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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연방과 러시아공화국의 수도 모스크바. 이 도시를 처음 이룬 것은 지금도 모스크바 동북쪽 1백50km지점에 남아있는 오래된 도시 브라디미르와 수즈달리를 근거로 살았던 수즈달리공 ‘유리 돌고르키’(Jurij Dolgorukie)였다. 12세기초에 수즈달리공이 모스크바 강과 네그린나야 강이 합류하는 곳에 천연의 요새지를 발견하고 여기에 작은 목조의 성채를 만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크레믈린의 기원이며 모스크바의 기초가 되었다.

모스크바는 침엽수림대와 활엽수림대의 경계에 있어 부근에서 수공업발전을 자극할 원료가 많이 산출되고 볼가강 오카강 드네프르강 돈강 등과 연결되는 하천수로망이 조밀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이런 자연조건이 모스크바의 발전을 촉진했다.

평균표고는 1백20m이며 모스크바강의 3단의 강기슭단구(段丘), 표고 2백50m 정도의 남서부 레닌구릉, 동부저지, 북부구릉사면등 기복이 많은 지형위에 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모스크바의 기후는 심한 대륙성 기후를 이루고 해마다의 기후변동도 뚜렷하다. 1월의 평균기온은 섭씨 영하 11도이고 7월의 평균 기온은 섭씨 19도이며 기록상의 최고기온은 37도, 최저기온은 영하 42도였다. 강수량은 연평균 5백86mm이고 첫눈은 9월초~11월초에 내리며 백야현상은 6월20일이 지나 가장 두드러지고 밤 12시 이후까지 희끄무레하게 밝다가 새벽 2시에는 환하게 날이 샌다.

일찌기 수공업이 발달했는데 18세기 전반부터는 섬유류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혁명 후에는 이런 경공업편중을 벗어나 중화학공업으로 바뀌었다. 그밖에 목재가공업과 건설 자재공업의 비중도 높아졌으며 식품가공업과 출판인쇄업도 성하다.

또 각종 교통기관의 요지로 주요 교통간선이 소련 각지와 연결되어 있다. 철도교통은 주요간선철도가 사방으로 뻗어나 있으며 정기항공로는 소련의 1백개 이상 도시와, 20개 이상의 외국수도 혹은 주요도시 사이와 연결돼 있다.

모스크바는 또 과학문화의 중심지로 80개 이상의 고등교육기관과 40만명 이상의 학생이 있다. 시의 남서쪽 레닌 언덕에 있는 34층의 종합교사가 있는 로모노소프기념 모스크바 국립대학(1775년 창립)을 비롯한 대학이 많고 연구기관으로는 소련연방아카데미 아나우카를 비롯한 여러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크레믈린에 있는 브라고 베젠스키사원. 황족의 세례식과 결혼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또 입구의 계단에서 황제가 포고령을 읽는 것을 듣기 위해 민중이 모였던 곳이기도 하다.


초라한 마을이었던 모스크바

처음엔 초라한 목조가옥이 모인 취락에 불과하였던 모스크바는 차츰 우크라이나 키에프 공국의 수도 키에프와 발트해 연안의 서구와의 교역창구였던 리아잔 노프고르드, 볼가강 연안의 상업중심지 토브에리(지금의 칼리닌시)등 주변 여러도시를 잇는 통상로의 통과지점 구실을 하여 갔다.

13세기가 되자 몽고군이 볼가강 상류로 처들어 왔다. 모스크바도 불타고 몽고군의 말발굽에 짖밟혔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의 중심지였던 키에프가 완전히 함락 파괴되어버린 것이 모스크바를 러시아의 중심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 첫 작업으로 당시 세력이 당당했던 노프고르드공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모스크바를 통일 러시아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기능공과 상인들을 이곳으로 모아 새로운 모스크바 거리 건설에 나섰다. 그의 계획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1263년에는 북쪽의 스웨덴과 동남쪽의 몽고 등 주변국과 강화를 맺고 모스크바대공국을 세웠다.

