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팅하기로 한 날. 약속 장소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거울을 보고 화장이 잘 됐나 살펴본다. 친구가 웃으면서 한 마디 한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 되니? 대충 해.” 살짝 기분이 상하지만 맞는 말이긴 하다. 여기서 호박은 평범한 내 얼굴, 수박은 예쁜 얼굴을 말한다.
그런데 호박에 줄그어 수박을 만들 수 있는 과학자가 있다. 여기서 호박은 둥글고 넓적한 누런 호박처럼 생긴 화합물이다. 이름은 ‘쿠커비투릴’(cucurbituril). 영어로 호박을 비롯한 박과식물을 뜻하는 단어인 ‘쿠커빗’(cucurbit)에서 따왔다.
과학이 어떻게 쿠커비투릴을 ‘수박’으로 변신시킬까.
쿠커비투릴이 논문에 처음 보고된 건 1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이 물질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알 길도 없었다. 그 뒤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쿠커비투릴은 점점 잊혀져갔다.
호박 분자의 추억
1981년 미국 유기화학자 윌리엄 목 박사가 우연히 이 논문을 발견하고 쿠커비투릴을 합성해봤다. 그때는 화학물질의 구조를 분석할 수 있는 X선회절법이 개발돼 있었다. 이 방법으로 목 박사는 쿠커비투릴이 호박처럼 생겼고,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다음으로 쿠커비투릴과 인연을 맺은 과학자는 김기문 교수. 미국 스탠포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1988년 포항공대 화학과로 부임한 김 교수는 남들과 다른 새로운 연구 분야를 찾고 있었다. 그때 목 박사 이외에 이렇다 할 전문가가 없던 쿠커비투릴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많은 화학자들이 분자와 분자가 직접 붙어있지 않으면서도 서로 분리되지 않는 분자집합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죠. 로택산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로택산은 고리처럼 생긴 분자가 막대처럼 생긴 분자에 끼워져 있는 모양의 화합물이다. 막대의 양끝은 커다란 매듭처럼 생겨 고리 분자가 빠져나가지 못한다. 과거 화학자들은 전통적인 유기화학 반응으로 로택산을 만들어 보려고 시도했지만 녹록치 않았다. 고리와 막대 분자를 따로따로 만들어 놓고 막대가 고리에 ‘우연히’ 끼어들어가기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들어 화학자들은 수소결합이나 반 데르 발스 힘처럼 분자와 분자 사이에 작용하는 약한 인력을 이용해 로택산을 합성하는데 성공했다. 고리와 막대 분자가 약한 인력으로 서로를 끌어당기게 한 것. 그 결과 막대에 고리를 여러 개 끼운 폴리로택산도 만들 수 있게 됐다.
보통 분자를 이루고 있는 원자들 사이에는 강한 화학결합, 즉 공유결합이 형성돼 있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분자 간 인력은 이보다 훨씬 약하다. 그래서 막대 분자에 끼워진 고리 분자는 왔다갔다 움직일 수도 있다. 화학자들은 이렇게 ‘유연한’ 결합을 응용해 막대와 고리뿐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의 분자집합체를 고안해내기 시작했다. 이런 분자집합체를 초분자라고 부른다.
김 교수는 쿠커비투릴로 로택산을 만들어봤다. 즉 짧은 막대처럼 생긴 분자를 쿠커비투릴의 구멍에 끼워 넣은 것. 이런 형태를 금속이온으로 이어붙여 폴리로택산도 만들었다. 마치 긴 막대에 사탕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는 것 같은 새로운 모양의 화합물이 된 것이다. 김 교수는 이를 1996년 미국화학회지에 발표했다. 미국화학회는 자체 발간하는 소식지에 김 교수의 논문을 하이라이트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성과로 김 교수팀은 다음해 과학기술부 창의적연구진흥사업단에 선정됐다.
두 단계 업그레이드
더 다양한 쿠커비투릴 초분자를 만들려면 쿠커비투릴 자체의 모양을 바꿔볼 필요가 있었다. 쿠커비투릴은 6개의 조각으로 이뤄져 있다. 예전에 목 박사는 쿠커비투릴은 이런 모양으로만 만들어진다고 보고했다. 김 교수팀은 여기에 의문을 품었다. 그래서 쿠커비투릴을 합성할 때 온도를 조금 낮춰 반응시켜봤다. 그 결과 5개, 7개, 8개 조각으로 이뤄진 여러 가지 쿠커비투릴 동족체가 만들어졌다. 목 박사는 보통 높은 온도에서 반응시켰기 때문에 가장 안정한 상태인 조각 6개짜리 쿠커비트릴만 얻을 수 있었던 것.
연구단은 2000년 미국화학회지에 이 내용을 발표하고 쿠커비투릴 동족체에 대한 미국 특허를 획득했다. 많은 조각으로 이뤄질수록 쿠커비투릴은 더 유연해질 뿐 아니라 구멍도 커진다. 따라서 다루기 쉬워지고 구멍에 더 큰 분자들까지 끼울 수 있게 된다. 현재 연구단은 훨씬 다양한 모양의 쿠커비투릴 초분자를 디자인하고 있다.
