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가르며 번쩍이는 번개. 해마다 열리는 기상 사진전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골손님이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칠지 모르는 번개를 기다렸다가 카메라에 담는 일은 쉽지 않다. 번개가 친다는 사실을 깨닫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 이미 번개는 온데간데없고 ‘우르릉’ 천둥소리만 요란하다.
번개를 사진에 담으려면 광각렌즈(시야가 넓은 렌즈)를 하늘로 향하고 조리개를 열어둔 채 번개가 ‘걸려들기’를 기다려야 한다. 렌즈 시야가 넓을수록 번개가 걸려들 확률은 높다. 하지만 그만큼 번개가 전체 화면에서 작게 찍히기 때문에 번개를 자세히 담기는 어렵다.
“만약 번개가 치는 순간 재빨리 번개 치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자동으로 돌리는 카메라가 있다면 번개를 마냥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겁니다. 물론 이때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돌리면 번개의 특정 부분만 크게 확대해서 찍을 수도 있겠죠.”
MEMS(Micro Electro Mechanical Systems, 마이크로 전자기계시스템, 멤스) 우주망원경 연구단을 이끄는 이화여대 물리학과 박일흥 교수의 설명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할까.
메가번개를 재빨리 추적하는 비결
박 교수는 ‘극소형 멤스 우주망원경’(MEMS Telescope for Extreme Lightning, 이하 MTEL)으로 번개를 추적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번개도 보통 번개가 아니다. 보통 번개보다 더 크고 강력한 ‘메가번개’다.
메가번개는 고층 대기에서 발생해 위쪽이나 아래쪽으로 뻗는 초대형 방전 현상이다. 오래전부터 비행사들이 자주 목격했지만 구름 위에서 발생하는 번개는 ‘이상한’ 현상으로만 취급받다가 과학계에서 연구 대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메가번개가 왜 발생하며 어떻게 빛을 발산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동안 과학자들은 구름 위에서 발생해 1000분의 1초~1초 만에 사라지는 메가번개를 찍기 위해 높은 산에 올라가 촬영했다. 하지만 메가번개는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공 10km 이상에서 치기 때문에 아무리 높은 곳에서 찍는다 하더라도 아래에서 위로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정확한 자료를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연구단이 개발한 MTEL은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며 메가번개를 추적한다. MTEL이 메가번개를 잡아내는 비결은 망원경에서 넓은 영역을 감시하는 부분과 메가번개가 발생했을 때 확대해서 찍는 부분을 분리한 데 있다. 즉 일정한 영역을 감시하고 있다가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가 나타나면, 망원경 전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망원경 안에 있는 반사경이 순식간에 각도를 바꿔 메가번개가 발생한 곳을 포착한다.
MTEL에는 초점거리가 다른 반사경이 2개 있다. 초점거리가 짧은 반사경(현상 포착 반사경)은 시야가 넓어 광범위한 영역에서 순식간에 일어나는 현상을 포착해 추적할 수 있다. 한 번에 감시하는 영역은 가로, 세로 160km에 이른다. 경기도만 한 영역을 한눈에 살피고 있는 셈이다.
이 영역에서 메가번개 같은 섬광현상이 일어나면 초점거리가 짧은 반사경으로 빛이 나온 곳의 위치(좌표)를 파악할 수 있다. 그 다음 초점거리가 긴 반사경(확대 추적 반사경)을 번개가 친 곳을 향해 재빨리 움직여 촬영한다. 이때 16배율로 확대해 가로, 세로 40km 영역을 찍을 수 있다.
메가번개 잡으러 우주로 떠나는 MTEL
박 교수는 “MTEL로 메가번개를 포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0.0005초”라며 “이렇게 빨리 목표물을 추적할 수 있는 비밀은 깨알보다 더 작은 마이크로 거울에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단은 MEMS 기술을 이용해 가로, 세로가 0.3mm인 마이크로 거울 256개로 현상 포착 반사경(실리콘 칩)을 제작했다. 실리콘 칩에 메가번개의 위치 정보가 들어오면 실리콘 칩에 장착된 마이크로 거울들이 제각각 재빨리 움직여 메가번개가 있는 쪽으로 향한다.
반사경으로 포착한 빛은 64픽셀의 광센서에 찍힌다. 이 광센서는 초고감도이며 초고속으로 빛 입자 하나를 전자 100만 개의 신호로 바꿀 수 있다.
연구단은 2006년부터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지난해 이미 마이크로 거울 256개가 들어간 MTEL과 MTEL 시험판인 KAMTEL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연구단은 마이크로 거울과 추적 망원경의 원리에 대해 국내외에 특허 28개를 출원했다.
이 과정에서 2007년 여름, 한국 최초 우주인의 우주실험임무 공모에 지원해 선정됐다. 실험기간은 이소연 박사가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머무는 단 일주일뿐이었지만, 약 400km 고도에서 지구 궤도를 돌고 있는 ISS에서 MTEL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지난해 4월 이소연 박사는 MTEL의 시험판인 KAMTEL을 ISS의 러시아 모듈인 즈베즈다의 큰 창에 부착했다. 이 박사가 ISS에서 머무는 동안 KAMTEL은 1초에 20만~30만 장씩 촬영했다. 박 교수는 “촬영 데이터가 저장된 2GB 메모리 카드 6개를 분석한 결과 고층대기 방전현상으로 추정되는 빛기둥을 여러 개 찾았고 방전현상이 전개되는 양상을 ms(밀리초, 1ms=10-3초) 단위로 분석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소연 박사의 도움으로 여러 경험을 축적한 연구단은 지난해 9월 본격적인 인공위성 실험을 하기 위한 MTEL 탑재체를 완성했다. MTEL은 올해 4월 러시아 과학위성인 ‘타티아나 2호’에 탑재돼 소유스-2 로켓에 실려 우주에 올라갈 예정이다. 적어도 1년 이상 고도 800km상공에서 지구 궤도를 돌며 메가번개를 촬영할 계획이다. MTEL이 우주에 올라가 메가번개를 촬영하는 사실은 세계 최고 광기술잡지인 ‘레이저 포커스 월드’ 2월호에 실렸을 정도로 과학계에서는 신선한 시도다.