14세기에는 그때까지 브라디미르에 있었던 러시아정교 주교관을 모스크바로 옮겨 종교의 중심지도 되었다. 특히 당시의 모스크바 대공 ‘디미트리 이바노 비치’(돈스코이 대공)가 모스크바 남쪽 돈강 연안의 평야에서 처음으로 몽고군을 처부수고 개선한 이래 모스크바는 ‘성스러운 도시’로서의 이미지로 러시아인의 혼속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 성스러운 도시는 1450년에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블)에 본거를 두고 있던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 정신적으로 독립했다. 정치 군사적으로 러시아를 압박하여 온 몽고인으로부터의 해방(1480년)에 앞서 모스크바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파견되어 있던 그리스인 주교를 추방하고 러시아정교를 독립교회로 확립한 것이다. 그리고 1453년에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투르크에 패망하자 모스크바가 ‘정교회의 총본산’이 되었다.

풍운의 역사를 말해주는 크레믈린

비잔틴제국의 굴레에서 벗어난 모스크바에서는 새로운 사원건축이 활발해졌다. 그리스정교회 승려들이 도주하면서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르네상스식 건축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대거 초빙되어 왔다. 그들은 또 각각의 직인들을 이끌고와 총동원된 러시아 직인들과 함께 모스크바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4세기 후반에 목조에서 석조로 바뀐 크레믈린(Kremlin·성채라는 뜻)도 성벽과 탑이 대규모로 신축되어 토르그 광장(현재의 붉은 광장)과 함께 ‘이반3세’때에 완성되었다.

이반3세대제는 1472년에 비잔틴 제국 최후의 황제의 조카 ‘소피아 파레오로고스’와 결혼하여 비잔틴 황제의 후계자라 자칭하고 모스크바를 콘스탄티노플(제2의 로마)에 이은 정교회 주교가 있는 ‘제3의 로마’라고 불렀다. ‘전체 러시아의 차르(황제)’ 칭호를 처음 쓴것도 그였으며 1480년에 ‘타타르의 멍에’에서 러시아인을 해방시킨 것도 그였다.

새로 단장된 크레믈린도 이런 위세에 알맞게 화려하고 웅장해졌다. 양파 모양의 탑이 금색으로 빛아는 많은 사원, 갓 지은 글라노비타야 궁전, 종탑, 스파스캬야탑 등등···, 피렌체와 베네치아를 생각케 하는 화려함 속에 러시아의 흙 냄새가 풍겼다. 그것은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사전에 브라디미르와 야로스라브리 등 모스크바 주변의 옛 도시에서 러시아 건축을 연구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붉은 광장은 거의 지금 모습 그대로이다. 뒤에 추가된 것은 이반3세보다 2대 뒤인 뇌제(雷帝)‘이반4세’때 세운 바실리 브라젠누이 사원과 스탈린 시대에 만든 레닌묘 두가지 뿐이다.

이렇게 하여 모스크바는 16세기에는 10만 인구의 대도시가 되어 도예공과 금은세공사와 성화를 주로 그리는 화가들이 활약하고 상업이 번성했다. 1552년에는 이반뇌제가 동쪽의 강적 카잔한국(汗國)을 원정제압하여 타타르의 위협을 막았다. 이 싸움의 모양은 소련영화사상에 남는 ‘에이젠슈타인’감독의 명작 ‘이반뇌제’에 잘 나타나 있다. 이어 뇌제는 서쪽의 숙적 리트와(리트와니아)와 여러번 싸워 러시아를 유럽에 바탕을 둔 나라로 굳힌다.

뇌제가 죽은 뒤 모스크바와 러시아는 궁정과 귀족, 대상인들의 다툼으로 동란시대를 맞으나 1613년에 오랜 가문의 귀족 ‘미하일로마노프’가 황제가 된 뒤 10월 혁명이 일어나기까지 로마노프 왕조가 러시아를 지배한다.

