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어느날 울산 부근의 한 단층대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감지된다. 지층이 어긋나 있는 이곳 단층대가 평소보다 크게 움직인 것. 흥미로운 점은 지층의 이동을 먼저 잡아낸 곳이 기상청 지진관측소가 아니라 별을 보는 천문대라는 사실이다. 한국천문연구원 연구진이 울산대, 연세대, 탐라대에 위치한 전파망원경으로 우주에서 가장 멀리 있는 천체라는 퀘이사를 동시에 관측하다가 단층대의 움직임을 알아낸 것이다. 다행히 지층의 이동은 지진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라는 게 밝혀진다.’
이것은 2007년 구경 21m 전파망원경이 울산대, 연세대, 탐라대 3곳에 각각 설치된 후 3대의 전파망원경이 한국우주전파관측망(KVN)을 구성할 때 벌어질 수 있는 가상시나리오다. 가상으로 꾸며본 내용이지만 천문대에서 망원경으로 별만 보진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얘기다.
지구보다 큰 망원경을 만들자
영화 ‘콘택트’에는 여주인공(조디 포스터 분)이 헤드폰으로 우주전파에 귀를 기울이며 외계신호를 추적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주전파가 가청주파수가 아니기 때문에 이 장면은 ‘옥의 티’지만 여주인공의 배경을 장식한 거대 안테나들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커다란 접시가 달린 이들 안테나 하나하나는 실제 구경 25m짜리 전파망원경이다.
이런 전파망원경이 미국 뉴멕시코주 해발 2100m가 넘는 지역에 27대나 설치돼 있다. 27대의 전파망원경이 Y자 모양으로 배열돼 있는 이 시스템은 VLA(Very Large Array)라 불린다. VLA의 목적은 2대 이상의 망원경을 이용해 커다란 망원경 한대의 효과를 내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50km 떨어져 있는 2대의 전파망원경으로 하나의 천체를 동시에 관측하면 구경 50km짜리 초대형 전파망원경의 성능을 얻을 수 있다. 망원경이 커지면 그만큼 가까이 붙어 있는 두 천체를 구별해낼 수 있는 능력인 분해능이 좋아진다.
VLA 같은 전파망원경 시스템은 전파간섭계라고 한다. 전파간섭계는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전파망원경 사이의 거리가 수백m~수십km인 ‘전파망원경 배열’과, 망원경 간 거리가 수백~수천km인 ‘초장기선 전파간섭계’(VLBI)가 그것이다.
VLBI의 대표적 예는 미국 본토, 하와이, 버진 아일랜드에 있는 구경 15m 전파망원경 10대를 연결한 VLBA와, 유럽 대륙에 흩어져 있는 18대의 전파망원경을 하나로 묶은 EVN이다. 미국의 VLBA, 유럽의 EVN을 일본의 인공위성 HALCA와 연결하려는 계획도 진행 중이다. 놀랍게도 이렇게 구현될 전파망원경은 지구 전체보다 크다.
한국 KVN, 미국 우주망원경보다 뛰어나
한국천문연구원이 준비하고 있는 KVN은 대한민국 전체를 초대형 전파망원경으로 이용하려는 VLBI형 전파간섭계다. 연세대, 울산대, 탐라대에 설치할 3대의 전파망원경을 이용한다. 이 조합은 연세대와 탐라대 사이의 거리가 480km로 가장 길어 분해능은 지상 최대의 광학망원경보다 약 1000배 뛰어날 전망이다.
KVN이 완공되면 일본국립천문대(NAOJ)의 전파망원경(VERA)과 네트워크로 연결돼 공동 운영될 예정이다.
KVN 같은 VLBI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허블우주망원경보다 수십배나 높은 분해능으로 우주의 신비를 밝힐 수 있다. 우주 전파는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과 달리 기상조건이 썩 좋지 않아도 망원경에 포착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VLBI를 이용하면 먼 우주에서 태양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상을 고해상도 자료로 연구할 수 있다.
매우 강하게 전파를 뿜어내는 ‘활동성 은하핵’이 VLBI의 대표적 관측 대상이다. 활동성 은하핵은 우주에서 가장 멀리 있는 천체(퀘이사)로 그 정체는 초대형 블랙홀이라고 추정된다. 최근 천문학자들은 VLBI를 이용해 활동성 은하핵에서 빠른 속도로 나오는 물질의 흐름(제트)을 전파에서 관측하고 있다.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미세 구조도 발견하고 있다.
