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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rt D

2005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전 단편소설부문 당선작

2029년에도 사람들은 SF를 썼다. 덕분에 그 해에도 한국 SF 공모전이 열렸고 7000편이 넘는 응모작들이 접수되었다. 나는 예년처럼 응모작들을 접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소설부문 응모작 접수란에 이런 글이 남겨져 있었다.

『첨부된 파일은 지난 15년간이나 애정을 가지고 읽고 또 써 온 SF 인생을 마감하는 저의 마지막 글입니다. 인생 최고의 역작이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최후의 글인 것만은 확실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입니다. 정말로.
이 글은 저의 유서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제 생을 마감합니다.

재산은 벌써 다 처분했습니다. 집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차곡차곡 공들여 쌓아온 소중한 빚더미를 청산하는 데 쓰일 예정입니다. 평생 모아온 재산들인데, 마음먹고 처분하려고 하니까 한 달 만에 깨끗이 사라지더군요. 물론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거들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차는 여동생에게 남길 생각이었지만, 제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도 그 애가 그 차를 가질지 어떨지 알 수가 없어서 중고차 시장에 팔았습니다. 꽤 좋은 차였는데요, 판 돈은 기부를 좀 했습니다. 좋은 일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사랑하는 그녀가 이미 세상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작별인사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 더는 남지 않았습니다. 소식을 듣고 나면 슬퍼해줄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냥 조용히 그녀를 따라가고 싶을 뿐입니다. 그저 오랜 시간동안 지켜봐 주던 몇 안 되는 독자들에게 감사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의 마지막 글은 제가 인생을 통틀어 진심으로 사랑했던 두 가지. 사랑하는 그녀와 SF에 바치는 마지막 작별입니다. 떠나버린 사람은 인사를 받아주지 못하겠지만, 우리 SF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왕국은 오래오래 살아남아서 SF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한 열성적인 팬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겠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의 첫 소설이 바로 올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어쩐지 2029년이라는 해가 영영 현실이 되지 않을 것처럼 남의 세상만 같아 한없이 아름다운 시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상상만큼 아름다운 세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떠나려고 마음먹은 순간에 창밖을 보니 아, 이렇게 아름다운 야경을 가진 도시였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수많은 반짝이는 것들 사이에는 암살자 위성 같은 것도 떠다닌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그저 원래 밤하늘이 저렇게나 아름다웠나 싶습니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고, 파일을 전송하고 나면 저에게 남은 마지막 재산인 이 알약을 가지고 문을 나설 생각입니다. 아, 그런데 이 노트북은 처분을 미처 못 했군요.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 지니고 있던 마지막 유품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뿐만 아니라 접수 팀 모두가 그 편지를 보고 어쩐지 숙연해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마지막 소설 원고 파일은 첨부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을 모르는 채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었다. 그는 그저, 하루에도 수십 명씩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하고 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 우리에게 그는 알 수 없는 끈끈한 동질감으로 이어진 한 사람의 동지로서 받아들여졌다. 그의 죽음은 곧 우리의 얼굴 모르는 영웅이 장렬히 전사하는 것과 같았고, 그가 미처 전하지 못한 마지막 소설은 전설처럼 우리의 가슴 속에 남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실을 바로 사람들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심사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응모자에 대한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적절한 때에 적절한 애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그러니까 그가 편지를 보낸 지 하루쯤 지나서 다시 그의 편지가 접수되었다.

『죄송합니다. 어제 편지 보냈던 사람입니다. 아, 이것 참. 아직 못 죽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배가 고파서 곧 죽을 것 같기는 한데 문제가 좀 생겨서 아직 못 죽고 있습니다. 어제 웹 사이트를 통해서 파일을 접수하고 잠깐 집안 정리를 마무리한 다음에 컴퓨터를 끄러 돌아왔더니 화면에 파일 접수가 되지 않았다고 나오더군요.

글쎄 Smart D가 부족하다지 뭡니까. 아시죠? 키보드에 있는 그 D라는 글자 말이에요. 그리고 한글 자판으로는 ㄷ자판. 자판에 보면 다른 글자는 안 그런데 그 두 개의 자판에는 작은 글자로 뭐라고 적혀 있잖아요. 저도 그걸 자세히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Smart DTM이라고 적힌 것이더군요. 아니 멀쩡한 컴퓨터에 그게 없다니 무슨 말인가 싶어서 알아보다가 밤을 반쯤 새 버렸지 뭡니까. 아침에는 집을 비워 줘야 해서 노트북만 들고 일단 밖으로 나왔는데요, 옷이란 옷은 재활용함에 다 집어넣은 뒤여서 옷도 입고 있는 것 한 벌 뿐이고 지갑이라는 걸 아예 강에다 던져버린 뒤여서 삼각 김밥 하나 못 사먹고 아직까지 이러고 있습니다.

아무튼 Smart D가 부족하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는데요, 그래서 첨부 파일은 안 가고 편지만 간 것 같은데. 세 권 분량 소설이라 파일 용량 자체가 그곳 접수 기준보다 커서 거부되었나 했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ㄷ이나 D가 부족하다니, 혹시 무슨 이유인지 아시면 연락을 주실 수 있으신지요. 전화는 처분했고 e-mail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 아마 근무 시간 지난 뒤여서 언제쯤 이 편지를 받으실지 모르겠지만, 수시로 확인해볼 테니 빨리 연락주실 수 있을까요? 너무 무리한 부탁인가요? 하지만 24시간 전에 죽을 결심을 다 해 놓고 이렇게 집도 절도 없이 살아서 떠돌아다니면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덥수룩해지고 지저분해지는 자신을 보는 게 처량하기 그지없네요. 마지막 부탁입니다. 어서 빨리 이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부탁합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그의 편지를 확인하고도 곧바로 답장해 주지 못했다. 답장을 받고 나면 그가 곧 죽을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미룬 것은 아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이미 24시간 전에 애도를 해 버린 뒤였기 때문에, 아직도 그가 살아있다는 것은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SF계의 이름 없는 영웅이 아직도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으면 이야기가 이상해진다. 되도록 빨리 그의 생을 마감시켜야 했다. 그래야 스토리가 살고 감동이 산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팀 역시 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데 있었다. Smart D가 그 두 개의 자판을 의미한다는 것은 신입부터 영감들까지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그게 모자라서 파일 전송이 안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답장을 무한정 지체할 수는 없었으므로 오전 11시에 나는 그의 e-mail로 답장을 보냈지만 내용은, 알아보고 있으니 기다리라는 말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누구 하나쯤은 알법한 그 일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뭐, 접수 팀이 그런 것까지 해결해 줘야 할 필요는 없었다. 남들은 다 잘들 보내는구만.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또 편지가 오고 말았다.

