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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내 잉크가 너의 숨을 쉬게 하리라

배기가스로 만든 친환경 잉크

동네 골목길 담벼락에 아무렇게나 그려진 벽화를 예술이라 말할 수 있을까. 미술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던 장미셸 바스키아가 미국 뉴욕 빈민가에 그린 벽화가 지금은 경매에서 최고가에 팔릴 정도이니, 그림에 따라서는 낙서 같은 벽화도 예술이나 상품이 될 수 있는 모양이다.

 

국내에서 벽화라고 하면 벽화마을부터 떠오른다. 마을의 역사 등 스토리가 담긴 공공미술의 영역인 경우가 많다. 경남 통영시 ‘동피랑 마을’은 서민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달동네가 지역 예술가들의 손을 거쳐 벽화마을로 재탄생한 경우다. 골목길을 따라가면 물고기, 동백꽃 등 아름다운 벽화가 펼쳐진다.

 

지난해 3월 싱가포르 아티스트인 탄 지 시 씨가 에어잉크로 싱가포르 오차드로드에 벽화를 그렸다.

 

반면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대도시 뒷골목이나 외곽의 담벼락, 지하철 플랫폼이나 터널 벽에 그래피티(graffiti·스프레이 페인트로 낙서처럼 그린 그림)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래피티는 1960년대 후반 미국 뒷골목에서 대표적인 길거리 문화로 출발해 정치인 풍자 등 사회 비판적인 색채가 강하다. 검정색 한 가지만 쓴 어두운 느낌의 그래피티가 많은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

 

그런데 최근 뉴욕을 중심으로 ‘특별한 그래피티’가 퍼지고 있다.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그래피티보다 색채가 훨씬 어둡다. 하지만 그림의 소재와 내용은 더 없이 밝고 희망적이다. 이 그래피티에는 페인트로 자동차 배기가스를 쓴다.

 

대기오염 지독한 뭄바이 여행이 계기


인류 최초의 미술가가 석회석 조각으로 동굴 벽에 그날 잡은 짐승과 사냥 과정을 그림으로 남겼다면, 21세기에는 환경 보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배기가스를 모으는 사람이 있다. 2013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에서 유동계면을 연구하는 박사과정 연구원이었던 아니루드 샤르마(Anirudh Sharma) 씨는 인도 뭄바이로 여행을 갔다가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혼탁한 공기 때문이었다.

 

뭄바이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대기오염이 심각한 도시다. 벽돌공장, 옷공장은 물론 가정집에서도 연료가 타면서 생긴 연기를 그대로 길거리에 배출하고 있었다. 샤르마 씨가 특히 참기 어려웠던 점은 길거리에서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자욱해지는 매연이었다. 그래서 그가 매일 입을 만큼 좋아하는 흰색 티셔츠는 반나절 만에 검어졌다.

 

“세계은행(World Bank) 보고서에 따르면 뭄바이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에서는 매년 어린이 140만 명이 대기오염으로 사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기오염 적합도 테스트를 거치지 않은 디젤 자동차가 전 세계적으로 1100만 대가 넘습니다.”

 

샤르마 씨는 과학동아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는 뭄바이의 대기오염을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는 신발에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넣어 시각장애인에게 현재 위치와 목적지까지 가는 경로를 음성과 진동으로 안내하는 ‘스마트 슈즈’를 개발하는 등 촉망받는 공학자였다.

 

뭄바이 여행을 다녀온 이듬해인 2014년부터는 자동차 배기가스 연구에 몰두했다. 배기가스를 감지하고 수집하는 기술을 연구해 2015년 배기가스에서 인체에 유해한 성분을 분리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2016년에는 뜻이 맞는 동료 3명과 아예 ‘그래비키 랩스(Graviky Labs)’라는 회사를 차렸다. 그는 오염물질 포획 방법 연구를 맡았고, 각각 3D 프린팅을 개발하고 컴퓨터 시뮬레이션 기술을 담당하는 등 역할을 나눴다.

