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화가 치밀어 못살겠다’ ‘열불 난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여기서 울화란 억울한 감정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고 억지로 참는 가운데 생기는 화를 뜻한다. 울화가 오래되면 ‘화병’(火病)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민간에는 오래 전부터 화병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화병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화병은 ‘심화병’ ‘울화증’ 등으로 불리며, 해결할 수 없는 정신적인 갈등이 깊어지면서 정신적인 고통 외에 몸에 불편함이 나타나는 현상을 가리키는 친숙한 병명이다.
열나고 숨차고 가슴 답답하고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불은 음양(陰陽)의 관점에서 ‘양’이다. 불은 쉴 새 없이 주위를 태우는 더운 성질을 갖고 있다. 반면 물은 ‘음’이다. 물은 불에 비해 정지해있고 차가운 속성을 갖는다.
한의학에서 정상적인 ‘화’(火)는 인체의 기능을 유지하는 원동력이라고 본다. 화와 수(水)가 서로 협조하고 견제하면서 음양의 평형상태를 이룰 때 인체가 건강하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몸에 병이 있을 때도 화가 발생한다. 이때는 정상적인 화가 아니다. 열이 나고 목이 마르며 숨이 차고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답답한 한편, 불안하고 초조하며 잠을 못 이루고 짜증이 난다. 목에 무엇인가 걸린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화병을 앓는 사람은 대개 이런 증상을 호소한다.
화병의 이런 증상은 한의학의 화와 일맥상통한다. 화는 양의 성질이 있어 위로 올라가려는 속성이 있고, 심장과 연관돼 온몸의 진액을 손상시킨다. 현대의학에서는 스트레스가 한의학의 화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화병은 40대 이후 여성에게 많이 나타난다. 주로 남편과의 갈등이나 시댁과의 불화, 금전적인 문제, 생활고 등이 원인이다. 화병을 앓는 사람들 중에는 수년 또는 수십년 동안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고통을 참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증상이 만성이 된 경우가 많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화의 증상은 모든 민족에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화병은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기승을 부린다. 병의 원인과 경과를 살펴보면 화병에는 우리민족 고유의 특성이 담겨 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고통을 인내하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한국인은 ‘한’(恨)이라는 독특한 정서를 갖게 됐다. 화병은 한국인의 이런 정서와 함께 이해해야 한다.
미국 정신의학회는 1996년 한국의 화병을 분노증후군으로 설명하면서 ‘분노를 과도하게 억제함으로써 발생하며 우울증, 소화불량, 식욕부진, 심계항진(心悸亢進, 심장의 박동이 빠르고 세지는 현상), 통증, 피로 등을 느끼고 상복부에 덩어리가 뭉쳐지는 듯한 증상이 나타난다’고 소개했다.
몸과 마음은 하나
한의학에서 말하는 울병은 현대의학의 우울증과 비슷한 개념이다. 울병이 생기면 우울하고 기쁘지 않은 상태가 지속된다. 주로 정신적인 증상이 나타나지만 사람에 따라 신체 증상도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한의학에서는 이들을 나눠 진단하고 치료한다.
울(鬱)이란 기가 한곳에 맺혀 머물러 있으면서 흩어지지 못하는 현상이다. 칠정(七情), 즉 정신적인 문제가 원인이 돼 인체 내에 기가 원활히 운행하지 않으면 울이 발생한다. 쉽게 말해 울은 정신적인 충격이나 고뇌로 얼굴빛이 벌겋게 되고 목이 마르고 잠을 못 이루는 증상을 나타내는데, 이는 기가 제대로 흐르지 못해 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인체에서 기가 정상적으로 흐르지 못하면 신진대사 기능이 떨어진다. 이로 인해 담이나 어혈 같은 병의 원인이 되는 물질이 만들어진다. 담이 생기면 가슴이 답답하고 목에 무언가 걸린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어혈이 생기면 옆구리에 찌르는 듯 통증을 느끼고, 혀에 청자색의 핏줄이 나타난다.
