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에서 시작해 한참을 달려온 두만강은 동해에 다다른다. 쉬지 않고 흐르던 그 물길은 강 하구의 황금빛 모래사장을 거쳐 해류를 타고 북으로도 흘러든다. 모래사장에서 북쪽으로 17km 정도 지났을까. 마침내 두만강 물줄기는 어느 섬에 도착한다.
섬의 이름은 ‘후루겔므’. 바로 러시아령인 두만강변의 최남단 섬이다. ‘후루겔므’라는 명칭은 19세기 후반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섬에 정박했다는 러시아 함대장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필자와 후루겔므 섬의 인연은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인적이 사라져 5월이면 흐드러지게 핀 꽃과 꽃을 찾아 날아든 나비가 들판을 가득 메우고 갈매기와 백로, 가마우지 떼들이 물가를 차지한다.
별천지와도 같은 후루겔므 섬은 9년째 그곳을 찾을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로 필자를 맞이하고 있다. 이번에는 발해시대의 닻이었다.
라트니코프 씨의 이야기
닻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소개해야 할 러시아 친구가 있다. 이름은 알렉산드르 라트니코프. 그는 50대 중반으로 러시아 극동해양보호금지구 소속이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극동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과학자이자 후르겔므 섬 일대에서만 30년 가까이 활동한 레인저(특수군)이기도 하다.
손재주가 뛰어난 라트니코프 씨는 대학 시절부터 직접 수중 카메라 장비를 만들어 후르겔므 섬의 해저 생태를 촬영해왔다. 그는 해양 생물에 관심이 많아 매년 몇 건씩 희귀한 해양생물을 학계에 보고하며 해저 생태 연구에 있어서는 직업을 떠나 강한 애착을 갖고 있다.
이런 그는 필자에게는 오래된 친구다. 어느 날 우연히 필자는 라트니코프 씨의 집에서 발해시대 닻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고고학연구소에서 후루겔므 섬 인근 해저에 발해 닻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몇 년 동안 수차례 인양을 시도했는데, 결국은 실패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발해 닻은 국내 학계에 전혀 알려진 정보가 없다. 발해 닻의 이미지는 미지의 해저 세계와 뒤엉키며 필자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라트니코프 씨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짐작되는 곳이 있다”면서 “기회가 되면 같이 탐사를 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필자는 선뜻 그러자고 말할 수 없었다. 발해 닻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한 가지 의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닻이 발해시대 유물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지층에서 발견된 유물처럼 연대측정을 통해 시대를 추정할 수도 없다. 바다 속 유물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의구심을 가지자 라트니코프 씨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우선 지리적으로 후루겔므 섬은 발해의 주요 동해항인 포시에트와 인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태풍 등 기상 조건이 나쁜 경우에는 선박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또 라트니코프 씨는 여러 차례 수중 탐사에서 포시에트와 마주보고 있는 섬 북쪽 해안에서 토기 몇 점을 발견했는데, 고고학자가 이 토기를 발해시대 것이라고 판명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트니코프 씨는 발해 토기가 발견된 그 해안가에 발해 닻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렇다면 토기와 마찬가지로 닻도 발해 시대의 것이 아니겠냐고 설명했다.
결국 필자와 취재팀을 도운 연해주 전문가 순동기 씨는 라트니코프 씨의 설명에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발해 닻 인양 작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9월 추석 무렵 필자는 라트니코프 씨를 포함한 몇 명의 러시아 해양학자들과 함께 후루겔므 섬으로 향했다. 발해 닻을 인양하기 위해서였다.
길이는 183cm, 무게는 400kg
모든 일정은 계획대로 진행됐고 여러 차례 조사 끝에 닻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했다. 라트니코프 씨의 예상대로 닻은 포시에트 항과 마주보고 있는 섬 북쪽 해저에 있었다. 북쪽 해안가에서는 닻이 발해 시대의 것임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발해 토기도 몇 점 발굴됐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닻이 발해 시대의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 고고학연구소의 실란티에프 박사 논문을 통해서였다. 그의 논문은 발해 닻에 관한 것이었다. 그를 만나 직접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는 당시 모스크바로 거처를 옮긴 터라 만날 수 없었다.
결국 블라디보스토크의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 실란티에프 박사의 논문을 찾아냈다. 이로써 더 이상 발해 닻이라는 점을 의심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어떻게 인양하느냐는 것이었다. 두만강 하안 지역이 북한과의 국경지대인지라 일반 선박의 접근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닻이 있는 위치마저 소형 보트가 아니면 정박하기 어려웠다.
사전 탐사에서 밝혀진 닻은 정확히는 닻의 일부였다. 그런데도 그 길이는 필자의 키를 넘어 정확히 183cm였고, 재질은 화강암으로 무게가 400kg은 족히 나갈 것으로 추정됐다. 장정 서너 명이 동시에 닻을 끌어 올린다고 해도 맨손으로는 도저히 인양할 수 없는 무게였다.
회의를 거듭한 뒤 취재팀은 다음과 같은 방법을 강구했다. 우선 큰 석유 드럼통에 물을 담아 해저로 내려 보낸다. 그 다음 밧줄을 이용해 닻과 드럼통을 연결한다.
그리고 드럼통에 공기를 불어 넣으면 부력으로 그 통이 수면으로 떠오른다. 이때 통에 밧줄로 연결된 닻이 함께 떠오를 것이다.
필자는 그 방법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특수 대형 선박을 이용하면 굴삭기(포크레인) 같은 기계 장비를 동원해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닻 자체에 흠집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이런 방법은 발해 선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구체적인 인양 방법까지 정해지자 후루겔므 섬 관할 지역대장인 세르게이 씨가 도착했다. 그는 수준급의 베테랑 다이버였다.
작업은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잠시 후 드럼통에 연결된 발해 닻이 드디어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1000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 해저에서 침묵을 지키던 발해인의 닻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닻 복원은 진행 중
인양된 닻의 일부를 토대로 완전한 형태의 닻을 복원할 수는 없을까.
실란티에프 박사의 논문에 따르면 원래 닻에는 석재와 목재로 된 부분이 있었다. 이번에 인양된 닻은 목재 부분이 세월이 지나면서 바스라졌고, 석재 부분만 남은 것이었다. 비록 ‘반쪽짜리’ 닻이었지만 인양된 닻의 석재 부분은 발해 선조의 정취와 고유의 멋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몇 달 전 필자는 국내 고선박 제작 전문가를 찾았다. 그에게 인양된 발해 닻 사진과 도면, 논문 등을 보여주며 자문을 구했다.
그는 “그 정도의 닻이라면 당시 15~16명이 승선할 수 있는 대형 선박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복원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닻의 석재와 목재부의 결합 형태는 힘을 가장 효과적으로 받을 수 있는 구조”라면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된 과학적인 형태”라고 덧붙였다.
현재 발해 닻의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작업이 마무리되면 한국 최초로 발해 시대 닻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닻은 발해 선조의 과학기술과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