『이봐요. 어떻게 좀 해 봐요. 기차역에 와서 노숙하고 있단 말이오. 막차 출발하는 시간 지나면 역사 문 닫는다고 다들 밖으로 쫓아내는 바람에 갈 곳이 없어져요. 내 외양이 점점 노숙자들하고 다를 게 없어지고 있어요. 그러면 노트북 충전하러 콘센트가 있는 곳까지 들어가기가 어려워지고, 결국에는 노트북 자체를 보호할 수 없을 것 같단 말이에요. 아무도 안 도와준다고. 정상인처럼 깨끗하게 입고 있으면 몰라도, 이 꼴로는 이걸 꼭 끌어안고 있어도 언제 누가 나타나서 빼앗아갈지 몰라요. 이 안에 내 마지막 글이 들어 있어요. 응모할 거란 말입니다.』

우편 접수? 안 된다. 저작권 문제로 워낙 이래저래 복잡해져서 최근에는 문서 파일 상태로 등록하고 원고 원본과 완전히 동일하게 보관하지 않으면 법에 저촉된다. 그 편지를 받고 드디어 우리는 살짝 냉담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안 도와준다는 말을 스스로 해 버린 것이 그의 실수였다. 그것은 마치 집단최면이나 자기암시와도 같이 작용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와주지 않으면 된다.
그때가 접수 마감 1주일 전이었다. 편지는 쉽게 뜸해지지 않았다.

『아침에 밥을 먹었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줄을 서서 아침밥을 타 먹었죠. 나쁘지 않았어요. 이틀을 굶고 났더니 속이 엉망이 되었나 봐요. 배가 아파서 고생을 좀 했죠. 내 뱃속에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 것 같아요. 세상 다 끝낸다고 그래서 기껏 기능 정지를 시켜 놨는데 이제 와서 다시 어떻게 해 보겠다고 하다니. 하지만 내 생각에 변화는 없어요. 문제가 해결돼서 이 글을 접수하고 나면 떠날 생각이에요. 그리고 이 문제는 아무래도 직접 내 손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군요. 세상에서 하는 마지막 일이니까요.

Smart D사(社)에서 마침 e-mail이 왔었어요. 개별적으로 Smart D를 구입할 거냐고 묻더군요. 그걸 따로 구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저도 놀랐어요. 보통은 워드 프로세서를 살 때 거기에 포함되는 잡다한 비용들 중에 2년 치 Smart D 사용권이 포함된다고 적혀 있더군요. 누구나 다 D와 ㄷ이라는 글자를 돈을 주고 사서 쓴다는 소리였어요. 10000개에 얼마였더라. 달러로 돼 있어서 계산은 안 해 봤지만, 부담되는 가격은 아니었어요. 소프트웨어 가격에 끼워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런 데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저도 물론 그랬죠.

아니 그런데 글자에 돈을 내다니 무슨 소리야, 하고 Smart D사 홈페이지로 들어갔어요. 우리가 자판에서 손쉽게 두드리는 D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한 D인 모양이에요. 예를 들면 사람이 말로만 입력해도 컴퓨터가 그것을 글자로 바꿔서 입력하는 기술, 아니면 글자로 되어 있는 글을 컴퓨터가 소리로 읽어주는 기술 같은 거 말입니다. 2016년까지만 해도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군요. 요즘은 누구나 다 그런 기능을 손쉽게 사용하죠. 그게 가능하려면 소리를 음운 단위보다 작게 음소 이하 단위로 분석해야 하는데 그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Smart D랍니다. 미국에서 만든 모양이에요.

Smart D 프로젝트는 실험 프로젝트였던 모양인데요, A나 I 같은 모음은 읽을 때 변화가 너무 심하니까 첫 개발 대상으로는 어렵고, 쉬워 보이는 D를 택했답니다. 26개 알파벳 중에 제일 먼저 똑똑해진 것이 D인 셈입니다. 얼마나 똑똑했냐면 구개음화를 구별할 수 있었다니까요. ‘굳이’라고 쓰면 ‘구지’로 읽을 정도였다는군요. 물론 그 미국 애들이 한국어부터 연구해 준 것은 아니고 러시아어와 호환시키려다 나온 모양이에요. 블라디미르라고 쓰고 블라지미르라고 읽는 것처럼 말이에요.

Smart A에서 Z까지를 만드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답니다. Smart D를 구축한다는 것 자체가 D가 들어간 단어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일이 포함된 것이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반은 이미 시작해 놓은 일이어서 그랬겠죠. 그리고 무엇보다 그 단어와 문장을 처리하는 인공지능을 이미 개발했으니 나머지는 쉬운 편이었겠죠. 획기적이었다나 봐요. 그 인공지능. 물론 자기들 스스로 하는 말이라 그렇지만 말이에요.

미국에서는 26자 전부에 대해서 지적재산권 보호를 받으려고 했지만 물론 반발이 심했어요. 그래서 결국 D만 보호받기로 했다는 거예요. 돈을 내고 사 가라는 거죠. 웃기는 게 스마트 훈민정음은 한국에서 만든 건데도 똑같이 ㄷ만 돈을 내고 사야 되더군요. 관행인가 봐요. 어느 나라든 D에 해당하는 문자 하나에 대해서만 요금을 물려서 전체 문자에 대한 사용료를 대신하는 게.

Smart D가 모자라서 파일 전송이 안 된다는 건 결국 그 이야기죠. 지적재산권 보호를 위해서 정품 D를 구입하라는. 컴퓨터 안에서 혼자 문서를 작성할 때는 상관없지만 온라인상에 유통시킬 때는 사용료를 정당하게 지불하라는.

