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시절 영화 한편 소개한다. 제목은 ‘쁘르제발스키’다. 1951년 모스필름이 제작했다. 주인공인 ‘쁘르제발스키’는 10월 혁명 전 러시아제국에 실존했던 탐험가로 1867년 동시베리아 총독의 명을 받아 연해주 탐험을 강행했다.
그의 눈에 비친 연해주는 신비와 풍요로움이 넘치는 신천지 그 자체였다. 긴 여정을 거쳐 마침내 그는 ‘녹둔도’(鹿屯島)에 도착했다. 어느 호숫가에 도착한 그는 말했다. “저 멀리 큰 바다(동해)와 두만강이 있고, 그 너머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 그때 수색 나갔던 한 동료가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다. 그들의 보살핌으로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사람이 말했다. “나는 김치봉이요. 조선사람이라오.” 연해주 녹둔도에서 조선사람과 러시아 탐험가의 첫 만남이었다.
이제는 사라져 옛 문헌에서나 만날 수 있는 두만강 하구 조선의 섬 녹둔도. 녹둔도는 19세기 후반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서 타의에 의해 조선의 영토에서 제외됐다. 아직도 녹둔도를 둘러싼 러시아와의 영토 분쟁은 진행 중이다. 녹둔도에 대한 접근에 앞서 그 지역을 아우르는 연해주부터 살펴보자.
‘팡자’는 조선식 가옥
연해주라는 말은 길게 잡아야 100여년을 넘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만주권역의 일부분이었건만 굳이 ‘연해주’라는 별칭이 붙게 된 것은, 대륙의 동부로 지향점을 설정하고 우랄산맥을 넘고 흑룡강(아무르강)을 건너 남하를 지속한 러시아 세력인 코작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극동아시아 흑룡강 이남을 ‘프리모리아크라이’로 불렀는데, 이 의미를 직역한 것이 바로 연해주다. ‘프리’는 인접한다는 뜻의 연(沿), ‘모리아’는 바다라는 뜻의 해(海), ‘크라이’는 광대한 지역의 행정적인 단위를 지칭하는 주(州)를 뜻한다. 한마디로 연해주라는 어원이 러시아식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연해주라는 말의 역사가 일천하듯 녹둔도를 포함한 연해주에 대한 러시아 민족의 진출 역시 역사적인 관점에서 일천함을 의미한다.
고요하기만 했던 연해주에서 러시아의 첫발길이 닿은 곳은 남단의 하산지역 항구인 ‘포시에트’였다. 청과 아이훈조약(1858년)을 체결하기도 전인 1856년 러시아의 범선 ‘발라다’호가 이곳에 도착했다. 당시 현지에 도착한 러시아 선원은 무엇을 봤을까.
그곳에는 이미 조선민족으로 구성된 작은 촌락이 있었고, 여러 채의 ‘팡자’도 있었다. ‘팡자’는 지금은 러시아어로 굳어진 단어로 나무를 덧대어 지은 조선식 가옥 형태를 말한다. 팡자의 어원은 널빤지를 뜻하는 ‘판자’(板子)다. 또 러시아인들은 조선사람이 땔감으로 석탄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여기에 석탄이 풍부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고 한다. 이렇듯 당시 하산지역을 포함한 연해주 일대는 러시아민족이 진출하기 이전에 조선민족이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곳이었다.
포시에트 항구 바로 옆에는 19세기 말 ‘지신허’라는 당시 연해주 최초의 조선사람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그 옛터에는 2004년 가수 서태지가 고려인의 연해주 진출을 기려 헌정한 기념비가 놓여 있다. 비문에는 ‘1863년 함경도 주민 13가구가 러시아로부터 이곳의 정착을 허락받고’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지신허는 2003년 한국외국어대 반병률 교수가 학계에 보고하면서 사실로 인정받고 있다.
지신허는 최초의 조선인 마을?
