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308호 새댁 오랜만이네. 어디 다녀와?”
요즘 사람들이 아파트에 많이 살다 보니 이웃을 ‘308호’ ‘902호’라며 곧잘 숫자로 부른다. ‘살구나무골 최 씨네’‘우물가 김 씨네’‘고샅길 첫 모퉁이 박 씨네’ 같은 호칭은 사라진지 오래다. 우리에게도 좁다란 고샅이 있었고, 골목이 있었고, 마을숲이 있었는데 말이다.
시골에 가면 마을 입구가 곡식을 까부르는 키 모양으로 널따랗게 커서 썰렁하게 보이는 곳이나 입구가 좁아져서 물이 세차게 흐르는 곳이 있다. 그 경우 입구를 나무로 둘러싸서 마을 입구가 침식되는 현상을 막는데, 이를 동구(洞口)숲이라고 한다. 동구숲을 비롯해 하천변에 만든 하안(河岸)숲이나 해안가에 있는 해안(海岸)숲, 물이 자주 범람하는 지역에서 물난리를 피하기 위해 만든 뫼숲은 모두 마을숲이다.
마을숲은 우리 조상들이 땅의 짜임새를 이용해 홍수와 바람을 다스리려고 만든 숲이다. 한반도는 백두대간을 뼈대로 해서 뒷산이 높고 좌우로 산줄기가 뻗어 있는데다가 앞에는 들이 펼쳐지며 물길이 굽이친다. 마을숲은 이런 들판의 강풍과 물의 범람을 막아 마을을 지켜준다. 마을숲 중에는 ‘마을을 보호하는 숲’이란 뜻의 비보(裨補)숲도 있다. 일본 오키나와에는 한국의 영향을 받은 비보숲의 흔적이 남아 있다. 또 일본의 신사림(神社林)은 위치나 종교적인 의미에서 한국의 마을숲과 비슷하다. 일본어로 ‘사토야마’(里山)는 ‘주민의 생활 터전이 되는 작은 산’이란 의미다.
중국의 경우 주나라 때부터 하천의 크고 작은 범람에 대비하기 위해 둑을 따라 관목을 심고 둑을 다졌다. 기록에 따르면 주나라는 도로 주변에 소나무를 심었고, 당나라는 수도 장안에 회화나무를 심었다. 최근에는 ‘녹색 길’(green way)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녹색 만리장성’(Green Great wall)을 조성하고 있다. 상하이에서 난징을 거쳐 베이징으로 가는 철로 변에 메타세콰이어 나무를 만리장성처럼 끝없이 줄지어 심었다.
바람 막고 둥지 되고
한국의 마을숲에는 느티나무, 팽나무, 소나무, 상수리나무가 많다. 느티나무와 팽나무는 숲 지붕을 만들어 시원한 나무 그늘을 제공하고, 소나무는 늘 푸르러 지조와 충절을 상징하기에 마을을 대표할 만하다. 상수리나무에는 도토리가 열리므로 흉년이 들어 음식이 부족할 때는 안성맞춤이다. 경상북도의 회화나무, 남해안 지역의 푸조나무, 멀구슬나무, 개서어나무 등 지역 특성을 반영한 마을숲도 있다.
마을숲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바람을 막아준다는 점이다. 마을숲은 마을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 풍속을 떨어뜨려 마을을 따뜻하게 해준다. 2004년 태풍 ‘매미’가 남부 지방에 상륙해 경남 남해군의 물건리숲을 강타했지만, 물건리숲 안뜰의 벼는 쓰러지지 않았다. 물건리숲은 콘크리트 방조제보다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태풍을 끌어안아서 바람을 잠재웠던 것이다.
또 바람이 탁 트인 넓은 공간을 지나다가 마을 앞 동구와 같은 좁은 공간을 지나면 속력이 커진다. 이를 ‘벤투리 효과’(Venturi effect)라고 한다. 벤투리 효과를 이용해 동구에 나무를 심어 마을숲을 만들면 숲의 신선한 공기와 수분을 숲안들까지 나를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봄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의 내하숲에서 한 낮에 숲안들과 숲밖들의 상대습도를 측정했더니 안이 바깥보다 3~5% 높았다. 이는 내하숲이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풍속을 떨어뜨려 숲안들의 증발량을 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분이 공기 중에 오래 머물게 함으로써 숲안들의 상대습도를 증가시켰다고 해석할 수 있다. 습도가 높으면 농작물이 자라는데 도움이 된다.
경기도 양평군의 보룡숲은 토양 유실을 막는다. 여름철 집중호우가 내릴 때 마을 안뜰의 옥토가 씻겨 내려가지 않도록 한다. 특히 보룡숲 앞에는 하천이 흐르고 있는데, 만약 마을 안뜰과 마을에서 내려온 유기물 중 질소와 인산이 하천으로 흘러 들어가면 부영양화가 생길 수도 있다.
보룡숲은 이렇게 마을에서 흘러나온 유기물을 나무의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보룡숲에는 가슴높이 지름이 1m가 넘는 큰 나무도 있다. 게다가 이 나무는 속이 비어있어 원앙, 소쩍새, 솔부엉이 같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새의 둥지가 된다. 마을숲이 생물의 보금자리가 되는 셈이다.
