는 이 박사의 연구업적에 힘입어 각각 1976년과 1999년 노벨 물리상을 받았다.
저자는 ‘소설 같은 이휘소’가 아닌 ‘인간 이휘소’를 알리기 위해 이 박사의 가족과 친구, 동료와 인터뷰하고 자료를 얻어 평전을 썼다. 그들의 기억 속엔 ‘팬티가 썩은 사람’이란 별명이 말해주듯 한번 자리에 앉으면 엉덩이를 떼지 않고 학문에 매진하던 아름다운 물리학자 이휘소가 있을 뿐이다. 끝으로 저자는 이 책을 계기로 제2, 제3의 이휘소 박사가 나오길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