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반지의 제왕’의 ‘골룸’, ‘스타워즈’의 ‘요다’, ‘킹콩’의 ‘킹콩’. 이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두 유명한 영화배우라는 것이다. 물론 실제 배우는 아니다. 이들은 ‘디지털 액터’(Digital actor)다. 디지털 기술로 창조된 가상의 배우라고나 할까.
최근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발전하면서 실사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디지털 액터가 블록버스터 영화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디지털 액터를 실존하는 배우와 똑같이 표현할 수 있다면 굳이 실제 배우 대신 디지털 액터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배우의 출연료가 너무 비싸서 제작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디지털 액터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이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디지털 액터를 실사와 흡사하게 표현하는데 들어가는 제작비도 결코 만만치 않다. 그리고 만약 제작비가 다소 줄어들어도 실제 배우의 얼굴과 신체 정보, 목소리 등을 사용하는 한 배우의 역할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디지털 액터를 사용하는 이유가 뭘까.
실존 배우를 디지털 액터로 대체하는 대표적인 경우 중 하나는 과격한 스턴트 액션이다. 배우가 고공에서 지상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장면처럼 스턴트맨조차도 하기 힘든 고난도 스턴트나 하늘을 나는 등 아예 현실에서 불가능한 장면을 연출할 때 디지털 액터는 매우 유용하다.
건물에 처박히고 하늘로 솟고
이 경우 컴퓨터 그래픽으로 실존 배우를 그대로 재현하는 기술이 사용되는데, 이때 디지털 액터는 특별히 ‘스턴트 더블’이라는 용어에서 유래한 ‘디지털 더블’이라고 불린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니오’가 수백 명의 복제된 요원들과 격투를 벌일 때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부 컷에서 전부 디지털 더블로 대체됐다. 그들이 수십m를 날아가 건물에 처박히거나 땅을 박차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연기를 선보인 것도 디지털 더블이었기에 가능했다.
디지털 더블과 달리 실존하지 않는 캐릭터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골룸과 요다, 킹콩, ‘나니아 연대기’의 ‘아슬란’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순수한 디지털 액터다. 이들은 디지털 더블처럼 순간적으로 화면을 지나치거나 원거리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화 내내 중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대사, 표정, 몸짓 등 실제 배우의 역할을 그대로 한다. 만약 이들을 고전적인 특수촬영기법으로 제작했다면 영화에 몰입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골룸이나 킹콩은 준주연급 캐릭터로 감정 표현이나 대사 등이 영화에 등장하는 실제 배우와 비교해 거의 대등한 수준이다.
디지털 액터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점들을 고려해야 할까. 사람이나 사람과 유사한 헐크, 킹콩, 요다 등 생명체를 디지털 액터로 탄생시키는 것은 단지 겉모습을 3차원으로 만든다고 끝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3차원 스캐너를 이용해서 신체 표면의 정보만 얻어내면 그만일 테니까.
최근에는 스캐너를 통해 얻어낸 표면 정보뿐 아니라 뼈, 근육, 힘줄, 지방층, 피부 등 실제 생명체의 해부학적인 구조까지 반영한다. 디지털 액터가 조각상처럼 가만히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실감나는 표현 뒤엔 해부학이
해부학 정보를 사용하지 않고 피부의 움직임을 계산해 디지털 액터를 표현하면 특수 분장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전혀 사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관절이 움직이면 근육과 지방층의 모양이 변한다(실제로는 근육이 움직이면서 관절이 움직이지만 컴퓨터 그래픽에서는 편의상 그 반대 과정으로 해석한다). 이 모양이 시시각각 변하면서 피부 표면의 형태를 결정하기 때문에 실제 해부학적인 구조를 계산에 넣어야 가장 자연스러운 외형의 모습과 움직임을 얻을 수 있다.
