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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악플 다는 누리꾼 마음 엿보기

최근 한 사회운동가의 개인적 불행을 다룬 인터넷 기사에 소위 ‘악플’이라 불리는 악의적 댓글을 올린 사람들이 기소되면서 우리의 댓글 문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특정 기자의 글이나 사회 지도층 인사에 관한 기사에 정기적으로 붙는 악의적 댓글, 실언을 하거나 실력이 미숙한 연예인에 대한 모욕성 댓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나 배우의 연인 또는 라이벌 스타에게 가해지는 질투성 댓글, 심지어 국가대표 축구선수에 대한 인신공격성 댓글에 이르기까지 온라인에 등장하는 악의적 댓글은 규모가 방대할 뿐만 아니라 종류 또한 다양하다.

악플러들이 별다른 제재 없이 ‘표현의 자유’를 즐기는 동안 악플의 희생자들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며 심한 경우 대인불안이나 우울증이 생겨 정신치료를 받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악플의 폐해가 심각한데도 왜 사람들은 악플을 계속 만들어낼까? 이에 답하려면 먼저 사이버 공간에서 댓글이 왜 그렇게 성행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안티 공격으로 댓글 30만 건

‘○○○ 지식인’, ‘○○ 까페’ 같은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유명해진 포털 사이트들은 하루 100만 명 이상이 이용한다. 이런 사이트들에는 실로 방대한 양의 댓글이 올라온다. 어떤 사이트는 하루 12만 건 이상이란 통계도 있다. 그룹사운드에서 솔로로 전향한 한 가수의 경우 그를 비난하는 ‘안티’의 집중 공격을 받아 무려 30여만 개의 댓글이 올라왔다.

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만들어내는 핵심 원인은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지닌 본질에서 찾을 수 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신문이나 잡지 같은 매체는 이용자가 해당 매체와 직접 상호작용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돼 있다. 그러나 인터넷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크게 받지 않으면서 댓글이라는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매체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때문에 사람들의 참여욕구를 ‘즉각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유용한 수단이 된다.

온라인 게시판이나 토론방에 자신이 올린 메시지는 오랜 기간 유지되고 많은 사람들이 보기 때문에 메시지가 노출되는 효과도 크다. 이외에도 댓글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싶은 욕구, 반대의사를 표명하려는 욕구, 자신의 독립성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 등을 충족시켜주는 수단이 된다.

하지만 댓글은 언제든지 악플이라는 괴물로 둔갑할 수 있다. 오프라인과 달리 온라인에서는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제스처나 시선 접촉, 복장, 얼굴 표정, 음색, 대화 당사자의 몸집이나 환경 정보 같은 사회적 맥락을 나타내는 단서들이 극히 제한돼 있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 당사자들이 주의를 기울이는 초점이 대화의 상대방이 아닌 자신에게로 향하고, 대화의 규범이나 에티켓에 대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오프라인에서는 서로에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관해서 대체로 합의된 기준을 갖고 있어서 이 기준에 따라 상호작용이 이뤄진다. 반면 온라인에서는 이런 절차가 잘 일어나지 않거나 생략된다.

결국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본질 자체가 창피함이나 배척의 두려움 없이 악의적 댓글을 생산해내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는 오프라인에 비해 온라인에서 교환되는 메시지들이 더 극단적이고 위험을 무릅쓰며 공격적이라는 연구결과와도 일맥상통한다.

‘불지르기’(flaming)에 관한 사회심리학 연구가 악플 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불지르기란 특정 개인이나 조직에 해를 끼치려는 의도로 온라인에서 적대적, 모욕적, 음란성 발언들을 내놓는 행위다. 불지르기는 유즈넷 그룹의 게시판, 인터넷 포럼, 토론방에서부터 기업의 컴퓨터 기반 의사결정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발생한다. 이로 인해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질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개인이나 조직이 피해를 입기도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연예인을 싫어하는구나. 나도 한 마디 할까? 나쁜 말을 써도 내가 했는지 알게 뭐야.' 익명성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악플러들이 최근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적극 대응할수록 상황 나빠져

온라인에서의 불지르기는 사용자의 인구통계적 특성이나 동기 같은 요인들에서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면 여성보다는 남성에게서, 장년층보다는 젊은층에서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또한 자신의 견해, 신념, 태도를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통제와 세력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불지르기는 경쟁욕구나 타인을 지배하려는 세력욕구가 특히 강한 사람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자극추구 욕구가 매우 높은 사람들은 따분함이나 지루함을 싫어하기 때문에, 거기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불지르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불지르기나 악플은 이처럼 생산자의 다양한 동기와 관련돼 있기 때문에, 표적이 적극적으로 대응하면 오히려 악플러에게 욕구충족의 계기를 추가로 제공하는 셈이 돼 상황이 악화될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개인적 요인들이 불지르기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기는 하지만, 현재까지 불지르기 현상을 분석하는 지배적인 관점은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익명성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이용자들의 아이디(ID)나 대화명은 스스로 타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한 거의 완벽한 익명성을 제공한다. 심지어 실명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여전히 낮기 때문에 익명성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

온라인에서 보장되는 높은 익명성은 사용자에게 ‘몰개인화’라는 심리상태를 초래한다. 원래 몰개인화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군중 속에 있을 때 경험하는 익명성 때문에 자아정체성을 상실하는 현상을 설명하는데, 이는 온라인에서도 적용된다.

