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7월 9일로 탄생 150주년을 맞는 ‘세기의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의 연고지를 두고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가 실랑이를 벌였다. 테슬라가 태어난 곳은 크로아티아지만, 조상을 따져보면 세르비아 사람인 까닭에 양국에서 연고권을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 논란으로 양국이 내분을 앓을 것 같지는 않다. 세르비아 당국이 베오그라드 테슬라 박물관의 자료 사본을 크로아티아 스밀란에 건설하는 기념관에 제공하기로 약속하는 등 양국이 기념식을 계기로 화해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탄생지로 인해 사후에도 이렇게 논란을 일으키고 있지만, 테슬라는 독특한 삶과 과학적 업적으로도 논쟁을 일으켜왔다. 그는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천재 과학자’ ‘미국의 가장 위대한 전기 엔지니어’라고 불리지만, 동시에 ‘몽상가’ ‘미친 과학자’ ‘마술사’라는 칭호가 따라 붙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어떤 과학자보다도 소설이나 영화 속 인물로 많이 등장했던 테슬라. 과학자들 사이뿐 아니라 UFO 동호회나 신비주의자 동호회에서도 추종자들이 많은 그는 과연 어떤 과학자였을까.
미국의 ‘라이프 매거진’이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100인 중의 한 사람으로 뽑은 테슬라는 전기문명의 시대를 완성한 과학자였다. 1887년 웨스턴유니온사의 지원을 받아 그가 완성해 놓은 교류 시스템은 에디슨의 직류 시스템에 이어 미국의 전기 혁명을 촉진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에디슨의 직류시스템 누르다
오스트리아 그라츠공대 시절 테슬라는 물리실험시간에 직류 전동기를 접하면서, 교류를 이용하면 직류 전동기의 스파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직관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부다페스트 전신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대학 시절의 막연한 생각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 즉 변화하는 자기장의 원리를 이용한 교류 유도 모터를 발명했다. 이 아이디어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읊조리다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한다.
그는 1882년 파리 에디슨 전화회사로 옮겼을 때 평소 생각만 해오던 모터를 제작해볼 수 있었다. 마침내 1887년 테슬라는 웨스턴유니온사의 지원을 받아, 교류 시스템에 필요한 발전기, 모터, 변압기를 모두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는 최초로 교류 유도 모터의 특허를 획득한 발명가로 역사에 기록됐다. 그 뒤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은 웨스팅하우스의 투자를 받았으며 전력 손실로 경제성 문제를 겪던 에디슨의 직류 시스템을 서서히 대체하면서 미국의 전기문명을 완성했다.
테슬라는 교류 모터 이외에도 전기기계용 전류전환장치, 전기 아크등, 발전기용 조절기의 특허를 출원해 당시 전기시스템을 실질적으로 향상시켰다. 비록 다른 공학자들처럼 자신의 발명과 관련한 이론을 정리해 논문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테슬라는 전기에 대한 직관 덕분에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전기공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테슬라는 시대를 앞서가는 통찰력으로 각종 전기실험을 한 덕분에 ‘거의 모든 현대기술의 원조’라는 칭호를 얻었다. 실제 무선 방전램프, 형광등, 무선통신 라디오, 최초의 X선 사진, 열 치료 기술, 고전압 발생용 코일, 원격조정 장치, 자동차 속도계, 논리곱(AND)회로 소자, 레이더, 수직이착륙기, 회전날개 없는 터빈 등이 그의 발명품이다. 그는 우주선(cosmic ray)의 존재를 예언하고 라디오파를 최초로 검출했으며, 지열발전소의 가능성과 함께 전자기파를 땅속으로 쏘아 지하자원을 탐사하는 기술의 가능성을 최초로 언급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테슬라는 대부분의 발명을 실용화하는데 실패했지만, 그 아이디어는 다른 발명가나 과학자의 시야를 넓혀줬다.
거의 모든 현대기술의 원조
테슬라 평생의 꿈은 무선으로 에너지를 송신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진동수가 태양광(가시광선)에 가까운 고주파를 이용하면 당시의 조명이 더 밝아진다는 생각에서 실험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891년 60Hz의 일반 가정용 전기를 수천Hz의 고주파로 바꿔 놓으면서 엄청난 고전압을 발생시키는 테슬라 코일을 개발했다. 테슬라에게 고주파 전기의 가능성을 확신시켜줬던 이 코일은 현재 변형된 형태로 라디오와 TV에서 쓰이고 있다.
그는 이 코일 덕분에 최초의 네온등과 형광등을 개발했고 에너지가 강한 X선을 이용한 사진 촬영에도 처음 성공했다. 이 무렵 테슬라는 고주파 전기를 이용하면 전선이 없이 진공 튜브도 환하게 밝힐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로부터 테슬라는 에너지원에 상관없이 지구 어디에서나 에너지를 쓸 수 있도록 하는 에너지 무선 전송의 가능성을 추론하고 이를 실현시킬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테슬라는 무선통신 라디오 장치를 이 방안의 하나로 제시했다. 테슬라는 코일을 이용한 실험을 하던 중 라디오 신호를 같은 진동수로 공명시켰을 때 이 신호를 송수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원리를 바탕으로 하면 전기 전송도 가능하다고 봤다. ‘무선통신의 아버지’로 알려진 마르코니 역시 테슬라의 무선통신 라디오 장치에 기초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테슬라는 이 라디오 기술을 무선 에너지 송신장비라고 보고 이를 대중에게 알리고자 ‘라디오파로 조종되는 배’를 제작했고, 여기에 필요한 무선 조종장치를 개발했다. 이 과정에서 테슬라는 현대 로봇의 가능성도 언급했다.