맞는 이야기죠. 좋은 이야기에요. 지적 재산권 보호해야죠. 음성 인식 기능에, 고급 검색 기능에. 시각 장애나 청각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굉장한 물건이니까요. 센서만 있으면, 구겨지고 커피 얼룩까지 진 종이에 프린트되어 있는 D자까지 읽어 내는 정도니까요. 안 쓸 수 없는 노릇이죠. 어차피 Smart D가 아닌 그냥 D가 찍혀져 있는 키보드는 구할 수조차 없으니까요. 그런 건 이제 아무도 안 만든다는군요. 전혀 호환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왜, 왜 하필 나만 하필 이때 Smart D가 모자라느냐는 말입니다. 그게 정말 짜증나는 일이란 말이죠. 제가 남들보다 ㄷ을 더 많이 썼을까요? 세상에 남들보다 ㄷ을 더 많이 쓰는 사람이라는 것도 있는 건가요? 아니면 세 권 분량의 ㄷ을 썼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다른 전업 작가들이나 기자들은 어떻게 한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들처럼 저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소프트웨어를 살 때 묻어서 기간 정액제로 ㄷ을 잔뜩 샀을 텐데, 그러니까 이 컴퓨터 주인이었던 은경이나 저나 ㄷ이 모자랄 리는 없을 텐데요. 어떻게 된 일일까요? 마감이 6일 뒤인 것 같은데 제 인생의 마감은 그보다 더 빨랐으면 좋겠는데, 문제가 해결되지 않네요.』

그 편지를 받고 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Smart D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불법 D 사용은 범죄입니다”

하는 문구가 가장 먼저 떴다. 불법복제한 해적판 D도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다. 그런 것은 도대체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그 불법 D를 막으려고 Smart D사 측에서는 인공위성을 26대나 운영한다고 적혀 있었다. 돈을 많이 벌기는 버는 모양이었다. 글자 팔아먹고 사는 사업이라. 진작 그런 걸 했어야 되는데.

아무튼 그 편지에 대꾸를 해 주지 않은 탓에 그의 편지는 뜸해졌다. 받아서 정리해야 할 원고가 그 사람 것 말고도 끝도 없이 많았다. 잘못해서 응모작을 빠뜨리기라도 했다가는 복잡한 소송에 걸릴 수도 있다. 따라서 그런 데 신경 쓰고 있을 틈이 없었다. 한마디로 놀아 줄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마감 3일 전에 또 편지가 왔다.

『여동생을 찾아가서 돈을 달라고 했어요. 이 꼴로 동생을 만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겠어요. 어떤 모습을 보고 나한테 무슨 말을 퍼붓든 그게 마지막이 될 테니까요. 며칠이 지나서 내 소식을 듣고 나면 그때 더 잘 해 줄걸 하고 가슴 아파하겠죠. 아예 나타나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제 욕심이죠. 글자를 사야 하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독한 것. 아무튼 이 돈으로 Smart D를 사서 원고를 보내 드릴 테니 염려 마세요.

이상한 메시지가 뜨네요. Smart D가 11개 남았대요. 방금 썼으니까 이제 10개. 계속 이런 편지를 보내서 여러 사람 귀찮게 만드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이제 8개 남았네요. 그간 감사했고, 죄송한 마음입니다. 제 동생에게 그렇듯이 여러분에게도 이게 마지막 모습인데, 이왕이면 이런 모습은 보여 드리지 않는 게 좋았겠죠. 이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럼 조만간 제대로 된 파일을 보내-.
이런, 이제 전부 써버렸네요. 나 이거 참. 그럼.』

물론 나는 응모자 하나하나까지 신경 쓸 틈이 없을 만큼 굉장히 바빴지만, 그렇게까지 메일이 오고 보니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루가 더 지나서 마감 이틀 전이 되었는데도 그의 파일은 접수되지 않았다. 나는 바빴지만, 확인 차 그에게 e-mail을 보냈다. 그러나 그날은 아무런 소식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가 Smart D사로부터 경고 메일 같은 것이 날아왔다고 말해 주었는데, 받아 보니 영어로 되어 있어서 다음에 읽기로 하고 이면지 함 맨 위 칸에 올려 두었다. 다음날 오전 그에게서 편지가 왔다.

『아시는 것처럼 수중에 그 글자가 전혀 안 남았어요. 메일은 보내야 하겠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야 정상적인 문장을 쓰기는 틀려 버렸네요. 그 글자를 빼고 쓰는 게 이렇게까지 불편할 줄은 몰랐어요. 우선 종결어미에 제약이 생기는 바람에 격식을 갖춘 문장을 쓸 상황이 아니라는 점 이해해 주시고, 너그럽게 읽어 주세요.

네. 결론적으로, 아직 못 죽었죠. 사람 목숨이라는 게 마음먹은 것처럼 쉽게 죽어지거나 살아지는 게 아니네요. 누군가가 자꾸 저를 살아남으라고 떠미는 것 같아요. 아침에 노숙자 급식해 주는 아줌마가 제일 심하게 떠미는 셈이에요. 큰일이에요. 그게 맛있어져서. 그놈의 글자 때문에 영 죽어지지가 않으니. 나 이것 참.

그날 메일을 보내고 나서 온라인상에서 그 글자를 좀 사려고 사이트에 접속했는데, 제가 거래정지 상태라는 거예요. 그간 열심히 쌓아 온 빚이 결국 이런 곳에서 신용불량으로 나타나는가 싶었죠. 하지만 현금이 있으니까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은행에 가서 입금을 하기로 했죠.

이상한 건, 어쩐 일인지 그 놈의 회사, 현금 거래마저 거부하는 거예요. 입금을 하고 밖으로 나와서 충전 완료 메시지가 뜰 때까지 얼마간 시간을 보냈죠. 그게, 한참이 지났지만 전혀 반응이 없는 거예요. 조금 후에 e-mail이 와서 보니까, 입금한 금액은 입금 은행으로 반환하였으니 찾아 가세요, 그렇게 써 있는 거예요. 어이가 없었죠. 온 지구가 자본주의 세상으로 바뀐 게 벌써 언제라고, 아직까지 현금이 안 먹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나요? 아니 무슨, 외화로 환전이 불가능해서 그렇기나 한가요. 어차피 한국 지사에서 거래하지 본사에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이 세상에 그런 경우를 겪고 있는 것은 저 하나뿐일 거라는 생각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죠. 왜 나만 2029년의 혜택을 누릴 수 없는 거죠? 제가 무슨 끔찍한 죄를 저질렀나요.

회사에 항의 편지를 보냈죠. 물론 그 문제의 글자를 빼고 말이에요. 흥분한 상태에서는 문장 쓰기가 훨씬 어려웠어요. 그러고 한참을 있으니까 마침내 회신이 오기는 왔죠. 그 편지의 내용이 참 희한한 것이었어요. 사실은 제가 아니라 은경이가 자기네 회사 블랙리스트에 있었기 때문에 이 노트북에 자기네 정품 글자를 제공할 수 없는 거라고 써 있었어요. 내가 사랑하는 그 여자 말이에요. 은경이.