1670년대 초에는 유명한 ‘스텐카 라진’의 난이 일어난다. 농노해방을 부르짖으며 돈 코사크를 이끌고 정부군을 괴롭힌 그는 끝내는 체포되어 붉은 광장에서 처형되었으나 그 이름은 민중의 영웅으로서 지금도 러시아 민요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18세기초에 수도가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레닌그라드)로 옮겨졌으나 국민경제의 중심인 모스크바는 더욱 발달되었고 문화활동도 활발했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때(1812년) 시가지가 소실되었으나 몇해 사이에 복구되어 섬유 금속가공 화학등의 공업이 성하면서 인구도 늘어갔다. 19세기 말에는 인구 1백만이 넘는 거대도시가 되었으나 급속하게 증가한 노동자 등 도시하층민의 빈곤문제가 악화되어 노동운동이 조직화 대규모화되어 혁명운동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1917년 10월 혁명 때의 8일간의 전투에서 승리한 볼셰비키는 1918년 3월 레닌의 제창에 따라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옮겼다. 혁명 후의 경제위기와 내전 등으로 한때 줄었던 인구는 내전이 종결되고 행정기능이 확대되자 다시 급격히 늘어 1939년에는 4백만명을 넘었고 1960년에는 시구역을 1919년 당시의 5배나 되는 8백79km²로 확대 설정하고 모스크바 종합개발에 나섰다.
 

모스크바 북동 교외에 있는 별장지 아브라무체의 목조다차(작은 별장)


웅장하고 화려한 크레믈린과 붉은 광장

모스크바의 중심은 말할것도 없이 크레믈린(내성)이다. 성벽에 둘러싸인 거의 삼각형인 약 28만m²의 부지에 세워진 성채다. 트로이츠카야탑에서 성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 유리로 된 초현대식 건물이 있다. 이것이 6천명이 수용되는 대회궁전으로 공산당대회를 비롯하여 오페라 발레 등이 개최되는 곳이다.

삼각형인 크레믈린 부지의 중심에는 사원 광장이 있다. 여기에는 우스펜스키(성모승원)와 브라고베시첸스키(수태고지)의 두 사원과 역대의 황제 묘소가 있는 아르한게리스키 사원이 서있다. 우스펜스키 사원의 본당은 역대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된 곳이기도 하다. 사원 광장의 중앙에는 높이 약 82m되는 이반대제의 종루가 우뚝 서있다. 21개의 호화로운 종이 매달려 있는 종루 아래에는 두 대왕이 있다. ‘대포의 대왕’이라는 중세기 최대의 캐논포와 직경 6.6m의 ‘종의 대왕’이 그것이다.

크레믈린 성벽의 동쪽 바깥이 붉은 광장이다. 7만3천m²나 되는 장방형의 이 광장 서쪽은 크레믈린 성벽이고 그 앞에는 장미색 화강암을 피라밋 모양으로 쌓아올린 레닌 묘가 있다. 북쪽에는 혁명광장과 국립역사박물관이 있고 동쪽에는 국영백화점 ‘굼’이 있으며 남쪽에는 러시아 정교회 건축의 정수라 하는 바실리 부라젠누이 사원이 둘러싸고 있다. 굼 백화점 뒤쪽에는 옛날의 모스크바 그대로의 꾸불 꾸불한 골목길이 지금도 남아있어 가벼운 산책을 즐길 수 있다. 크레믈린 북쪽 성벽을 따라서는 알렉산드로프스키 공원이 있고 혁명광장 가까이에는 마네주 광장이 있다. 큰 호텔은 모두 이 주변에 있는데 모두 현대식 건물이어서 오랜 옛날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 일대에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준다.

