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 문맹 소녀인 프랑스의 잔 다르크가 노련한 영국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정답은 대포라는 신기술 덕분이다. 잔 다르크는 전장에 포를 설치하는 능력이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당시 활과 석궁으로 무장했던 영국군은 대포의 활약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여기서 유래한 ‘잔 다르크 신드롬’은 신기술이 등장하면 젊은이가 늙은이를 제치고 중요한 업적을 남기는 현상을 뜻한다.
‘과학과 기술로 본 세계사 강의’는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의 과학기술에 대한 내용을 집대성한 책이다. 고대 문명기를 거쳐 그리스에서 과학이 지식의 한 분야로 자리 잡은 뒤 비잔틴, 페르시아, 중국, 인도 등 여러 제국에서 독자적 과학연구의 전통이 발전한 과정을 조명한다.
11세기까지만 해도 경제적, 기술적 측면에서 불모지나 다름없던 유럽은 고밀도 농업 방식이 정착된 뒤 복잡한 기계장치와 동력원에 대한 개발이 급속도로 진전하면서 역사의 주도권을 잡게 됐다. 저자들은 그 이유를 16, 17세기 유럽의 과학혁명에서 찾고 있다.
이들은 “중세 유럽은 인간의 근력을 주요 동력으로 하지 않은 최초의 문명”이라고 말한다. 유럽인들은 수차, 톱니바퀴 장치, 풍차, 투석기, 제분기 등 많은 기계와 동력원을 연구했다는 것이다. 자연을 인간이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세계관도 한몫 거들었다. 물론 이 세계관은 근대 이후 많은 부정적 결과도 낳았다.
저자들은 특히 인류 역사의 오랜 기간 동안 기술이 과학에 미친 영향을 강조한다. 과학자보다 숙련된 장인들의 혁신이 과학의 발전에 더 크게 기여했고, 과학이 기술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은 극히 최근의 경향일 뿐이라는 말이다. 나아가 “기술 혁신은 과학이론에 아무것도 빚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천문학, 수학, 농학 등 개별 학문에서 높은 성취를 이뤘지만 이들을 통합한 ‘과학’이란 개념은 갖지 못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많은 과학자들의 연구가 과학기술의 새로운 전통을 발전시켜 나갔다.
18세기까지도 전문적인 기술자의 영역으로 남아있던 기술은 19~20세기에 이르러 전기학, 열역학 등 새로운 과학으로 발전하고, 권력이 과학의 실용적 잠재력에 눈을 뜨며 오늘날의 과학기술 문화를 낳았다.
이 책은 방대한 분량에 걸쳐 서양 과학 외에도 아프리카, 중동, 동아시아와 콜럼버스 이전 아메리카의 과학기술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무미건조해지기 쉬운 과학기술의 발전 과정을 흥미진진한 역사적 사건과 결합시켜 지적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한다. 과학기술의 역사를 포괄적이면서도 명쾌하게 다뤘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아 2000년 세계역사학회 최고도서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