그후로도 테슬라는 재원을 마련하고자 틈틈이 실용적인 발명도 하면서 무선전력 송신시스템을 개발하려고 했다. 공기층이 얇아 전도성이 높은 대기 상공에 높은 탑을 세워 전력을 무선으로 송신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 콜로라도스프링스에서 고전압 실험을 했다. 이 과정에서 테슬라는 액화공기를 이용해 코일의 저항을 줄이는 기술과 절연 기술의 특허를 획득했다. 테슬라는 전세계 무선통신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명목으로 투자자 모건에게 자금을 받아 무선전력 송신탑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자금이 고갈되고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며 테슬라 시스템에 대한 투자자의 불신이 커져 결국 1905년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테슬라는 이 에너지 전송의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테슬라는 앞을 내다볼 줄 모르고 나약하며 의심이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위대한 구상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상에서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경쟁자 에디슨 때문에 재정압박을 받고 있던 웨스팅하우스가 테슬라에게 교류 모터 특허권 계약을 파기하자고 제안했을 때 그는 즉시 이를 받아들였다. 인류에게 엄청난 가능성을 가져다줄 교류 시스템이 퍼져나가는 일이 자신의 금전적 이익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게 돈은 또 다른 유익한 발명을 위해서만 필요했을 뿐이다.
이렇게 관대한 그였지만, 몇가지 점에서는 극도의 결벽증을 보여줬다. 위생에 대한 강박 관념 때문에 식사하기 전 스푼과 포크를 광택이 날 정도로 일일이 냅킨으로 닦았다. 손수건은 하얀 실크로 된 것만 썼으며, 옷을 입은 다음에는 장갑이나 보석을 포함해 어떤 액세서리도 걸치지 않았다. 특히 진주는 더 싫어해 마음에 들었던 여인이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도 걸지 못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3의 배수인 숫자가 붙은 호텔방에만 머물렀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말년에는 자신이 지내는 호텔방을 비둘기 새장으로 가득 채울 정도로 비둘기에 집착했다고 한다. 이런 강박증으로 그와 친숙하게 지내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신비한 고전압 방전 실험과 고주파 실험을 대중에게 시연하고 잡지나 언론에 적절한 과장을 섞은 비전을 발표하며 늘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실험실에는 마크 트웨인 같은 유명인사가 드나들었고, 그의 실험무대는 마치 마술쇼를 연상시키도록 꾸며졌다. 1200만V에 1100A의 전류가 흐르는 방전 장치 사진에 무심히 앉아 있는 자신의 사진을 합성해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단순히 자신의 명성을 쌓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미래 비전을 일반 사람과 나누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인류의 더 나은 진보를 위해서. 당대 사람들보다 지나치게 앞서 있던 그의 비전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이들 중에는 신비주의에 빠져있던 사람도 많았다.
소련 지원받은 ‘입자 빔 무기’ 아이디어
자신의 이론을 논문으로 작성하지 않았던 테슬라는 과학계에서도 고립된 채 말년을 맞았다. 하지만 그의 번뜩이는 직관에서 나오는 발명품 아이디어는 노년이 돼서도 식지 않았다. 예를 들어 1차 세계대전 무렵 테슬라는 잠수함을 탐지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이는 2차 대전에야 완성했던 레이더의 원리였다. 고주파의 라디오파를 전송해 함대에서 반사돼 오는 파동을 형광 스크린에서 보는 방식이었다.
1928년에는 72세의 나이로 헬리콥터와 항공기를 닮은 비행기계에 관한 아이디어로 특허를 획득했다. 현재의 수직이착륙기 원리에 바탕을 둔 이 기계는 안타깝게도 투자자를 찾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전쟁을 혐오했던 테슬라는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무기 개발에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다. 1934년 테슬라는 ‘입자 빔 무기’에 관한 아이디어를 언론에 발표했다. 그는 공기 중으로 입자 빔을 쏘아 비행기 편대를 격추시킬 수 있는 가공할 에너지를 지닌 무기라고 설명했다. 이 무기를 각 나라에 퍼뜨려 누구도 상대방을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해 전쟁을 억제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소련에서 이 무기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냈고 1939년에는 이 무기 제작 계획의 1단계를 진행했다. 테슬라는 소련에서 연구비를 지원받았다. 1943년 사망하기 직전 테슬라는 이 ‘죽음의 빔’을 완성했다고 공표했다. 그러나 입자 빔 무기는 현재까지 개발되지 않았고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이와 비슷한 레이저 빔 무기를 개발 중이다.
테슬라의 연구는 미국연방수사국(FBI)의 주목을 받았다. 테슬라가 죽은 뒤 FBI가 그의 발명 문건을 처리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발명 기록 문건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이 사건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그에 대한 범상치 않은 일화를 더 풍부하게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