VLBI는 가스와 먼지가 고밀도로 뭉쳐 있는 성간구름, 성간구름에서 막 태어난 별들, 무거운 별이 최후에 폭발하는 단계 등에서 쏟아지는 전파를 관측한다. 높은 분해능 덕분에 이들 천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볼 수 있다. 이들은 KVN의 연구대상이기도 하다.
KVN 같은 VLBI는 우주 천체를 정밀하게 관측하는 게 기본 목표이다. 하지만 이를 역으로 이용하면 지구상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즉 VLBI를 구성하는 여러 대의 전파망원경으로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는 천체를 동시에 관측하면 각 전파망원경 사이의 거리를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다. 측정 정밀도는 지상에서 수천km의 거리를 수mm 단위까지 알아낼 수 있을 정도다.
지축의 흔들림도 정밀 측정
예를 들어 퀘이사 같은 우주 천체에서 출발한 전파가 VLBI에 속한 각 전파망원경에 도착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위 그림). 동일한 전파가 각 전파망원경에 도달하는 시각은 망원경의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전파가 도착하는 시각에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이 차이는 전파망원경 사이의 거리를 반영한다. VLBI는 이런 시간 차이를 정밀하게 측정함으로써 각 전파망원경 사이의 거리를 수mm의 정확도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파악된 전파망원경의 위치는 국가의 지도 제작과 관련해 위치를 정밀 측정하는 측지기준점으로 활용될 수 있다. 전파망원경이 놓여 있는 지각의 움직임도 정밀하게 알아내는 작업이 가능하다. 중국이나 일본에서의 지각 움직임은 많이 측정돼 왔지만, 한반도와 그 주변의 지각 운동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한반도는 유라시아 지각판 가장자리에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울산 단층대(지구대), 옥천 지구대 등이 별도의 판으로 분리되는지는 아직까지 수수께끼다. KVN의 경우 울산대에 설치될 전파망원경이 관심의 초점이다. 이 망원경의 위치를 계속 모니터하면 울산 단층대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VLBI를 이용하면 지구 자전축의 흔들림이나 자전주기의 변화도 파악할 수 있다. 특정 지점의 경도와 위도를 정확하게 파악함으로써 북극점과 남극점을 잇는 자전축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 자전축은 10년에 약 150m씩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면 특정 위치가 얼마 만에 한바퀴씩 자전하는지, 즉 지구의 자전주기를 알아낼 수 있다. 이는 지구 자전속도가 느려져 1초를 더해줘야 하는지, 우리나라 시각을 결정하기 위해 기준이 되는 세계시가 몇 시인지 등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차량항법이나 지진, 천문연구원에 물어봐
VLBI가 지상 위치를 측정하는 정밀도는 다른 어떤 수단으로도 따라올 수 없다. 차량항법장치 덕분에 일반인에게 친숙해진 위성항법시스템(GPS)보다 훨씬 더 높다. 일반적인 GPS의 위치 측정 정밀도는 평균 10m이고 최대 1m 가량에 불과하다.
하지만 VLBI를 이용한 위치 측정 방법은 GPS에 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VLBI는 각 전파망원경으로 하나의 천체를 동시에 관측할 때 각각의 관측 자료를 자기 테이프나 디스크에 따로 기록한다. 이 자료는 나중에 한곳에 모아 합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최종결과를 얻기 위해 보통 관측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이 든다. 이에 비해 GPS를 통한 위치 측정법은 매우 빠르고 간편하다.
VLBI는 GPS를 든든하게 뒷받침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세계 각국에서는 정기적으로 VLBI 공동 관측을 통해 측량 원점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 기준을 잡은 다음, GPS를 이용해 이 원점으로부터 상대적 위치를 측정하고 있다. VLBI와 GPS의 공조 덕분에 지도 작성, 지각운동, 지구 물리 등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가능하다.
우리나라 국제 GPS 좌표기준점은 천문연구원 내에 설치돼 있다. 천문연구원 우주측지연구그룹은 대한민국 전역에 독자적인 GPS 상시관측망을 운영하고 있다. 천문연구원은 올해부터 세계 4번째이자 아시아-오세아니아 권에서는 최초로 국제 GPS 관측망의 데이터센터로 출범했다.
현재 건설이 순조롭게 진행 중인 KVN이 GPS와 결합할 때 한반도 지각운동, 지구자전 등에 대해 초정밀 관측이 가능하다. 그러면 일상생활과 밀접한 차량항법, 측량, 지진 방재 등에 대한 연구능력도 한단계 향상될 전망이다.
▼관련기사를 계속 보시려면?
별을 넘어 인간을 보는 천문학
기획1. 전파망원경으로 한반도 지각변동 잡아낸다
기획2. 우주날씨예보가 나온다
기획3. 대형망원경 기술로 핵융합에 도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