저는 은경이가 무슨 짓을 했기에 그렇게까지 문명의 이기로부터 선택적인 격리를 겪어야 하는가 물었죠. 그러니까 그쪽에서 하는 말이, 우선 은경이 쪽에서 먼저 자기네 상품을 전부 반납했고, 각종 소프트웨어를 구입할 때 끼워 팔기로 구매한 기간 정액 요금을 남김없이 환불해 갔기 때문에 회사 쪽에서 엄청난 손실을 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고 반문했죠. 엄청난 손실이라니, 그게 얼마나 하길래. 아마 이야기가 이쯤 나오고 나니까 저쪽 역시 감정이 격해진 모양인지,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바로 회신을 해 왔어요.

그러니까 선납 요금을 환불해 간 방식이라는 게, 각국에 있는 NGO 차원에서 연합해서, 같은 타이밍에 각자의 국가에서 소송을 내는 프로젝트였어요. 그러니까 원고가 수십만 명이고 피고가 회사인 소송이었죠. 요지는, 소비자가 제품의 구매 조건과 사용 조건 같은 것을 전혀 모르고, 아예 구매 사실 자체를 모른 채 끼워 팔기 형태로 이루어진 계약은 불공정 거래라는 거였어요. 전 세계적으로 12개의 NGO가 연합해서 벌인 일이라 결국 뉴스가 언론을 타면서 이슈화한 모양이에요. 그런 소송에 걸리면 타격이 얼마나 가나요? 크겠죠? 불공정 거래면?

그럼 이때까지 제가 쓴 글자는 뭐냐고 물으니까, 그건 제가 사서 깔았던 게임 소프트웨어에 딸려 온 채팅용 라이센스의 여분이라나요. 그쪽에서는, 은경이는 그 후로는 전혀 그 글자를 쓰지 않았을 거라고 재차 확인해 주었죠. 그래서 메인 컴퓨터가 블랙리스트를 해제해 주지 않을 거라나 뭐 그딴 소리나 하고 있는 거 있죠.

“그럴 리가 없을 걸요.”

하고 제가 썼죠. 그럴 리가 없었어요. 그럴 리가. 은경이 역시 글을 썼으니까요. 전문 작가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글을 냈었죠.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에요.

하여튼 그 여자 때문에 인생을 마감할 수가 없어요. 아니 원고조차 마감할 수가 없어요. 영어로 쓴 거면 *&%*# 뭐 이런 식으로 그 글자 자리를 채우는 방법을 찾았겠지만, 우리말은 그게 안 먹히니까요. 초성, 아니면 종성이니까요.
갑갑하지만 참아야죠. 역시 죽는 게 만만하지는 않네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의 편지가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Smart D사로부터 경고 메일이 다시 우리 쪽으로 배달된 것이었다. 나는 물론, 접수된 원고를 분류해서 일련번호를 부여하는 것 외에도 47가지가 넘는 행정적인 처리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전자사전을 열고 영어로 씌어진 그 메일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편지 내용은 이랬다.

<;귀사 개인용 컴퓨터로 국제 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문서가 전송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아직은 경미한 수준의 위협만이 감지되고 있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귀사 주변을 철저히 점검해 주시고, 우리 Smart D사는 귀국 안보 당국과 협조 하에 Smart D 3원칙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귀사에 대한 보호 관찰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Smart D 3원칙이라. 뭘까? 3원칙이라면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아시모프였던가? 그런 이름을 가진 흘러간 작가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SF 팬이란 말인가? 나는 그냥 장난 편지일 것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더 신경 쓰기가 싫어서였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관심을 끌려는 작가 지망생들이 매년 한둘이 아니다. 나는 사전을 덮고, 출력한 편지를 이면지함 중간쯤에 쑤셔 넣었다.

업무가 과다해서 전혀 안 궁금해 하고 있었지만, 아무튼 그의 편지가 다시 도착한 것은 마감 하루 전날 저녁이었다.

『사고로 죽었어요. 은경이는. 따라 죽을 만큼 사랑했냐구요? 글쎄요. 같이 있을 때는 잘 모르고 지내지만 떠나고 나면 허전한 사람 있잖아요. 한 글자만 쏙 빼 놓고 글을 쓰는 게 버거운 것처럼. 청혼을 하지 않은 게 제일 미안해요. 자신이 없었으니까요. 나라는 인간, 은경이 때문만이 아니라 사실 죽을 이유는 한없이 많아요. 절망이죠.

은경이는 그날 늦은 시간에 혼자 귀가하고 있었어요. 비가 오려고 해서 집에까지 같이 가 줄 생각이었지만 한사코 뿌리치고 그냥 가버렸어요. 그날따라 일이 많이 남은 저를 배려한 거였죠. 집에 가서 전화하기로 해 놓고는 그 길로 연락이 끊어져 버렸어요. 정확한 원인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심장마비였어요.

가슴 아프게, 목격자 하나 찾을 수 없었죠. 노트북이 좀 이상하기는 했어요. 은경이가 쓰러질 때 땅에 떨어지면서 충격이 온 건지, 고장이 나 있었죠. 컴퓨터는 스스로 고장 체크를 하고 나서는 전기 쇼크라고 했어요. 평소에 은경이 건강이 그렇게 약하지는 않았지만, 약물반응이나 그 외에 이상한 점은 전혀 없었어요.

은경이가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어떤지 저는 전혀 몰랐어요. 그냥 좀 바쁘구나 생각했죠.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은경이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을 자기 자신처럼 생각한 것 같았어요. 주인공은 누군가의 암살 위협에 늘 공포를 느끼고 있죠. 주인공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있어요.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느낌에, 갑자기 시선을 옮겨 보지만, 거기는 늘 지루한 일상처럼 텅 비어 있었어요.”

그건 은경이가 혼자 감내한 스트레스를 반영한 게 아니었을까요. 큰 기업과 싸우는 게 만만했겠어요. 어떻게 보면 진짜 자기 이야기를 써 낼 생각으로 쓴 건 아닌지. 은경이가 미쳐버린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은경이는 진짜로 쫓기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을까요. 언뜻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아요. 아무튼 성격이 예민한 여자였어요.

컴퓨터에서 은경이가 쓴 소설을 하나 찾았어요. 좀 일찍 찾았으면 좋았을걸. 은경이 소설은 이런 내용이었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김은경 씨의 소설을 ㄷ을 뺀 채 열심히 요약해 주었다. 그런데 거기에, 일전에 배달된, 진짜로 Smart D사에서 보낸 편지였는지 장난 편지였는지 알 수 없는 편지에 나왔던 ‘Smart D 3원칙’이 언급되고 있었다. 물론 그는 D를 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대신에 그 자리에 P를 썼다. 나는 살인적인 업무량에도 불구하고 그 Smart D 3원칙이라는 것이 궁금해져서 그 소설을 자세히 읽고 말았다. 거기에 따르면 Smart D 3원칙은 이런 내용이었다.