울병이 오래되면 혈이 적어진다. 따라서 혈의 주요 기관인 심장에 영양을 공급하지 못한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오랫동안 병을 방치하면 몸이 쇠약해지고 가슴이 뛰며 심하면 망상이 생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간 기능도 나빠지고 소화기에 이상이 생겨 설사나 식욕부진이 나타나기도 한다. 또 성기능에 영향을 미쳐 발기부전이 되거나 무릎이 시리고 아픈 경우도 있다.
한의학에서 울병을 치료하는 원칙은 인체 내에 정체된 기를 잘 돌게 하는 것이다. 정신적인 이유로 기가 정체되는 부위는 주로 간이다. 따라서 간의 기를 풀어주는 치료법을 많이 쓴다. 이때는 시호, 항부자, 진피 같은 약물을 처방한다.
특히 같은 울증이라 하더라도 신체 증상에 따라 처방을 다르게 내린다. 예를 들어 화가 있는 경우에는 몸을 차게 만드는 약재를 쓰고, 담이 있을 때는 담을 없애는 화담약을 처방한다. 또 허증(虛症)이 있는 경우에는 몸을 보(補)하는 약재를 넣는다.
이런 치료법은 정신과 신체를 하나로 생각하는 한의학의 특징이다. 신체적인 원인으로 정신질환이 생길 수 있고, 거꾸로 정신적인 충격으로 신체질환이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한의학에서는 정신질환을 치료할 때 정신증상과 신체증상을 함께 관찰하고 치료한다.
목에 매실이 걸렸나
그렇다면 한방치료가 화병이나 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치료하는데 효과적일까. 한방치료가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한약이 정신질환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1997년 일본 게이오대 의학부 신경정신과학교실 야마다 카주오 교수팀에 따르면 할로페리돌(haloperidol)이라는 약물을 투여해 증상이 호전된 정신분열증 환자 10명에게 황련해독탕(黃連解毒湯)을 4주 동안 투여한 결과 죄책감이나 우울증, 피해망상, 흥분 같은 증상이 많이 사라졌다. 황련해독탕에 의한 부작용도 없었다고 한다.
황련해독탕은 황련, 황금, 황백, 치자로 이뤄진 처방인데, 이들은 모두 약리학적으로 중추신경을 억제하는 작용을 한다. 흥분과 피해망상증이 개선된 이유는 중추신경 억제작용에 따른 것이며, 우울증이 사라진 이유는 황련과 치자가 가슴이 답답한 증상을 개선하는 효과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화병의 증상 가운데 ‘매핵기’(梅核氣)가 있다. 매핵기는 무엇인가 목구멍에 걸려있는 것 같은데 뱉어도 나오지 않고 삼키려고 해도 넘어가지 않아 마치 목에 매실이 걸려있는 듯한 증상을 말한다.
1998년 일본 가나자와대학병원 내과의인 모토 요시하루와 타가 히로미의 연구에 따르면 목의 이물감 때문에 소화기내과를 찾은 환자 가운데 내시경검사 결과 이상이 없는 환자 22명을 대상으로 향소산(香蘇散, 향부자, 소엽 등을 넣어 달인 탕약)을 6개월 동안 투여한 결과 17명이 목의 이물감이 없어졌고 3명은 호전됐다.
매핵기 증상이 없어진 17명 중에서 증상이 없어질 때까지 걸린 기간은 7~28일로 평균 13.5일이었다고 한다.
생활약탕기
치자나무의 열매를 치자(梔子)라고 한다. 치자는 붉은빛이 도는 노란색 염료의 원료로도 많이 사용한다. 한방에서는 열을 내리거나 타박상으로 생긴 멍을 없애는 소염제로 사용해왔다. 치자는 열을 내려주기 때문에 화병으로 가슴에 맺힌 울화를 없애는데 좋다. 특히 열이 있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경우 복용하면 좋다. 하루에 10g 가량을 물에 넣고 끓여서 차처럼 마시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