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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와 예술가의 유쾌한 음모

Artist Project

냉철한 지성과 뜨거운 감성의 만남. 흔히 과학과 예술의 만남을 일컫는 표현이다. 하지만 정확한 수치와 정밀한 계산으로 자연 법칙을 발견하는 과학자는 냉철한 지성의 소유자며, 인간 내면과 주위 현실에 대한 성찰을 선과 색을 빌어 표현하는 예술가는 뜨거운 감성을 가졌다는 이 표현은 별로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지난 11월23일부터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린 ‘아티스트 프로젝트’(ArtiST PROJECT)를 보면 더 그렇다. 여기에 전시된 모든 작품들은 지난 6개월 동안 과학자와 예술가의 협업을 통해 얻은 결실이며 그 과정에서 예술가 못지않은 과학자의 열정과 과학자 못지않은 예술가의 지성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티스트 프로젝트는 예술과 과학의 공동 창작이라는 독특한 형태를 띤다. 작가와 과학자가 만나 각자 관심분야를 얘기하고 의견을 나누며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전시 제목 ArtiST도 ‘Art in Science and Technology’를 줄인 말이며 좁게는 예술가와 과학자의 만남, 넓게는 예술과 과학의 만남이란 뜻을 담고 있다.
 

노진아 작 'R1007세포덩어리'. 먼 미래에는 기계가 스스로 생명을 갖고 자가증식할 것이라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과학자, 예술가와 도킹하다

이번 프로젝트의 가장 큰 수확은 예술가와 과학자의 협업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비록 협업 수준은 작가 성향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를 보였지만 작가와 과학자는 짝을 이뤄 공동 작업 과정을 작품 속에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특히 작가 이장원은 도킹AS의 과정을 형상화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 작가는 과학자와 예술가 사이의 소통과 그 과정을 형상화한 작품 ‘untitled(두 사람)’을 선보였다. 그는 6개월간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있었던 기대감, 실망감, 현실적 어려움, 작가와 과학자 간의 견해차를 모니터 화면에 표현했다.

지난 6월초 KIST에서 열린 작가와 과학자의 첫 만남은 작가의 작품성향을 공유하기 위해 대표작을 보여주는 것에서 시작했다. 당시 참석자들은 서로 마음에 드는 상대를 골라 짝을 이뤘고 이 작가와 KIST마이크로시스템연구센터장 문성욱 박사도 한 팀이 됐다. 이 작가가 문 박사를 선택한 이유는 이해하기 힘든 연구 분야를 설명하기보다 문 박사 자신이 가진 삶의 방식을 담담하게 설명했기 때문이었다. ‘즐겁게 살자’는 문 박사의 인생관에 작가는 쏙 빠졌던 것이다.

곧 실험실과 작업실을 오가며 작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뭔가 일을 낼 것’만 같았던 기분 좋은 첫 만남과는 달리 실제 작품 제작에서는 많은 난관이 놓여있었다. 이 작가는 과학자의 연구 분야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면서 과학자의 예술관을 함께 담아낸 작품을 선보일 참이었다. 그러나 연구 분야와의 직접적인 연결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과학자의 예술관 역시 작가의 예술관과는 상당한 괴리감이 있었다.

어느 날 이 작가가 마음에 두고 있는 작품 형태를 묻는 질문에 문 박사는 “반 고흐나 다빈치의 작품을 자기 전공인 마이크로시스템을 통해 색다르게 분석했으면 좋겠다”고 답한 일이 있다. 하지만 이 작가는 원래 미디어 매체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해 용도를 바꾸는 방식으로 작품 의미와 연결시키는 작업을 주로 해 왔다. 회화나 조각 같은 전통 예술 장르에서 벗어난 작품을 선보여 왔던 것이다. 반면 문 박사는 명화라는 범주를 벗어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결국 이 작가는 예술작품에 대한 둘 사이의 인식차를 시각효과로 보여주기로 결정했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6개월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있었던 기대감, 실망감, 현실적 어려움, 예술가와 과학자 간의 견해차 등을 두 개의 자화상이 좌우로 움직이는 형태로 표현했다.