설마 사람의 눈이 그 정도까지 구분해낼 수 있겠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눈은 다른 어떤 사물보다도 특히 사람의 얼굴과 몸의 형태, 움직임에 매우 민감하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하루에도 수백 번씩 상대방의 얼굴과 움직임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 그래픽으로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묘사한다고 하자. 그 낙엽이 운동방정식이나 유체방정식을 정확히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이를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사람의 얼굴 표정이나 신체 동작이 실제와 아주 조금이라도 다르게 움직이면 대부분의 사람은 금방 눈치챈다. 사람의 움직임이 자유낙하하는 물체처럼 간단한 물리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복잡한 해부학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요다가 망토 입은 이유
이런 어려움 때문에 얼굴 표정이나 몸 전체의 동작을 표현할 때는 직접 인체의 해부학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시뮬레이션하는 대신 실제 얼굴 표정이나 동작을 모션 캡처 장비로 측정해 그 데이터를 원하는 디지털 액터에 맞게 변형해서 활용하는 기법을 많이 쓴다. 실제 인간의 모습과 디지털 액터의 모습이 많이 다르더라도 측정 데이터가 자연스럽게 적용되도록 하는 것이 이 기술의 핵심이다. 대부분의 디지털 액터는 부분적으로라도 이런 방식을 활용한다. 골룸이나 킹콩은 몸에 60여개, 얼굴에는 130여개의 마커(Marker)를 부착했다고 한다.
디지털 액터가 영화 내내 샤워만 하는 것이 아니라면 디지털 액터는 옷을 입고 있어야 한다. 또 소림사가 배경인 무협영화가 아니라면 디지털 액터의 머리에는 머리카락도 있어야 한다. 옷과 머리카락 역시 매일 시각적으로 접하는 사물이기 때문에 디지털 액터에서 그 움직임이나 형태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신체의 다른 부위와 달리 옷이나 머리카락은 인간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낙하하는 물체와 같이 수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특정한 물리법칙을 이용해 움직임을 계산하면 된다.
그런데 생각처럼 간단하지만은 않다. 옷은 형태 변형이 매우 크고 충돌 처리가 굉장히 어렵다. 머리카락은 개수가 너무 많고 굵기가 가늘어 기술적으로 어렵다. ‘터미네이터 3’의 여자로봇이 짧은 머리에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니오와 요다 등이 긴 외투와 망토 등 움직임이 많은 의상을 입고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복잡한 스타일의 옷이나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장면은 영화에서 보기 힘들다.
진화하는 디지털 액터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디지털 액터의 옷과 머리카락을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기술을 가진 나라는 바로 한국이다. 오는 8월경 개봉 예정인 정우성, 김태희 주연의 무협영화 ‘중천’(中天)에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FXGear를 비롯한 연구소와 기업들이 개발한 디지털 액터 기술이 본격적으로 사용된다. 중천에 사용되는 디지털 액터는 얼굴, 근육, 동작, 옷, 머리카락 등 모든 기술을 총망라했다. 특히 옷과 머리카락에 있어서는 헐리우드의 기술보다 오히려 앞섰다는 평을 듣고 있다.
디지털 액터를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직도 많다. 현재 디지털 더블을 제외한 주조연급의 디지털 액터는 전부 동물이나 외계인 등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다. 그만큼 인간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에는 아직 기술적으로 보완해야 할 부분들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아직 디지털 액터가 100% 인간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는 인식이 남아있기도 하지만, 시각화 기술이 부족한 것이 더욱 현실적인 문제다.
외형이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표현된다고해도 디지털 액터를 영화에 출연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부분이 수작업으로 이뤄져야 한다. 영화 ‘시몬’처럼 말로 명령만 내리면 컴퓨터가 배경이나 소품, 조명 등 모든 환경을 자동으로 만들어내고 감독이 말하는 대사를 통해 연기를 하는 디지털 액터를 상상하면 안 된다. 아직은 단 몇 초 동안 디지털 액터를 연기시키기 위해 수십 명의 사람들이 수개월 동안 작업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물론 언젠가는 시몬과 같이 디지털 액터의 제작 과정이 간단해지고 출연 빈도도 높아질 것이다. 오래 전 세상을 떠난 명배우를 새로운 영화에서 다시 만나고, 나이든 배우가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연기하며, 여러 배우의 매력을 골고루 갖춘 새로운 배우가 탄생할 수도 있다. 컴퓨터와 인간이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 시대가 온다면 디지털 액터가 스스로 캐릭터를 창조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