1. 첫 번째 D는 인간의 소유이다.
2. 두 번째 D부터는 Smart D사의 보호를 받는다.
3. Smart D사는 D 문자가 포함된 단어만 보호할 수 있다.

첫 번째 조항의 의미는, 인간이 자판을 두드려서 직접 생산한 첫 D는 자신의 노동력을 들여 얻은 것으로, 사용료 부과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논리적 근거는 없다. 인간은 무조건 존엄하므로 인간의 창조적 행위에 사용료 따위를 부과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두 번째 조항의 설명은 이렇다. 온라인상에서 정보를 생산하고, 저장하고, 전송하고 혹은 전송된 정보를 읽는 행위 모두가, 사실은 수용자의 단말기에 원본과 똑같은 복사본을 하나 더 생산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직접 노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계가 복사해낸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복사된 D는 첫 번째 조항에 해당되지 않으며, 사용료의 부과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조항을 유지하는 것은 Smart D사의 인공지능이었는데, 결국 이 조항에 의해 창작물에 대한 지적재산권이 사실상 보장되는 셈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하기가 힘들었지만 아마도 Smart D사는 복제된 모든 D에 사용료를 부가하기 위해서 복제된 모든 D를 온라인상으로 추적하고 감시한다. 인공지능의 주 임무다. 그런데 그러려면 D가 포함된 세상의 모든 문서의 복사본을 관리해야 되고, 세상의 모든 복제물들을 관리하다 보니 세상의 모든 창작물의 복제물을 추적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인공지능 개발에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졌다. 물론 돈은 거대 기업들이 댔다.

세 번째 조항은 2항에 대한 견제의 의미로, Smart D사 인공지능의 검색과 감시 권한을 제한하기 위한 조항이었다. ‘보호’라는 말은 듣기가 좋아서 그렇지 사실 ‘감시’와 같은 의미의 말이다. 그런데 D가 포함된 단어만으로 글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초기 인공지능의 경우 27%에 지나지 않았다. 문화 산업계와 이들을 대변하는 WIPO, TRIPs 같은 지적재산권 관련 기구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다시 한번 인공지능 기능을 향상시키는 데 투자했다. 그 결과 그놈의 인공지능은 D가 들어간 단어만 읽는 주제에 나보다 영어를 잘하게 되어서 최근의 텍스트 해독률은 64%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히 듣기 실력은 내가 더 나은 모양이었다. 이 조항은 Smart D사의 인공지능이 문자 신호가 아닌 음성신호 D를 감시할 권한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공지능이 도청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럴싸했다. 그런데 너무 심하게 그럴싸했다. 그래서 그 소설이나 그의 편지 자체가 창작물인지 진지하게 쓴 편지인지 알 수게 되어버렸다. 그만하면 꽤 쓸 만한 소재인데, 이런 식으로 주최 측의 관심을 끌어서 화제작이 되려는 음모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었다. 심사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재미있는 내용이기는 했지만 워낙 분주했던 탓에 그 이상의 관심을 기울일 여유는 나에게 없었다. 그는 원고를 어떻게든 제출할 수 있을 것처럼 이렇게 편지를 마무리 지었다.

『은경이가 그 글자를 평생 안 쓰기로 한 것에 관해서,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제가 말했죠? 그래서 은경이가 쓴 글을 꼼꼼히 읽었어요. 그게, 정말이었어요. 전혀 없었어요. 지난 1년간 쓴 글에 그 글자가 거짓말처럼 전혀 없었어요. 거짓말처럼.

결국 파일을 못 보내고 있는 건 제가 쓴 부분 때문이라는 소리죠. 혹시 제가 마감일까지 글자를 살 방법이 없어서 파일 전체를 보낼 수 없는 경우에는 은경이가 쓴 부분만이나마 보낼 생각으로 그 부분만 따로 떼어서 결말이 나게 수정했어요. 내일이 마감일이니까 그때까지는 어떻게 한번 해 봐야죠. 그럼.』

나는 그 편지를 보고는 며칠 전 Smart D사에서 왔다는 편지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장난 편지로 생각하고 다 지워버린 편지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 편지를 이면지함에 구겨 넣은 생각났다. Smart D 인공지능이 감시한다고? 그런데 D가 하나도 안 들어가 있는 문장은 읽지를 못해? 나는 이면지함을 뒤져서 편지를 찾아냈다. 거기에는 ‘국제 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문서’가 우리에게 전송되고 있다고 써 있었다. 정체불명이라는 말은, 읽을 수가 없다는 말이 아닌가. Smart D사가 이 사람을 감시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리고 원고 마감 당일 아침에는 또 다시 다음과 같은 편지가 왔다. 그러자 누군가가

“그 사람 아직도 살아 있어?”
하고 말했다.

‘물론이죠. 얼마나 고생하는데요. ㄷ을 진짜 하나도 안 쓰고 주저리주저리 편지를 쓰고 있단 말이에요.’
하고 대꾸해 주고 싶었으나, 응모자에게 지나친 관심을 가질 만큼 한가하다는 평판이 팀 내에 떠도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그만 두었다.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죽을 계획이라는 거, 장난으로 한번 해 보는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사실 처음이 아니었어요. 은경이를 처음 만난 무렵에, 첫 번째로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삶이 지금과 별로 차이랄 게 없었으니까 자살할 특별한 이유라고 부를 게 따로 있는 건 아니었죠. 죽어야겠구나 마음먹고 그냥 3주나 보냈어요. 워낙 성격이 화끈하지 못해서 계속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죠. 그날은 너무 갑자기 비가 많이 내려서 우산을 미처 못 챙겼어요. 맞고 가야겠구나 하고 길을 나섰죠. 이상하게 비를 안 맞는 느낌이 나서, 자리에 멈춰 섰어요. 은경이가 우산을 가지고 옆에 서 있었죠.

“누구세요?”
“예? 아 그냥, 비를 맞고 계시길래.”

그렇게 처음 만났어요. 할 이야기가 없었죠. 비교적 상냥한 성격을 가진 쪽은 은경이이지 저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누구세요’ 하고 툭 뱉어 놨으니 은경이는 할 말이 없어졌고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래서 그냥 말없이 버스 타는 곳까지 걸어갔어요. 어색했죠. 상상해 보세요. 그때 은경이가 말했죠.

“저, 우산에서······, 고기 굽는 소리가 나요.”

그 말 때문에 저는 거의 3주 만에 처음 웃었어요. 한 번 웃기 시작하니까 그 3주간 기능 정지해 놓은 온 몸의 근육이 웃음을 멈춰 주지를 않는 거예요. 나쁘지 않았어요. 살아서 웃는 거. 그래서 살기로 결심했었어요. 살아 있기로. 지금은, 그 은경이가 먼저 가버렸지만 말이에요.