그 결과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감찰하거나 그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지를 덜 염려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평가할 수 있다는 인식도 줄어든다. 이같은 심리상태가 비이성적, 반규범적 행위를 촉발시켜 불지르기나 악플로 이어지는 것이다.
 

어떤 누리꾼은 '가면'을 쓰고 유명인사를 집요하게 공격해 대리만족을 얻는다. 실제로 만나면 그러지 못할텐데 말이다. 사이버 공간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니다. 가면, 즉 ID나 대화명에 가려진 또다른 나다.


평등주의와 집합주의가 만든 악플

온라인이 아니더라도 익명성과 비이성적 행위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자살이나 비이성적 행동을 부추기는 이른바 ‘부추김 군중’은 대부분 밤중에 등장한다. 또 문화인류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왓슨이 23개 문화권의 문헌들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얼굴에 문신을 하거나 색깔을 칠해서 정체를 숨기고 전쟁터에 나간 병사들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포로를 살해하거나 고문하는 가혹행위를 더 많이 했다.

온라인에서는 대화 당사자들이 지리적으로 분산돼 있기 때문에 신체적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서로를 마음대로 공격할 수 있어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거나 과격한 행동을 억제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오프라인보다 불지르기나 악플이 더 악화되는 이유다.

그러나 최근에는 온라인에서 몰개인화가 항상 부정적 행위만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관점도 나왔다. 몰개인화가 무조건 반사회적 행동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며, 해당 상황에서 특출한 규범이 친(親)사회적이면 몰개인화는 오히려 친사회적 행동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보고도 있다. 즉 익명성의 효과는 상호작용 당사자들이 속해 있는 집단과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사회적 맥락에 따라서 달라진다. 예를 들어 특정 토론방이나 유즈넷 그룹의 지배적인 규범이 불지르기나 악플 행위에 반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경험하는 몰개인화로 인해 오히려 그런 비이성적 행위를 덜할 수도 있다.

사회 지도층 인사나 유명 연예인을 표적으로 만들어지는 악플은 한국사회에 만연해 있는 무조건적 평등주의와도 무관하지 않다. 즉 부나 명예, 학식 같은 면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사람들이 바람직하지 못한 일에 연루된 사회 지도층 인사나 연예인을 집요하고 강도 높게 공격함으로써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고, 권위의 추락이나 전복이 주는 쾌감을 맛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소위 ‘집합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의 문화 역시 악플의 심리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유명 포털 사이트나 인터넷 신문에서 특정 표적에 대한 비판적 댓글이 주를 이룰 경우, 집합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에서는 쉽게 다수의 의견에 동조할 뿐만 아니라 비판이나 비난의 수위도 점점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다.

익명성 나쁘지만은 않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있다. 악플이나 불지르기를 전적으로 개인의 행위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일종의 집단행동으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참여자들 각각을 중요하게 여기는 소규모 뉴스그룹이나 토론방과 달리 불특정 다수가 참여하는 인터넷 대중매체나 포털 사이트에서는 참여자들 간에 ‘내편-네편’이라는 편 가르기 현상이 쉽게 촉발될 수 있다.

이런 구분을 토대로 대화가 이뤄지기 때문에 공격적이거나 극단적인 메시지들이 그만큼 쉽게 구성되고 표출되는 것일 수도 있다.

정부는 이미 대형 포털 사이트와 주요 게시판에 대해 실명제를 실시하겠다고 공표했다. 대다수의 누리꾼이 이를 환영하는데도, 일부 누리꾼 사이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욕설 사이트나 악플 커뮤니티가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리는 역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온라인에서 경험하는 익명성은 타인의 평가에 대한 우려를 감소시켜서 적극적이고 솔직한 의사 표현을 이끌어내고 창의적 아이디어가 나오도록 촉진하는 긍정적 기능도 지니고 있다.

악플이나 불지르기는 익명성이라는 단 하나의 원인으로만 생겨나는 현상은 아니다.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특성, 개인의 동기, 성격, 상호작용 맥락 등이 모두 영향을 미치는 매우 복잡한 현상이다. 따라서 이 요인들에 대한 통합적 이해 없이, 무조건 익명성만 없애면 온라인에서 이성적 글쓰기 문화가 생겨나리라고 기대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온라인이 제공하는 익명성이 골칫거리만은 아니다. '가면'을 쓰고 솔직하고 적극적인 의견을 제시하거나 남몰래 선행을 하는 누리꾼도 있다.
 

2006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최훈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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