2003년 연구단은 쿠커비투릴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켰다. 이번에는 겉에 크고 작은 화학물질(치환기)을 덧붙인 것이다. 어떤 치환기를 붙이느냐에 따라 쿠커비투릴 전체의 특성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쿠커비투릴은 보통 pH3 이하의 강한 산성 용액에서만 녹는다. 그러나 수용성이나 지용성 치환기를 붙이면 물이나 유기용매에서도 녹는다. 쿠커비투릴이 강산 용액 아니면 잘 녹지 않아 시도하기 어려웠던 여러 가지 화학반응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 결과 역시 미국화학회지에 실렸다.
쿠커비투릴 변주곡
두 번 업그레이드된 쿠커비투릴은 이제 문어발처럼 응용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패션쇼에 가보면 중심이 되는 테마가 있고 그에 따라 옷의 색깔이나 모양 등을 여러 가지로 바꿔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잖아요? 음악에도 한 가지 테마를 다양한 느낌과 형식으로 변형시키는 변주곡이 있죠. 연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쿠커비투릴이라는 한 가지 테마를 이곳저곳에 응용해보고 있습니다.”
분자 막대에 쿠커비투릴 하나가 끼워져 있다고 해보자. 연구단은 여기에 빛을 쪼이거나 pH를 변화시키거나 전기를 가하면 쿠커비투릴이 옆으로 살짝 자리를 옮기도록 설계했다. 쿠커비투릴이 원래 있던 자리를 0, 옮겨간 자리를 1이라고 하면 컴퓨터의 메모리로 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분자 자체가 움직이는 시간은 아무리 빨라도 마이크로초 정도. 메모리로 쓰려면 나노초나 피코초 단위로 짧아져야 한다.
그래서 연구단이 더욱 주목하는 응용 분야는 분자기계. 쿠커비투릴 초분자는 결국 외부에서 자극을 줬을 때 스스로 움직이는 작은 기계다. 분자만한 미세한 스케일에서 그 움직임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초소형 작동기(액추에이터), 초소형 스위치 등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쿠커비투릴이 미세한 그릇도 된다. 가운데 구멍을 막는 뚜껑을 달아주면 그 안에 다른 작은 분자를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구멍 안에 약물을 넣고 몸 안의 필요한 부위에서 뚜껑이 열리도록 디자인하면 인체가 약물을 더 효과적으로 흡수하게 될 것이다.
쿠커비투릴 ‘호박’에 화학으로 ‘줄을 그어’ 응용하면 이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수박’들이 생긴다. 앞으로 연구단이 또 어떤 ‘수박’을 맛보여 줄지 궁금하다.
포항을 초분자 메카로... 열성파 화학자 김기문 교수
지난해 전립선암 초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미국에서 수술을 받고 나서 지금은 많이 회복된 상태다. 수술 직후에도 학생들과 e메일을 주고받고 화상채팅을 하며 연구를 진행했다. 열성이다. 그게 바로 김 교수다. 그런 그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처음으로 의미있는 논문을 내기까지 꼬박 8년이 걸렸다. 당시에는 열성이 좀 부족했던 걸까.
“박사 때는 생무기화학을 전공했어요. 하지만 한국에 와서는 나만의 영역을 개척하고 싶었죠. 그래서 찾아낸 게 쿠커비투릴을 이용한 초분자화학입니다. 관련 연구자가 적었기 때문에 도전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고, 호기심도 있었어요.”
하지만 당시 포항공대는 신설학교였던 터라 연구실부터 꾸며야 했고, 학생마저 부족했다.
“사실 쿠커비투릴 연구를 시도하던 초기에는 몇 년 간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해 암담했어요. 학생들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죠. 심지어 학생들이 쿠커비투릴을 발음이 비슷하게 ‘코껴 비틀 일’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니까요.”
안 해본 연구 분야이니 처음부터 잘 풀릴 리 만무했다. 쿠커비투릴은 일반적인 용매에 잘 녹지도 않았고, 동족체는커녕 겉에 치환기를 붙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실험실 말고 세계 여러 연구팀들도 쿠커비투릴 연구를 시도했더군요. 이런 어려움 때문에 중도에 다들 손을 놓은 모양이에요.”
그러나 김 교수는 발상의 전환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물에 안 녹으면 소금물에 녹여보고, 보통 반응으로 동족체가 생기지 않으면 온도를 낮춰봤다. 다른 연구팀들이 쿠커비투릴을 구성하는 각 조각에 치환기를 붙인 다음 연결하는데 실패했으니 아예 온전한 쿠커비투릴 자체를 산화시켜 직접 치환기를 붙여봤다. 결과는 대성공.
이제 그의 열성은 쿠커비투릴을 응용하는 쪽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창의사업단을 비롯한 많은 연구가 국민의 세금으로 이뤄집니다. 그러니 국민에게 좀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재료나 기기를 만드는데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2005년 독일화학회지에서 지난 10년간 논문을 가장 많이 실은 과학자 100명을 선정했다. 여기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김 교수가 들어갔다.
“언젠가 은퇴할 때쯤 됐을 때 쿠커비투릴에 관한 한 대한민국 포항이 메카이고, 그 중심에 우리 연구팀이 있다고 기억되길 바랍니다.”
대학입시 때 1, 2, 3지망 모두 주저 없이 ‘화학과’를 썼다는 김 교수. 머지않아 쿠커비투릴이 그의 열성에 보답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