은경이는 5개월 전에 죽었고, 내가 그녀의 컴퓨터를 쓰고는 있지만 그 회사에 무슨 원한이 있는 게 아니라서 해를 끼칠 생각은 아니라고 편지를 보냈어요. 그러니 가능하면 글자를 몇 개 팔라고 썼죠. 사실 은경이를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안 그래야죠. 본인은 항복 안하고 끝까지 싸웠으니까요. 정말로 끝까지 싸웠어요. 사실은 저 역시 까맣게 모르고 있었죠. 한 1년 남짓 기간 중에 은경이가 저에게 메일로 보낸 편지가 30통 가량이고, 물론 저는 별로 어색한 느낌 같은 것은 못 느끼고 읽었었죠. 그 30통 편지에 그 글자가 몇 개나 있었을까요? 없었어요. ‘0’이었어요.

회사 측도 그 숫자를 세고 있었나 봐요. 감시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겠죠. 최신 인공위성 26개가 저 위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러고 보면 은경이가 소설에 쓴 것처럼 감시의 눈초리라는 것은 분명히 있기는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죠. 항복이라. 괜찮은 걸까요? 그렇게까지 살벌한 싸움이라면, 끼지 않는 편이 현명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웃기잖아요. 이제 죽을 판에 현명은 무슨 현명이겠어요.』

거기까지 읽었을 때, Smart D사로부터 또 다시 e-mail이 왔다. 이번에는 나에게로 직접 온 편지였다. 나는 읽고 있던 그의 편지를 두고 Smart D사의 편지를 먼저 읽었다. 역시 경고성 편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살벌했다. 일전에 경고한 적이 있는 안보에 위협이 되는 정체불명의 문서가 계속해서 유통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안보 당국을 대신한 Smart D사 인공지능의 검토 결과 이미 심각한 위협이 임박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니 발신자의 소재지를 알고 있다면 즉시 보고하라. 상황이 이대로 계속된다면 강력한 긴급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 그런 내용이었다.

아니, 그렇게 급한 일이면 전화를 하거나 직접 찾아 올 일이지 e-mail로 연락하다니, 누군가가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장난을 치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읽고 있던 그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그런 회사에서 은경이를 해칠 이유 같은 게 있었을까요? 흠. 은경이 컴퓨터에 이런 파일이 있긴 있었어요. Smart ı 3원칙이라고. 저항을 한 게 은경이 혼자만은 아닌 모양인 게······』

그의 편지는 이런 식으로 이어졌다. Smart D 3원칙이 아무 문제없이 부드럽게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사소한’ 충돌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Smart ı 파동이었다. ‘ı’는 점이 없는 i로, 터키어에서는 ‘ㅡ’ 모음을 표기하는 글자였는데, 기존 스마트 알파벳의 i는 이 글자를 자꾸 ‘ㅣ’로만 읽었다. 터키어의 kız(크즈)는 소녀라는 뜻인데 Smart ı는 이것을 자꾸 ‘키즈’라고 읽었다. 터키 정부는 Smart D사에 이 점을 고쳐 줄 것을 요구했지만 Smart D사는 거절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예산을 들여서 ‘ㅡ’ 음가를 가진 Smart ı 개발을 추진해야만 했다. 화가 날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홧김에 만들어진 이 Smart ı에도 이런 3원칙이 있었다.

1. 첫 번째 ı는 인간의 소유이다.
2. 두 번째 ı부터는 터키 공화국 정부의 보호를 받는다.
3. Smart ı가 포함된 단어는 터키 공화국 정부 이외의 개인 또는 단체, 법인으로부터 감시를 받지 않는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조항은 Smart D 3원칙과 다를 게 없었지만 세 번째 조항이 문제였다. 단단히 화가 난 터키 정부는 Smart D사 인공지능의 감시망을 회피하는 감시 방지 코드를 Smart ı에 부여했다. 그리고는 이것이 개별 국가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둘러댔다. 물론 이 조치가 국제 지적재산권 보호 그룹의 반발을 산 것은 물론이었다. 문제는 이 감시 방지 기능이 ‘ㅡ’ 모음이 있는 터키어 안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물론 우리나라가 문제였고, 나중에는 ‘ㅡ’ 모음이 없는 영어권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가장 극적인 경우는 fı의 경우였다. 예전에 영어로 된 종이 출판물을 보면 ‘diffıcult’ 같은 경우처럼 fi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i위에 있는 점을 생략한 형태의 fı로 찍혀 있었다. 활자체에서는 f와 i가 너무 바싹 붙어 있어서 점을 찍지 않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 보급 후에는 달랐다. 점을 빼지 않은 fi가 정상이 된 것이다.

Smart ı의 개발은 fi를 다시 fı로 회귀시키는 역할을 했다. ‘저항적인’ 세력들은 f 뒤에 오는 모든 영어 알파벳 i를 Smart ı로 대체하는 프로그램을 썼다. Smart D사 인공지능이 이제는 difficult 같은 단어를 못 읽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Smart D사 인공지능의 텍스트 해독률은 57%까지 떨어졌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Smart D사와 터키 정부의 싸움은 이른바 Dı분쟁이라고 불리는 사태로 진전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싸움의 결말은 아마도 TRIPs가 내게 될 것 같았다. TRIPs는 WTO의 무역관련 지적재산권 협정인데, 쉽게 말해서 지적재산권 보호 안하면 슈퍼301조를 날리겠다고 협박하는 체제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터키 정부는 아직 항복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곧 터키 정부는 Smart D사에 Smart ı의 감시 방지 코드를 공개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때 Smart D사에서 다시 한번 경고 메시지가 도착했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니 즉시 답변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D를 전혀 포함하지 않아서 인공지능에 포착되지 않는 책이 등장한 것은 2021년이었습니다. 유명한 유럽 24개 도시 연쇄 폭탄 테러가 일어나기 불과 6개월 전이었습니다. 본사는 미국과 유럽 주요 국가 안보 당국에 이른바 Black Books라고 불리는 이 ‘읽을 수 없는 문건’들이 테러리스트들의 연락망일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경고하였고 매일 Black Books 증가량을 통보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67만 명의 사상자를 낸 그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까지 안보 당국은 우리 보고를 믿지 않았습니다. Black Books 수치가 급속히 증가해서 전 주 대비 1200%의 증가율이 집계되었을 때, Smart D 인공지능은 2일 안에 참사가 일어날 것을 경고했고, 실제로 18시간 만에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이날의 충격으로, 국제사회는 Smart D사 인공지능의 테러 방지 목적 감시 기능을 보다 폭넓게 허용······, 공격 위성에 대한 긴급 사용권을 위임······. 그러니 사태의 중요성을 인식하시고······.>;

하지만 나는 답장을 보낼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읽기도 벅찬데 답장을 영어로 보내라는 소리야 하고 생각하면서, 무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커피를 한잔 마시고 자리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Smart D사의 말대로라면,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Smart D사 스스로 나서서 D를 안 쓰는 인간을 죽이기 시작했다는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편지를 들고 팀장에게로 달려갔다. 팀장은 내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팀장이 말했다.

