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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ture] 오페라 무대 선 로봇 디바 ‘에버’

 

168cm 키에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핑크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성이 무대에 등장했다. 무대 중앙까지 이동한 그는 음악이 흘러나오자 노래하기 시작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나오는 ‘밤의 여왕’이다. 성악가 조수미 씨가 불러서 유명해진 그 곡이다.

 

 

완벽한 로봇 디바 ‘에버’


무대에서 아리아를 멋지게 소화한 건 사람이 아니라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이 개발한 로봇 ‘에버(EveR)’다. 에버는 인간처럼 사고하지만 외형은 영락없는 ‘기계’인 대부분의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와 달리, 피부와 얼굴까지 사람처럼 만든 안드로이드(인간처럼 생긴 로봇)다.

 

물론 에버가 직접 노래를 부른 것은 아니다. 미리 녹음해 둔 성악가의 노래를 재생하고, 그에 맞춰 입을 움직이는 ‘립싱크’였다. 몸동작은 좀 어색했지만, 표정과 입 모양은 꽤나 그럴듯했다. 가사에 담긴 의미와 각 소절의 분위기에 맞춰 표정과 동작을 취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노래의 하이라이트인 고음이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에버는 그렇게 두 곡을 열창했다.

 

3월 2일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이 공연의 타이틀은 ‘완벽한 로봇 디바, 에버’다. 세계 최초로 안드로이드가 주인공인 오페라 공연이자, 대구오페라하우스와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의 협업으로 탄생한 창작 오페라다. 완벽한 오페라 가수를 뽑는 오디션에서 인간 성악가와 에버가 대결하는 줄거리다.

 

공연을 관람한 조화연 양(대구 경명여중 2학년)은 “로봇의 연기가 인간처럼 완벽하게 자연스럽지는 않았지만 초등학교 때 봤던 로봇에 비하면 훨씬 인간에 가까워졌다”며 “공연을 보기 전에 예상했던 로봇의 모습보다 훨씬 세련됐다”고 말했다.

 

 

얼굴에 달린 23개 모터가 근육 역할

 

에버는 2006년 탄생한 국내 최초의 안드로이드다. 사람과 교감하는 서비스 로봇을 연구하기 위해 개발됐다. 개발 당시부터 얼굴에는 모터가 달려 있어 말할 때 입술을 움직이거나 기쁨이나 슬픔 등의 표정을 구현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네 차례 업그레이드를 진행하면서 이런 입술 움직임과 표정 변화는 더욱 정교해졌다. 에버 개발을 주도한 이동욱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로봇그룹장은 “공연에서 노래한 에버의 얼굴에는 사람 얼굴에 있는 23개의 큰 근육을 모사한 23개의 모터가 들어 있다”며 “이를 이용해 열두 가지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

 

 

에버가 만드는 12가지 표정은 기쁨, 슬픔, 놀람, 화남, 혐오, 두려움, 흥미, 좌절, 고통, 멍한 표정, 놀림, 윙크 등이다. 얼굴에 삽입된 23개의 소형 모터에 와이어를 달고 피부와 연결시켜서 표정을 구현한다.

 

이를 위해 연구팀은 사람의 얼굴 근육의 해부학적 배치와 얼굴 근육이 표정을 구현하는 원리를 참고해 모터와 와이어를 배치했다. 가령 양쪽 입꼬리에 와이어로 연결된 모터를 작동시켜 입꼬리를 잡아당기면 웃는 표정이 나온다.

 

 

하지만 모터로 와이어를 잡아당기는 단순한 방식으로는 섬세한 표정을 만들기 어렵다. 연구팀은 ‘얼굴움직임부호화시스템(FACS·Facial Action Coding System)’을 적용해 12가지 중 6가지 표정(기쁨, 슬픔, 놀람, 화남, 혐오, 두려움)을 구현했다.

 

FACS는 미국의 심리학자 폴 에크만이 인종과 관계없이 사람의 표정을 나타내는 방법 70가지를 분류해 부호화한 것이다. 가령 양쪽 눈썹의 안쪽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놀람’으로 분류하고 ‘1번 표정(Action Unit)’이라고 이름 붙이는 식이다. 여기에 눈썹이 움직이는 정도를 1단계(A)에서 5단계(E)까지 나눠 미세한 표정과 뚜렷한 표정을 분류한다. 연구진은 FACS에 없는 나머지 6가지 표정(흥미, 좌절, 고통, 멍한 표정, 놀림, 윙크)은 직접 고안했다.

 

사람의 얼굴 근육은 작은 근육까지 총 43개다. 근육 역할을 하는 에버의 모터는 23개로 사람의 절반 수준이다. 대신 여러 표정을 섞어 표정의 다양성을 구현했다. 예컨대 놀라고 화난 표정을 섞어서 표현하는 식이다.

 

◀ 이시구로 히로시 교수팀이 개발한 로봇 ‘에리카'. 이시구로 교수는 에리카에게 뉴스를 진행시키는 이벤트를 열 계획이다.

 

연구팀은 에버가 사람의 말을 인식한 뒤 그에 적합한 대답을 할 때 상황에 맞는 표정을 짓는 기술도 개발했다. 가령 ‘잘했어’ ‘고마워’ 등 에버를 칭찬하는 단어를 들으면 에버가 기쁜 표정을 짓도록 했다.