노진아 작가의 작품은 주제의식을 과학적인 형식으로 잘 소화해낸 부류에 속한다. 노 작가는 로봇과 생명의 관계를 인터렉티브 설치 작품과 가상의 다큐멘터리 영상 작품, 작품의 주제에 대한 과학자와의 대화 내용을 함께 전시했다.

작가는 위험작업로봇 롭해즈의 개발자인 KIST지능로봇연구센터 강성철 박사와 생체대사연구센터장 유영숙 박사와 한 팀을 이뤄 기계가 지배하는 미래를 상상한다. 노 작가는 자신의 작품 ‘R1007세포덩어리’에서 수많은 로봇 태아의 모습을 통해 기계가 스스로 생명을 갖고 자가 증식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전개한다. 작업 과정에서 강 박사는 기계가 생명을 갖고 있다는 노 작가의 견해에 대해 “실제 로봇을 연구하면서 인간다운 기계의 움직임에서 생명감을 느끼지만 인간의 생명과 동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 박사는 로봇 증식을 위한 실험에서 제기될 수 있는 생명 존엄성 문제는 반드시 생명윤리의 문제와 다양한 비판을 수용하는 형태로 전개돼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처럼 로봇의 미래와 기계 생명의 가능성을 점친 강 박사와 유 박사의 전문 지식은 노 작가의 상상력과 연결되면서 과학과 예술의 제역할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작가적 상상력이 과학자의 연구에 영감을 불어넣은 사례도 있었다. 양아치 작가는 KIST 지능로봇연구센터에서 개발 중인 비행로봇에서 영감을 얻어 테러와 감시라는 사회적 이슈를 담아낸 작품을 선보였다. 당시 양 작가는 비행로봇을 보고 1937년에 있었던 힌덴부르크 비행선의 참사사건과 미국의 9·11테러에 연결시키는 작가적 상상력을 드러냈다. 양 작가는 비행선에 감시카메라를 장착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주제의식을 담았다. 때마침 비행로봇의 활용방안을 고민하던 강성철 박사는 새로운 연구 아이디어를 얻었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공동작업을 제안했다.
 

이장원 작 'united(두사람)'. 과학자와 예술가 사이의 소통에서 오는 차이와 갈등, 화해를 형상화했다. 02 안수진 작 '평면의 시간' . KIST 지능로봇연구센터와 한국천문연구원의 자문을 받아 지구의 모양과 운동, 인간 인지 능력의 관계를 조명했다.


과학은 현대 미술의 아방가르드

예술과 과학의 만남을 위해 작가와 과학자의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실제 두 영역의 종사자들이 만나서 협업으로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의사소통에 있어서 용어설정의 문제, 시간, 자본, 인력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이 아직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다. 또 이런 만남이 단순한 시도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만남을 위한 다양한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 현존하는 최고 미디어아트센터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의 체트카엠(ZKM)의 경우 단순한 전시장 개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작가와 공학자, 미디어 전문가가 함께 작업하는 공방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하지만 만남의 형태로나, 지속성 측면에서 ZKM은 최근 예술과 과학의 만남을 거론하고 있는 한국현대미술에 몇 가지 시사점을 던진다. 예술과 과학의 만남을 주제로 양자 간 구체적인 접점을 설정하기 위한 이번 프로젝트도 예외는 아니다. 첫 시도인 만큼 작가와 과학자 간에 좀 더 긴밀한 공동 작업 모델을 제시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전시를 통해 예술과 과학의 만남을 이야기하는 것이 단순히 과학기술매체를 이용한 작품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술과 과학의 진정한 만남은 구체적이고 다양한 소통 경로를 확보하고, 만남이 지속되면서 서로 상승 작용하는 과정 속에서 좀 더 원숙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종근 작 'visible&invisible ear flower' 센체 부위를 반복적으로 배열해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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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황정민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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