박 교수는 MTEL에 대해 기대가 크다. 그는 “KAMTEL은 관측 시간이 너무 짧아 사실 충분한 데이터를 기대할 수 없었다”며 “MTEL은 1년 이상 메가번개를 관측할 예정이기 때문에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2년, 감마선 폭발 직후 70초 비밀 캔다
MTEL이 메가번개를 찍는 데 성공한다면 더 큰 규모로 빛을 방출하는 현상도 촬영할 수 있지 않을까. 연구단은 구경 3mm MTEL보다 더욱 큰 구경 20cm 멤스 추적 우주망원경 ‘UFFO’(Ultra Fast Flash Observatory, 초고속 섬광 관측소)을 만들 예정이다. UFFO는 2012년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UFFO를 위해 개발한 소형 인공위성에 장착해 발사할 계획이다.
UFFO는 빅뱅 이후 최대에너지 폭발 현상으로 알려진 ‘감마선폭발’을 관찰할 계획이다. 감마선폭발은 태양이 100억 년 동안 방출하는 양만큼의 에너지를 단 몇 초 만에 내뿜는 현상으로, 과학자들은 커다란 별이 붕괴해 블랙홀이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최근 5년 동안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관련 논문이 90편 이상 실릴 정도로 천문학계의 큰 이슈지만 관측 자료가 부족해 아직 그 정확한 발생원인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NASA는 이미 2004년에 감마선폭발을 관측하기 위해 인공위성 ‘스위프트’를 발사했다. 폭발위치를 X선 검출기로 먼저 감지하면, 스위프트는 인공위성 전체를 돌려 상세 관측을 시작한다. 스위프트가 감마선 폭발이 발생한 직후 폭발 지점으로 망원경 방향을 돌릴 때 걸리는 시간은 70초 정도다. 지금까지 스위프트의 촬영 정보로 감마선폭발에 대해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졌지만, 폭발 직후 70초까지 초기 단계에 대한 정보는 아직 없다는 뜻이다.
박 교수는 “번개가 칠 때 스위프트가 ‘고개’를 돌리는 수준이라면 UFFO는 ‘눈알’을 움직이는 격”이라며 “UFFO를 이용해 감마선폭발 초기순간의 비밀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MEMS 망원경 기술은 감마선폭발 같은 우주 현상의 발생원인과 과정을 밝혀낼 뿐만 아니라 초고속 감시카메라 같은 제품에 응용돼 실생활에서도 쓰일 것으로 기대된다. MEMS 망원경 기술의 응용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메가번개처럼 우주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을 어떻게 촬영할까.
어디선가 순식간에 일어나는 현상을 포착하려면 넓은 영역을 감시하다가 현상이 발생하는 곳을 재빨리 포착해 확대할 수 있어야 한다. 갑자기 ‘뻥’ 터지는 큰 소리가 들렸을 때 무의식적으로 빠르게 눈을 돌리는 일과 같다.
INTERVIEW - 우연히 접한 마이크로 거울로 섬광 잡는 망원경 만들어
박일흥 교수가 MEMS 망원경을 개발한 계기는 우연히 접한 마이크로 거울을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까 하는 그만의 창의적인 고민 덕분이었다. 박 교수는 5~6년 전 한 기업에서 반도체 광센서에 대한 협력 연구를 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 기업에서 반도체 광센서 외에 만들고 있던 것이 바로 광스위치 소자인 마이크로 거울. 그는 마이크로 거울을 처음 봤을 때 수많은 거울 조각으로 태양 빛을 반사시켜 적군의 배를 불태웠던 아르키메데스를 떠올렸다. 박 교수는 마이크로 거울을 응용하면 좋은 발명품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마이크로 거울이 각도를 움직여 초점거리를 바꾸는 작업을 지켜보고 인공 눈을 떠올렸습니다.”
박 교수가 처음부터 마이크로 거울로 망원경을 만들자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각도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마이크로 거울을 보고 ‘인공 눈’을 상상했다. 사람의 눈처럼 시야를 돌려 움직이는 물체를 따라다니는데다가 확대까지 가능한 인공 눈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뒤 러시아와 우주선을 관측하기 위한 우주 실험을 계획하던 중, 마이크로 거울을 응용해 새로운 우주망원경을 개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2003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 우주선 회의’(International Cosmic Ray Conference)에서 이 아이디어를 처음 발표했고 많은 관심을 끌었다. 특히 UFFO는 최근 우주배경복사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조지 스무트 교수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박 교수팀은 2006년 창의연구단으로 선정된 뒤 멤스 망원경 개발에 힘썼다. 그는 “현재 멤스 망원경으로 빛을 순간적으로 방출하는 우주 현상을 관측하는 데 몰두하고 있지만, 앞으로 많은 침입자를 동시 추적하는 감시 카메라나 날아오는 미사일을 초고속으로 추적해 격추하는 국방 무기를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박일흥교수
1985
고려대 물리학과 석사
1989
미국 뉴저지주립대 물리학 박사
2002년~현재
이화여대 물리학과 부교수
2006년~현재 교육과학기술부 창의연구단 MEMS 우주망원경 연구단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