그런데 지신허라는 개념은 녹둔도를 포함해 1863년 이전의 만주권역에 대한 우리민족의 맥을 송두리째 끊어 놓는다. 청에 이어 현재 중국과도 거론되고 있는 백두산 정계비 해석의 열쇠인 토문강에 대한 논란에 있어서 조선민족의 점유권마저 부정하는 중국측 논지와 상통하기 때문이다.
우선 그 주장의 근거인 지신허 기록이 적힌 러시아의 사료가 작성될 당시 현지 정황을 보자. 1860년부터 포시에트 항구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인들은 연해주 특히 하산 지역에 대한 정보 부재와 수적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항구를 제외한 인근 지역을 탐색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쁘르제발스키’가 1867년에야 연해주 남단을 탐험할 수 있었던 것이 한 증거다.
또 당시 연해주 지역에는 마적단의 횡포가 심해 러시아인의 출입마저 통제됐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항구에 정박한지 3년이 지난 1863년에야 서서히 주변 탐색에 나섰고, 포시에트 항구 인근의 지신허에서 조선주민을 발견한 것이다. 실제 거리상 지신허 지역은 포시에트 항구와 가까워 충분히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에 있다.
그렇다면 당시 러시아인이 지신허의 조선사람을 문서기록으로 남긴 이유는 뭘까. 이는 러시아인이 조선인의 첫 이주를 허락했다고 해석하기 보다는 조선인을 통제하고 세금을 징수할 가능성을 타진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러시아 초기 정착민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농사와 지형 등 무엇보다 오랫동안 현지에서 생활해 온 조선민족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지신허 개념으로 인해 파생되는 악영향은 막대하다. 이로 인해 이미 현지 러시아인뿐 아니라 대다수 한국인이 조선민족 고려인의 연해주 역사가 1863년 가난에 찌들어 국법을 어기고 월경한 함경도 주민이었다고 인식하게 됐기 때문이다.
또 지신허는 현재 러시아 행정구역에서 같은 하산 지역에 있는 녹둔도와도 대치된다. 녹둔도는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조선이 그 지역에 대한 영토권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또 러시아가 이 지역에 진출한 이후 1937년 강제 이주가 있기 전까지 지금의 중국 연변과 마찬가지로 조선사람의 자치구였다는 의미도 띠고 있다. 때문에 지신허를 연해주 최초의 한인 마을로 인정하면 녹둔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혹자는 당시 조선 관리가 두만강 너머로 주민들의 출입을 법으로 엄격히 금했기 때문에 이런 간섭을 피해 함경도 두만강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신허에 정착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국여지도’를 보자. 아국여지도는 조선 후기 당시 조선사람의 녹둔도 진출에 대해 은밀히 알고자 했던 고종이 조선의 밀사를 파견해 제작한 것이다. 이는 당시 고종이 조선사람의 연해주 진출에 긍정적이었음을 뜻한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사람이 굳이 조선 관리의 감시를 피해 녹둔도를 버리고 지신허에 정착한다는 것이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러시아인은 지신허에 인접한 포시에트 항구에 머물렀기 때문에 지신허에서 조선사람을 먼저 발견한 것뿐이다.
일방적으로 뺏긴 것
그렇다면 19세기말 녹둔도가 조선의 영토권에서 빠진 이유는 뭘까. 두만강이 국가의 경계라면 두만강 하구에 위치한 녹둔도가 러시아쪽 육지에 붙어 있으므로 러시아 영토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필자의 취재팀은 녹둔도가 위치한 두문강 하구의 형체에 대해 지리학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지난해 가을 러시아 탐사선 ‘브니마띠르너’호를 타고 동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러시아 국경수비대를 한참 지나 러시아와 북한의 해양경계선에 도착한 뒤 작은 보트로 갈아타고 바닷물과 강물이 교차하는 두만강 최남단 하구를 탐사했다.
두만강에는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수질이 맑았다. 하지만 강폭이 좁아 인간에게 위압감을 주거나 지형적으로 국가의 경계선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웠다. 겨울에는 두만강이 꽁꽁 얼어붙어 쉽게 건널 수 있지 않던가.