 

샤르마 씨는 배기가스를 포집하기 시작한 계기에 대해 “지오데식 돔(삼각형으로 표면을 만든 반구형 건축물)으로 유명한 미국의 건축가 버크민스터 풀러의 말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풀러는 ‘오염물질은 우리가 수확하지 않는 자원이다. 우리가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그냥 흘려버린다’고 말한 바 있다. 샤르마 씨는 “대기오염 물질도 쓸모를 몰라 공기 중에 흘려보내거나 골칫덩어리로 여길 수 있다”며 “배기가스를 잘 모으면 훌륭한 자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자동차 배기구에 직접 달아 오염물질을 모으는 장치는 이미 개발됐다. 이런 장치는 기체 상태인 매연을 액체 상태인 물에 녹여 포집하는 방식을 쓰는데, 공정이 복잡해 효율성이 떨어지고 생산 단가가 비싸다는 단점이 있다. 개발도상국에서 자동차마다 이 장치를 부착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는 물에 녹이는 대신 정전기로 오염물질을 끌어당겨 포집하는 방법을 떠올렸다. 배기가스가 배출될 때 정전기를 발생시켜 가스 입자를 끌어당기는 원통형 장치인 ‘카알링크(Kaalink)’가 그 결과물이다. 카알링크를 디젤 자동차의 배기구에 끼우면 배기가스를 가루 상태로 포집할 수 있다. 특히 인체에 유해한 것으로 알려진 지름 2.5μm(PM 2.5) 이하인 초미세먼지도 포집된다.

 

 

그는 카알링크로 배기가스 1조6000억 L(리터)를 모아 여기서 매연 입자 약 1.6kg을 얻었다. 그는 매연 입자를 모아놓으면 기존 검정색 안료보다 훨씬 검다는 사실을 깨닫고, 매연 입자로 잉크를 만들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에어잉크 150L=공기 200억L 정화 효과


샤르마 씨는 카알링크부터 업그레이드 시켰다. 배기가스에서 매연 입자를 모은 뒤 중금속 등 인체에 유해한 발암 물질은 걸러내고 탄소 입자만 남겼다. 이후 탄소 입자들은 화학공정을 거쳐 걸쭉한 잉크와 물감으로 바뀌었다. 배기가스 입자가 인체에 무해한 ‘에어잉크(Air-Ink)’로 탈바꿈한 것이다. 디젤 자동차 한 대에 카알링크를 끼우고 배기가스를 약 45분 동안 모으면 에어잉크 30mL를 얻을 수 있다. 이 정도면 만년필 한 자루를 가득 채울 수 있다.

 

홍콩의 셩완 거리에서 아티스트인 호 만 웨이 씨가 에어잉크를 이용해 벽화를 그리고 있다.

 

그래비키 랩스가 생산하는 에어잉크는 총 5종이다. 마커 형태로 개발해 쓰기 편리하다. 배기가스를 각각 130분간 포집해 만든 마커(굵기 약 15mm와 약 50mm), 50분간 모아 만든 마커(굵기 약 2mm), 40분간 모아 만든 마커(굵기 약 0.7mm), 그리고 830분간 모아 만든 200mL 대용량 잉크도 있다. 즉, 19시간 40분 동안 배출되는 배기가스를 모으면 에어잉크 한 세트를 만들 수 있다. 샤르마 씨는 “잉크 150L를 만들면 공기 200억L가 깨끗해지는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현재 그래비키 랩스는 옷이나 신발에 사용할 수 있는 염색물감과 잉크젯프린터용 잉크도 연구 중이다. 개발에 성공한다면 누구나 집에서 배기가스로 만든 잉크로 서류를 인쇄할 수 있게 된다. 샤르마 씨는 “처음에는 자동차 매연을 줄여보자는 생각에서 에어잉크를 만들기 시작했다”며 “지금은 사람들이 에어잉크를 통해 환경보호의 중요성을 깨닫고 오염물질도 줄이는 효과를 낳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래비키 랩스가 에어잉크를 만드는 과정과 에어잉크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제작해 유튜브에 공개하자 전 세계 예술가와 환경운동가들이 연락해왔다. 지난해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예술가들이 에어잉크로 벽화, 캔버스 유화, 캘리그래피 등을 그려 전시회를 열었다. 뉴욕, 시카고, 영국 런던 등 수많은 길거리 화가들도 에어잉크로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샤르마 씨는 “대기오염 예보가 떠 있는 모니터에서 ‘PM2.5’ ‘PM10’ 등 미세먼지 농도를 보면 이제는 안료용 재료로 보인다”며 “머지않은 미래에 에어잉크로 신문이나 광고지를 찍고 싶다”고 말했다.

2018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이정아 기자
  • 사진

    아니루드 샤르마(Anirudh Sharma), 그래비키 랩스(Graviky La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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