하천에서 태어나 애벌레 시절을 보낸 애반딧불이가 마을숲에서 몸을 딱딱하게 단련한 뒤 숲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보면 마을숲은 하천과 숲을 잇는 연결 고리 역할도 한다. 따라서 마을숲은 마을의 생물다양성 유지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마을숲이야말로 한국형 생태도시의 원형이다.
500년 전만 해도 마을마다 마을숲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마을숲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새마을 운동으로 반듯한 신작로가 마을 어귀를 넓히고, 자동차가 마을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문명의 이기를 누리게 됐지만, 정말 잘 살고 있는지는 되돌아봐야 한다.
도시에 비가 내려 생긴 물길은 하천으로 오염물질을 실어 나르기 바쁘고, 콘크리트 틈에 쌓인 흙에서 자란 가중나무는 오래 견디지 못한다. 한 여름에는 산채만한 아파트가 바람길을 가로 막아 열섬효과를 부채질한다. 도시에 마을숲을 만들 수는 없을까.
아파트숲은 도시형 마을숲
마을숲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아파트숲을 조성하면 된다. 아파트 지하에 주차공간을 만들고, 지상에 숲을 만들면 이 아파트숲이 멋진 ‘비 정원’(rain garden)이 될 것이다. 큰 비가 내려도 빗물을 머금었다가 하천으로 천천히 흘려보낼 것이고, 이로 인해 도시의 열섬효과는 누그러질 것이다.
다행히 최근 학교나 관공서, 아파트의 담 허물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담이 없어진 자리에는 생울타리를 만들어 보자. 새와 벌이 날도록 쥐똥나무, 광나무, 작살나무를 심고, 느티나무, 팽나무, 상수리나무도 심어보자. 울도 담도 쌓지 않고 탱자나무와 시무나무로 만든 마을숲이 어느새 우리 옆에 와 있을 것이다.
한국의 마을숲 BEST 5
상림(上林)
위치:경남 함양군
가는 길:함양읍에서 1001번 지방도를 따라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된다.
특징:우리나라 마을숲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역사가 오래돼 천연기념물 154호로 지정됐다. 신라 진성여왕(887~897년) 때 함양 태수로 부임한 최치원이 홍수 피해가 극심한 것을 보고 제방을 쌓아 물줄기를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제방에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 당시에는 ‘대관림’(大館林)이라 불릴 정도로 숲의 규모가 컸지만 현재는 숲의 중간이 파괴돼 ‘상림’과 ‘하림’(下林)으로 나뉘었다.
감산(坎山)숲
위치:전남 함평군
가는 길:서해안고속도로 함평 요금소에서 대동면 방면으로 약 1km 떨어져 있다.
특징:길이 약 200m, 폭 12m로 감산마을을 감싸고 있다. 앞쪽의 너른 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는다. 마을에서 숲을 바라보면 왼쪽 끝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뒤로 느티나무, 소나무, 팽나무가 띠 모양으로 심겨 있다. 오른쪽 끝에는 줄기 지름이 약 120cm인 느티나무 두 그루가 큰 그늘을 만들고 있다.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이면 이 느티나무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상수리나무, 참느릅나무, 은행나무, 왕버들나무, 용버들나무, 아까시나무, 모과나무 등 다양한 나무가 있는 마을숲이다.
신림(神林)
위치:강원 원주시
가는 길:중앙고속도로 신림 요금소로 나와 국도를 타고 신림면 성남리를 찾아간다.
특징:천연기념물 93호. 전형적인 온대낙엽수림이다. 원주시는 관리인을 따로 두고 철저히 보존하고 있는데, 단풍이 곱게 드는 복자기를 비롯해 소나무, 왕느릅나무, 들메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등이 15~20m씩 높이 자라 상층을 이룬다. 숲 중앙에 목재로 성황당을 고풍스럽게 지어놓아 ‘성황림’이라고도 부른다. 성황당 옆에 높이 29m, 줄기 지름 130cm의 잣나무가 우뚝 솟아있는데, 이는 조상들이 하늘나라 신의 세계와 연결된다고 믿었던 우주목이다.
내하숲
위치:경기 이천시
가는 길:송말리 백사면사무소에서 차량으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특징:송말리는 원적산 아래 아담하게 자리 잡은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좌우, 뒤편으로는 산줄기가 마을을 둘러싸며 보호하고 있지만 마을 앞쪽은 휑하게 트여있어 숲을 조성해 마을을 보호하고 있다. 태풍이 지나가도 내하숲 안쪽 마을은 바람의 피해가 전혀 없어 벼농사가 잘 된다. 숲 안에는 연못과 정자, 족구장, 벤치가 있어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다.
방조어부림(防潮漁夫林)
위치:경남 남해군
가는 길:사천시에서 남해섬으로 난 삼천포대교를 건너 3번 국도를 따라 내려간다.
특징:파도를 막고 물고기를 모아준다고 해서 ‘방조어부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물건리숲’이라고도 불린다. 천연기념물 150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19세기 말 숲의 일부를 벌채했다가 폭풍으로 큰 피해를 당한 뒤부터 더욱더 철저히 보호하고 있다. 이 숲을 해치는 사람은 쌀 5말을 마을에 바치기로 약속하고 온 마을이 힘을 합쳐 숲을 지킨 결과 1933년 남해안에 큰 폭풍이 몰아쳤을 때도 물건리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2004년 태풍 ‘매미’의 피해를 막은 것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