조선이 녹둔도의 영토권을 상실한 것은 당시 급변했던 조선과 러시아, 중국의 관계에서 따져봐야 할 것이다. 아이훈조약(1858년), 북경조약(1860년) 등 국제협약으로 러시아는 흑룡강 유역을 포함한 연해주 지역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런 국제협약은 녹둔도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던 조선이 제외된 채 러시아와 청 사이에 체결됐다. 당시 서구 열강에 시달리던 청은 1860년 남의 영토인 녹둔도를 포함한 연해주 일대를 당사자인 조선에게는 아무런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러시아에 양도한 것이다.
이후 청은 1886년 러시아와 현재의 경계선을 확정했다. 동북3성을 중국 영토로 포함시키기 위해서였다. 결국 당시 청과 러시아는 서로 경쟁적으로 조선의 연해주를 포함한 만주에 대한 권리를 떼어갔고 이 과정에서 녹둔도는 조선의 영토에서 사라졌다.
달미 호수와 부자강 포함한다
지난 2월 서울대 지리교육과 이기석 교수와 함께 다시 녹둔도로 향했다. 첫날은 ‘활슈위’라는 해안 감시초소에서 보냈다. 여기서 이기석 교수는 “녹둔도는 섬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녹둔도는 두만강 동쪽 현재 러시아 연해주 지방의 일부분에 두만강이 오랜 기간 쌓아올린 범람원, 즉 하천하구에 발달한 범람원이라는 것이었다. 이기석 교수에 따르면 섬 모양의 낮은 평지대가 처음 생긴 것은 약 6000~1만2000년 전으로 이때부터 두만강의 흐름이 여러 차례 바뀌면서 지금과 같은 범람원 지대를 형성했다. 녹둔도는 한번도 섬이었던 적이 없는 것이다.
녹둔도가 섬이 아니라면 녹둔도는 우리가 광활한 만주로 진입하는 교두보였을 것이다. 이기석 교수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취재팀은 두만강 하구에서 북한, 중국, 러시아가 만나는 지점을 항공촬영했다. 상공에서 바라본 녹둔도는 마치 여러 섬이 모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함경북도 조산에서 녹둔도를 관찰한 조선인이 ‘세종실록지리지’에 녹둔도를 섬으로 기록할만했다.
역사적인 개념인 녹둔도를 현재 러시아 행정지도에 표기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아국여지도’의 기록에 따르면 녹둔도는 남북 70리(약 27.51km), 동서 30리(약 11.79km)로 소나무와 소금이 특산물이었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녹둔도 지역을 추정해보자. 소금이 특산물이었다는 것은 녹둔도가 조선사람의 소금구이 터였던 짠물 호수 달미(러시아 현지명은 ‘새호수’)를 포함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소나무가 특산물이었다는 점으로 미뤄 녹둔도 북단은 동쪽으로 활슈위 너머였음을 알 수 있다. 남북 70리라는 기록에서는 녹둔도 북단은 서쪽으로 조선사람이 ‘부자(富者)강’으로 불렀던 ‘레베지나강’까지 포함했을 것이다. 녹둔도의 생활권은 강으로 둘러싸인 습지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또한 두만강 하구에서 조선, 중국, 소련의 영토가 철책으로 분리된 때가 1938년 장고봉 전투 이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 중국 영토인 춘경 지대도 일부 녹둔도의 생활권에 포함됐을 것이다. 러시아 영토인 하산 지대가 저습지였던 반면 중국의 춘경 지대는 구릉 산악지대여서 당시 조선인들이 거주지로 삼고 정착하기 유리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는 녹둔도를 지리적으로 정확하게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동해 진출을 염원하며 두만강 하구에 새 항구를 건설할 태세다. 남한과 북한을 잇는 경의선이 개통되고 경원선이 연장되면서 북한의 라진, 선봉을 거쳐 두만강 하구를 통해 러시아 연해주까지 철도가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녹둔도가 조선의 개척정신을 상징하듯 이 지역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개척도 계속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