 

이 기술의 원리는 상대방이 말한 단어에 담긴 감정을 추출하고 변수화시킨 뒤 이를 에버의 표정에 동기화하는 것이다. 이 그룹장은 “특정 단어를 듣거나 카메라로 촬영한 주변 상황과 분위기를 인지해 기쁨과 흥분 등의 감정 정보를 추출하고, 이에 맞춰 답변을 하면서 표정을 짓는다”며 “표정도 감정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에 선 에버에는 이 기술이 적용되지 않았다. 공연에서는 시나리오에 맞춰 최적화된 표정을 구현하도록 했다.

 

에버는 향후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서비스 로봇으로 진화를 거듭할 계획이다. 식음료 매장의 점원이나 호텔 및 행사장 안내 역할 등에 활용할 수 있을 전망이다. 이 그룹장은 “사람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로봇은 사람의 감정과 의도를 인식하고 적절하게 반응하는 기술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민권 받은 ‘소피아’ 방송 진행하는 ‘에리카’


에버처럼 사람과 소통하고 반응하며 감정을 표현하는 로봇은 최근 세계적으로도 잇따라 주목받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세계 최초로 명예 시민권을 받은 로봇 ‘소피아(107쪽)’는 올해 1월 말 한국을 방문해 각종 회의와 방송에 출연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소피아는 2015년 핸슨로보틱스가 개발한 안드로이드다.

 

오드리 헵번의 얼굴을 본떴다는 소피아는 학습된 데이터를 이용해 자유롭게 대화하면서 상황에 맞는 표정 약 60가지를 지을 수 있다. 특히 눈에 카메라를 장착해 상대방과 눈을 맞추면서 상황에 따른 상대방의 반응을 기록한다.

 

이 그룹장은 “소피아의 경우 논문 등으로 기술이 공개된 적은 없다”면서 “알려진 내용으로만 보면 가슴팍에 달린 동작 인식 카메라로 상대방의 표정을 인식하는 기술과 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바라보는 기술 등을 갖췄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안드로이드가 4월 공중파에 출연해 뉴스를 진행하는 이벤트도 열린다. 이시구로 히로시(石黑浩) 일본 오사카대 교수팀이 2015년 개발한 ‘에리카’가 그 주인공이다. 에리카 역시 에버나 소피아처럼 서비스를 위해 개발된 로봇으로, 얼굴에 19개의 공압식 구동기를 넣어 상대방과 대화하면서 맥락에 맞는 표정을 지을 수 있다. 이시구로 교수는 지난해 12월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4월 중 에리카가 일본의 공중파 방송에서 뉴스를 진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불쾌한 골짜기’ 넘을 수 있을까

 

휴머노이드를 넘어 사람과 소통하는 로봇을 개발하는 일은 최근 로봇공학계의 화두 중 하나다. 특히 인공지능(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애플의 ‘시리’나 아마존의 ‘알렉사’를 뛰어넘는 AI를 로봇에 탑재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넘어야 할 ‘골짜기’가 있다. 바로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다. 불쾌한 골짜기란 로봇의 움직임이나 생김새가 사람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이 느끼는 호감도가 증가하다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오히려 강한 불쾌함을 느끼게 되는 지점을 일컫는다. 사람과 비슷하지만 어딘가 어색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닮은 정도와 로봇에 대한 호감도를 나타내는 그래프는 직선으로 계속 증가하다가 이 시점에서 갑자기 곤두박질 쳐 골짜기 같은 모양을 나타낸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불쾌한 골짜기를 지나 인간과 거의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로봇의 외모와 움직임이 비슷해지면 다시 호감도는 상승한다. 이 그룹장은 “사람은 대화할 때 감정에 따라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는데, 로봇은 그렇지 않아 불쾌한 골짜기가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핸슨로보틱스에서 개발한 로봇 ‘소피아’ . 질문에 응답하면서 60여 가지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소피아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명예 시민권을 받기도 했다.

 

 

에버와 소피아, 에리카도 현재 불쾌한 골짜기 어딘가에 있다. 에리카의 경우 외모만 놓고 보면 가장 완성도가 높지만, 말투가 어색하고 불편하다. 이 그룹장은 “에버를 포함해 안드로이드 연구는 현재 불쾌한 골짜기를 넘기 위한 과정에 있다”고 말했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은 불쾌한 골짜기를 넘을 수 있도록 두 가지 연구를 진행 중이다. 우선 AI를 활용하는 방식은 사람의 표정을 AI가 학습한 뒤 로봇의 모터를 무작위로 작동시켜서 사람의 표정과 가장 흡사한 표정을 찾아내는 기술이다. 이는 에버의 표정 구현에 적용했던 얼굴움직임부호화시스템과는 다른 접근법이다. 현재 에버의 행복한 표정은 AI가 학습한 사람의 행복한 표정을 절반 정도 구현한 수준이다.

 

연구팀은 시선 처리도 최대한 사람에 가깝게 만드는 중이다. 사람이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는 경우는 약 20%에 불과하며 대부분 입이나 목, 주변을 바라본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연구팀은 에버와 대화하는 사람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대화 알고리즘을 수정하고 있다. 이 그룹장은 “가을에는 에버에 대화용 AI를 탑재해서 인간과 에버의 대화를 시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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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대구=최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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