“그렇게 한가해?”

나는 다시 일거리들이 펼쳐져 있는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건성으로 넘겼던 문제의 메일을 다시 열어서 읽었다. Smart D사의 음모 가능성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랬다.

『웃기죠. 그럴 리가 있나요. 생각해 보세요. 글자 하나 때문에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감시 권한을 스스로 내 주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요? 인간이 제 발로 그 바보 같은 미래로 가기야 하겠어요? 그런 일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겠죠. 설마. 2029년이 아무리 천박해 보이기로서니.

아, 아무튼 오늘까지는 회사 측에서 은경이의 블랙리스트를 어떻게 해 보기로 했어요. 바로는 처리가 어렵고, 요즘 인공지능 컨트롤이 쉽지 않아서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그 인공지능, 은경이가 쓴 것만큼 고성능은 아닌가 봐요.

역시 사람 사는 곳이 그렇죠 뭐. 좋게 좋게 이야기하면 그쪽 역시 경계를 풀고 나와서 결국 접점이 보일 것을 가지고 은경이는 왜 그렇게 끝까지 싸우려고만 했을까요. 파리 한 마리 못 죽이는 성격이면서. 하긴 사적으로 싸울 때 보면 은경이가 원래 좀 지기 싫어했어요. 어제, 은경이가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에 저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죠. 그중에 이런 말이 있었어요.

“너를 볼 때면 늘, 그게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너를 만나는 일인 것처럼 간절해. 내가 너 사랑하는 거 알지? 그날 그렇게 나가서 미안해. 하지만 네가 먼저 잘못했어.”

그런 식이었어요.

아, 그리고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그 회사 직원 말이 원래 문화 진흥 차원에서 문학 공모전에 한해서는 회사에서 무상으로 글자를 제공하는 게 관례라는군요. ‘개인적으로 지불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이러고 있지요.’ 하고 제가 쓰니까 저쪽에서 하는 말이, 무슨 공모전이길래 자기네 쪽에서 빠뜨렸냐고 반문하지 뭐예요. SF라고 또 빠뜨려 놓은 거죠 뭐. 자기네 메인 시스템 인공지능이 SF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거래요.

재미있는 것은 그 사람이 저한테만 살짝 해 준 말이에요.

“하여간 이 녀석, 어느날 관리팀이 가보니까 그 인공위성 가지고 전 세계에서 자기 회사 제품 안 쓰는 사람을 찾아 가지고는 한 9백만 명짜리 블랙리스트를 작성해서 프로그래머를 경악시켰죠.”

뭐 아무튼 오늘까지는 해결이 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마감 시간 안으로 원고 파일로 전송할 수 있겠죠. 영 일이 안 풀리면 은경이 것만 보내야겠죠. 그건 그때 봐서.

그럼 여러분, 살벌한 2029년, 몸조심하세요. 자기 회사 인공위성 26개에, 테러 방지를 위한 긴급 조치용으로 군사위성 조작 권한까지 생겨버린 어느 인공지능이 SF를 싫어하는 모양이니까요. 고상하고 평범한 인간이 누구나 그런 것처럼 말이에요. 웃자고 하는 이야기에요. 힘내세요. 오늘 저녁에 죽을 사람이 누군가에게 힘내라고 이야기하는 게 웃기는 이야기지 뭐겠어요.』

그의 편지는 대충 그렇게 끝났다. 그때였다. 그 이상한 바이러스가 번지기 시작한 것은. 화면이 한번 깜빡 하고 나서, 이상하다 싶어 모니터를 들여다봤더니 화면에 떠 있는 모든 단어 앞에 D가 붙어 있는 것이었다. 그의 편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만들어 놓은 문서 파일들도, 심지어 아직 접수 처리를 하지 않은 응모작들도. 큰일이다. 원본 원고가 손상되었다가는 난리가 난다.

그런데 큰일인 쪽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위험하다. 진짜로 위험하다. 나는 깜짝 놀라서 곧바로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니, 그 정도로는 모자랄 것 같았다. 당장에 그 군사위성들이 그가 있는 곳에 폭탄을 떨어뜨릴지도 모른다. 그래 놓고도 그냥 ‘테러범이 있어서요’ 하고 말하면 그만이다. 진짜로 그 말 한마디면 그만이다. 내가 직접 그에게 갈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접수한 응모작들도 전부 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서 모든 단어가 다 D로 시작하고 있었다. 내 코가 석 자였다. 대신에 나는 그쪽 지사에 있는 후배에게 연락을 해서 직접 말을 전해 주라고 보내기까지 했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아저씨, 제발 이제 편지 쓰지 마세요. 김은경 씨의 원고 파일도 절대 보내지 마세요. 안 그러면 죽어요.”

아, 그런데 보내고 나서 보니, 귀찮으니 응모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스토커 짓 좀 그만 하라는 내용밖에 안 됐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떻게든 그를 멈추기만 한다면.

전 세계에 스물여섯 개의 인공위성을 가지고 있는 인공지능에게 해가 뜨고 지는 주기를 나타내는 ‘시간’은 별 의미가 없었다. 어디에서 재느냐에 따라 변하는 측정 도구를 가지고 인공지능을 측정할 수는 없었지만, 원고 마감 2시간 전에, 인공지능은 정기적으로 갱신하는 블랙리스트의 최신 버전을 작성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미 제거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아직 살아 있는 것으로 확인된 ‘테러리스트’ 명단을 체크해서 암살 위성에 오류 보고를 보냈다. 그 명단에는 ‘김은경’이라는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인공지능은 ‘김은경’이라는 이름을 읽을 수가 없었다. 다른 많은 이름들과 마찬가지로 거기에는 Smart D가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공지능은 김은경이 다시 살아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판단을 멈추는 게 옳았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사태가 급박하다고 느꼈다. 당시에 김은경을 제거한 것은 그자가 Smart D가 포함되지 않은 100만 자 이상 분량의 Black Books를 생산했던 위험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여자의 단말기에서 다시 Black Books 생산이 재개됐다. 그것도 급격한 비율로 증가되고 있었다. 그 패턴은 거의 유럽 24개 도시 연쇄 폭탄 테러 당시와 유사했다.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인공지능은 명단을 암살 공격 위성 측에 다시 넘기면서, 정확도를 좀 더 높이지 않으면 거래를 지속할 수 없다는 마지막 경고를 덧붙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김은경의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은희, 영은, 은정, 근영’ 이런 이름에는 ㄷ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데다 ‘ㅡ’모음의 Smart ı의 감시거부 코드까지 있어서 도저히 위치를 읽을 수 없다.