마르크스주의와 공존하는 신앙

트로이츠카야탑으로 크레믈린을 나오면 3개의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1817년에 세운 중앙전람회장, 시적 무드가 감도는 모스크바대학 구교사, 그리고 마르크스대로와 카리닌 대로가 마주치는 모퉁이에 있는 레닌 도서관이 보이는 것이다. 이 도서관은 2천5백만권의 서적과 20개의 열람실이 있는 세계적으로 귀중한 도서관의 하나다.

카리닌 대로와 교차하는 스보로프로에는 ‘고골리’(Nikolai Vasilievich Gogoli·1809~1852·소설가, 극작가)가 살던 집이 있고 그 부근에는 ‘푸시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1799~1837)을 비롯하여 ‘마야코프스키’(Vladimir V.Mayakovski·1893~1930) ‘예세닌’(Sergey Aleksandrovich Esenin·1895~1925) 등 유명한 시인들이 자작시를 낭송했던 집이 있는데 지금은 저널리스트 본부가 되어 있다. 알바트 거리에는 푸시킨이 살던 집도 있으며 그 옆에는 스쿠라빈 박물관과 ‘고르키’(Maksim Gorki·1868~1936·소설가)문학 박물관도 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Fëdor Mikhailovich Dostoevski·1821~1881·소설가)와 ‘차이코프스키’(Pëtr Ilich Tchaikovsky·1840~1893·작곡가)가 살던 집도 있는데 모두 박물관이 되어 있다.

다시 오래된 정교회 사원에 들어가보면 신앙심이 돈독한 노인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마르크스·엥겔스주의에 대한 토론이 아무리 진지하다해도 그들은 신앙을 잠시도 잊을 수가 없는 것는 것이다.

크로포트킨로에는 톨스토이 박물관이 있다. 서쪽으로 좀 가면 그 이름이 바리샤야·피로고프스카야로로 바뀌는 지점에 톨스토이가 살던 소박한 목조의 집이 있다.

이 거리를 서쪽으로 더 나아가면 오른쪽에 러시아 수도원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노보데비치 수도원이 있다. 1520년에 세운 것으로 그 부속묘지에는 작가 고골리, 체호프, 시인 마야코프스키, 예세닌, 작곡가 스크랴빈, 프로코피예프, 무정부주의자가 된 공작 크로포트킨과 흐루시초프가 묻혀 있다. 이 묘지는 젊은 연인들이 조용한 산책을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이 수도원 남쪽에는 모스크바올림픽의 중심시설이었던 레닌스타디움이 있다. 10만3천명이 수용되는 크기이며 그 주위에는 각종의 스포츠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레닌스타디움에서 모스크바강을 건너 서쪽이 레닌언덕으로 그 위에는 모스크바대학이 시가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유학생을 포함한 3만5천명의 학생이 있으며 구내에는 연구소 1백2, 실험실 1천, 강당 1백48개가 있다. 거대한 네오고딕양식 중앙건물 꼭대기의 지상 3백3m되는 곳에는 인조루비로 만든 붉은 별이 장식되어 있다.

크레믈린 앞 혁명광장 북쪽에는 스베르도로프광장이 있고 이 아름다운 광장을 작은 카페와 볼쇼이극장 마루이극장 어린이극장 등이 둘러싸고 있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뻗은 페트로프카로는 번화하고 활기찬 거리다. 여기서 더 북쪽으로 가면 모스크바 시민이 ‘카리초’(링·모스크바시를 둘러싼 테라는 뜻)라고 부르는 사도보에 환상도로가 달리고 있다.