사람 하나 위치 추적하는 것쯤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Smart D 세 번째 원칙만 아니라면 백만분의 1초도 안 걸린다. 아니 어쩌면 딱 사흘만 더 기다리면 될지도 모른다. 터키 정부는 그 안에 국제사회의 압력에 손을 들 것이다. 그러면 Smart ı가 손에 들어온다. 그러면 이 경우처럼 고의로 Smart ı를 이름에다 넣어 쓰는 것으로 추정되는 위험인물들을 백만분의 1초 안에 추적할 수 있다, 하고 인공지능은 계산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위치 추적이 어려웠다. 판단을 늦추는 게 낫다는 계산이 섰다. 바로 그 순간에 어떤 SF 공모 사이트에 김은경의 단말기로부터 거의 30만자에 가까운 Black Books 문건이 전송되었다. 판단을 보류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인공지능은 순식간에 이런 가능성을 계산해 냈다.

그 여자의 가장 최근 소재인 ○○역을 표적으로 공격할 경우,

공격 범위 : 폭격 지점 반경 15 km
표적 제거 확률 : 98. 452 786 714 192 %
예상 사망자 수 : 54. 813 216 933 985 명

유럽에서 일어난 참사 이후에 각국 정부는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채, 긴박한 상황에서 사전 승인 없이 군사 위성 체계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Smart D사 인공지능에 부여했다. 이 계산은 인공지능이 그 ‘긴급조치권’을 사용했을 때의 결과를 예측한 것이었다. 표적 제거 확률이 너무 낮고 선의의 피해자 예상치가 너무 많아서, 긴급조치를 시행하기는 어려웠다. 길고 긴 계산과 망설임 끝에 Smart D사의 최첨단 인공위성은 미사일을 떨어뜨리는 대신에 다른 것을 지상에 떨어뜨렸다.

밤이었다. ○○시 상공을 날고 있던 방송국 헬리콥터 한 대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거의 도시 전체에 드리워진 거대한 반달 모양의 빛을 발견했다.

“저게 뭐지? 무슨 행사 있어?”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그들은 그 반달 모양의 빛이, 같은 면적을 차지하는 네 개의 작은 형체로 갈라지고 나서야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D였다.

“D다!”
“진짜네요. 그런데 왜 자꾸 잘게 갈라지죠?”

다음 순간에 D는 16개로 늘어났다. 그 다음은 64개, 그 다음은 256개. D들은 여전히 도시 전체를 비추면서 서서히 작아져 갔다. 그 분열은 거의 2초마다 한번씩 일어났다. 2초마다 D의 숫자는 네 배로 늘었다.

그는 첫 D가 하늘에서 떨어졌을 때, 빛이 닿지 않는 D의 가운데 구역에 있었으므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점점 더 작은 D들이 온 도시를 채우면서 결국 그가 있는 구역도 서서히 밝아 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려고 했으나, 빛이 너무 밝았다. 빛은 거의 극지방에서도 아주 짧은 시간동안만 사용한다는 인공태양만큼이나 밝았다. 그래서 마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내 올려다보는 것을 멈추고 역 앞 광장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하늘 전체가 번개 치는 날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그는 바닥을 한참이나 응시하고 있다가, 하늘이 깜빡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있는 빛 덩어리가 형태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점점 작아졌다.
마침내 그것이 충분히 작아져서 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온 몸의 신경이 갑자기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D다.”

D는 곧 그의 온 몸을 뒤덮었다. 마치 저격용 총의 조준기에서 나온 붉은 빛이 온 몸을 덮은 것 같았다. D가 잠깐 분열을 멈추었다. 도시 전체가 D로 그려 놓은 모자이크 같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무수히 많은 D의 그림자가 도시 위의 굴곡에 부딪치면서 저마다의 형태로 일그러져 있었다. Smart D사 소속의 또 다른 인공위성이 궤도 위에서 도시 전체를 스캔했다. 구겨진 종이 위에 찍혀 있는 D까지 다 읽을 수 있도록 만든 민감한 장치였다. 인공지능은 Smart D사의 인공지능이 보낸 영상 중에서 오로지 ‘D만을’ 읽었다. 그것은 마치 수백만 화소의 카메라로 찍은 흑백 사진과도 같은 그림이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아직도 해상도가 불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러자 빛들이, 모두 합치면 4의 배수가 되는 수많은 D들이 다시 분열하기 시작했다. D들이 위성 식별 한계치까지 분열했을 때, 인공지능은 분열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전송했다. 인공지능이 ‘표적’을 식별하기 위해 변수들을 계산하는 동안,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넋을 놓고 자기 발 앞 노트북 위에 떨어지고 있는, 이제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작아진 D들을 바라보았다. 노트북 창에 은경 씨의 소설이 떠 있었는데, 바이러스에 감염됐는지 이상하게도 모든 단어 앞에 D가 붙어 있었다. 하늘에서 내린 D가, 모니터에 뜬 D들을 읽어 내려갔다.

인공지능이 추적을 끝냈을 때, 하늘이 갑자기 다시 어두워졌다. 그는 광장 바닥으로 눈을 돌렸다. 깨끗했다. 밤새 내린 눈이 바람에 다 쓸려가 버리듯 조금 전의 일은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겁에 질린 얼굴들이었다.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셔츠 오른쪽 포켓에 D 한 개가 강렬한 빛을 내며 앉아 있었다. 그는 옷에 커다란 거미라도 붙은 것처럼 몸을 털었다. 그래도 D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옷을 벗어 휘두르며 광장 쪽으로 뛰었다. D 한 마리가 그의 펄럭이는 옷 위를 나비처럼 날았다. 죽어라고 달리는 동안 그의 왼손에는 며칠째 소중히 지녀 온 알약 하나가 들려 있었지만,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Smart D 작가 '배명훈'



배명훈
1978년 부산 출생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현재 동 대학원 석사과정 재학
2004년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사 주관 46회 대학문학상 단편부문 우수

2005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배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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