다시 크레믈린 주변으로 가보자. 거기엔 모스크바 사람들이 자랑하는 지하철이 있다. 그 노선은 혁명광장에서 사방으로 뻗어 있다. “차르는 크레믈린을 만들었고 우리는 메트로를 만들었다”고 소련 민중이 자랑하는 이 지하철은 1935년에 소콜리니키공원과 고르키공원 사이의 11.6km에 최초의 노선이 깔렸다. 현재는 총연장 1백9km에 전철역의 수는 75개나 된다. ‘노동자의 영광을 나타내는 성전 같이 만들어 그 속의 공기는 숲 속의 공기처럼 맑지 않으면 안되고 대리석 바닥에는 먼지가 있어서도 안된다’─이런 전체의 분위기가 감도는 속에 모든 역은 청동과 수정으로 장식되어 공상과학소설 속의 미래도시와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역 이름은 ‘데이나 모’(발전소) ‘테크스티리시친키’(방직공) ‘프로프사유즈나야’(노동조합) 등 혁명 후의 소비에트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 많다.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초기사원. 목조시대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살린 것이다.


성화가 소장된 트레차코프 미술관

크레믈린의 남쪽에서 크게 굽어진 모스크바강을 건너면 그곳은 러시아어로‘ 자 모스크바레체’(모스크바강 대안)라는 지구다. 이곳의 강가운데 모래톱을 끼고 크레믈린과 마주한 카다셰프스카야강 연안도로로 나와 조금 남쪽으로 꺾으면 트레차코프 미술관이 있다.

모스크바의 루브르 박물관이라 할 수 있는 이 트레차코프 미술관에는 회화를 비롯하여 판화 조각 등의 미술품 5만여점이 전시되어 있어 러시아미술사를 보는 것 같다.

소련에서는 추상화를 비롯한 서구의 현대 미술은 퇴폐적 반혁명적이라 하여 거의 공인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현대예술에 공헌한 러시아인, 예를 들면 추상화의 선구자 ‘말레비치’(Kasimir Severinovitch Malévich·1878~1935), ‘라리오노프’(Michael F.Larionov·1881~1964), ‘곤차로바’(Natalya S.Gontcharova·1881~1962)등 전위화가들의 작품과 ‘샤갈’(Marc Chagall·1887~1985)과 ‘수틴’(Chaim Soutine·1894~1943)도 거의 전시되지 못하고 지하창고에 그대로 있다. 미술의 세계에까지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모스크바 사람들의 모습

모스크바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어떤 것인가. 겨울의 일요일이 되면 너도 나도 스키를 메고 또는 스케이트화를 어깨에 걸치고 교외로 나간다. 여름이 되면 전원의 분위기를 즐기려고 들로 나간다. 그들은 프랑스 화가 르느와르의 그림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생명을 구가하고 옛날 종교화에서처럼 경건하게 기도하기도 한다.

부괄제 때의 예배당은 입추의 여지가 없이 사람들로 붐빈다. 한편 무신론을 주장하는 정치집회에도 많은 사람이 모인다. 트롤리버스나 모스크바 강을 오르내리는 작은 유람선 속에서, 서커스나 소코리니키공원 속에서 그들은 한결같은 모습을 거리낌 없이 보여준다.

모스크바는 대도시다. 면적은 9백km². 1925년에 1백만명이었던 인구가 지금은 약 1천만명이 되었고 앞으로 더욱 팽창할 것 같다. 백러시아역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레닌그라드대로는 새로 단장하여 길 폭이 1백18m나 된다. 교차로에서는 최근에 트랜시버를 사용하는 경찰관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으나 모스크바 사람들은 경관도 신호도 무시하고 가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가버린다. 사회주의의 관료적인면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노점과 자유시장도 흥청거린다. 미용사도 있고 불량소년 소녀도 있다. 미술관 공화당 달러숍 공중목욕탕에다 해적출판 등등···모스크바에는 무엇이든 있다.

외국인이 많은 것도 뜻밖이지만 거기다 더하여 놀라운 것은 소련의 각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모스크바로 몰려드는 것이다. 붉은 광장의 레닌묘 참배를 위한 장사진이 이를 상징한다. 모스크바 사람들은 매일 매일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며 모스크바 분위기를 세례 받은 사람들을 소련 각지로 돌려 보냄으로써 소련 전체를 조금씩 모스크바와 같은 색으로 만들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1989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동아일보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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