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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계 ‘프랑스 혁명’ 국제도량형총회 르포

불변의 단위가 탄생하다

 

“본 총회에서는 53개국 대표의 만장일치로 킬로그램(kg)과 암페어(A), 켈빈(K), 몰(mol) 등 4가지 단위에 대한 개정안을 채택합니다. 오늘 새롭게 재정의된 단위들은 2019년 5월 20일부터 사용됩니다.”

 

배리 잉글리스 국제도량형위원회(CIPM) 의장이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담담하게 회의 결과를 발표했다. 이로써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불변의 단위’가 탄생했다.

 

 

‘불변의 단위’로 ‘단위 혁명’ 

 

지난 11월 16일, 프랑스 파리에서 약 15km 떨어진 도시 베르사유는 이른 아침부터 안개가 잔뜩 끼어 눈앞 2m 거리가 채 보이지 않았다. 8시도 안 된 이른 시각, 수천 명이 안개를 헤치며 종종걸음으로 베르사유 궁전 근처로 모여들었다.

 

베르사유 궁전 앞에 있는 컨벤션센터(Palais des Congres)에서는 13일부터 나흘간 제26차 국제도량형총회(CGPM)가 열렸다. 국제도량형국(BIPM) 산하 국제도량형위원회가 주관하는 이 총회는 ‘미터협약’ 회원국 60개 대표들이 참석하며, 4년마다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개최된다. 

 

미터협약은 1875년 제정된 세계 최초의 국제조약으로, 이를 토대로 1889년 길이의 자인 ‘국제미터원기’와 질량의 자인 ‘국제킬로그램원기’가 제작됐다. 

 

이날 총회에서는 국제단위계(SI)의 기본단위 7개 중 킬로그램, 암페어, 켈빈, 몰 등 4개 단위가 새롭게 정의됐다. 이들 단위가 훨씬 정확하고 엄밀한 숫자로 정의됐다는 뜻이다. 국제도량형위원회는 회원국 대표들의 논의와 투표를 거쳐, 16일 4개 단위의 재탄생을 전 세계 언론과 대중에 공개했다. 

 

단위 재정의 안건 투표는 세계 표준학계 저명한 과학자들의 기조강연으로 포문을 열었다. 기조강연의 핵심 내용은 절대적으로 영원히 변치 않는 ‘기본 상수’로 단위를 재정의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과학자들은 단위를 재정의해야 하는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다. 하나는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아주 미세한 오차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인공위성에서 신호를 보낸 시간과 신호를 받은 시간을 비교한 뒤, 시간차에 따른 빛의 이동 거리를 계산해 위치를 알아내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은 시간을 매우 정교하게 측정해야 한다. 만약 위성 시계마다 1초를 재는 데 100만분의 1초의 오차가 발생할 경우, 사용자가 받는 위치정보는 300m나 틀리게 된다.

 

다른 하나는 길이나 무게 등을 재는 자가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과거 미터를 측정하는 기준이었던 국제미터원기는 백금 90%와 이리듐 10%를 합금해 만든 1m 길이 자다. 하지만 눈금 사이의 폭이 6~8μm(마이크로미터·1μm는 100만분의 1m)로 정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열팽창하거나 산화하는 등 길이가 미세하게 달라졌다. 

 

결국 1975년 제15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물리상수인 빛의 속력(299792458m/s)을 이용해 1m를 재정의 했다. 크립톤-86 원자가 내는 복사선이 진공에서 299792458분의 1초 동안 진행한 거리를 측정해 불확도를 3×10-9 수준으로 1m를 정의한 것이다.

 

특히 킬로그램의 경우 지금까지 단위 중에서 유일하게 인공물 표준을 사용해왔다. 바로 ‘르그랑K’로 알려진 국제킬로그램원기다. 이 원기는 1889년 1kg을 ‘4도에서 물 1L의 질량’으로 정의하고, 백금 90%와 이리듐 10%를 섞어 원기둥 모양으로 제작했다. 지금까지 프랑스 국제도량형국 지하의 비밀금고에 소중히 보관됐었다. 

 

문제는 국제킬로그램원기가 공기에 닿아 조금씩 산화하거나 이물질이 묻어 질량이 미세하게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1950년, 1992년, 2014년 금고에서 국제킬로그램원기를 꺼낼 때마다 질량이 미세하게 달라져 있었다. 실제로 지난 100년간 머리카락 한 올 정도의 무게인, 약 50μg(마이크로그램)이 줄어든 것으로 확인됐다. 

 

 

53개국 만장일치로 재정의 의결 
 

“예스(Yes)!” “위(Oui)!” 

 

단위 재정의 투표는 호명되는 나라의 대표가 일어나 이에 대해 찬성 또는 반대 입장을 간단하게 말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총회에 참석한 이들은 숨을 죽이고 답변에 귀를 기울였다. 한국 대표로 참석한 박상열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도 “예스!”라며 단위 재정의에 찬성했다. 

 

수 분에 걸친 각국 대표들의 입장 발표 끝에 한국을 포함한 미터협약 60개 회원국 중 이날 참가한 53개국 대표들은 만장일치로 4개 단위 재정의 안건을 통과시켰다. 잉글리스 의장이 안건 통과를 공표하자 현장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번 의결의 핵심은 단위를 정의하는 데 물리적으로 절대 변하지 않는 기본상수를 썼다는 점이다. 킬로그램은 양자역학에서 물질의 파동을 나타내는 불변의 상수인 플랑크 상수(6.626070150×10-34kgm2s-1)로 정의됐다. 이로써 물체의 질량은 입자의 고유 에너지와 파동으로 나타내게 됐다.  

 

 

전류를 나타내는 단위인 암페어는 지금까지 ‘무한히 길고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작은 원형 단면적을 가진 두 개의 평행한 직선 도체가 진공 중에서 1m 간격으로 유지될 때, 두 도체 사이에 m당 2×10-7N의 힘을 생기게 하는 일정한 전류’라는 정의를 써 왔다. 이는 1948년 제9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정의됐다. 

 

하지만 ‘무한히 길고 무시할 수 있을 만큼’이라는 말은 주관적이다. 그래서 이번 총회에서는 절대 변하지 않는 값인 기본 전하량(1.602176634×10-19C)을 이용해 1암페어를  정의하기로 했다. 

 

열역학에서 온도를 나타내는 단위인 켈빈은 1954년 제10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처음 정의됐다. 당시에는 ‘물의 삼중점(고체와 액체, 기체로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의 열역학적 온도의 273.16분의 1’로 정의했는데, 이후 물을 이루고 있는 동위원소의 비율에 따라 삼중점이 미세하게 달라진다는 문제가 확인됐다. 

 

이에 따라 이번 총회에서 켈빈은 입자 상태에서의 에너지와 거시 수준에서 관측한 온도를 연결시켜주는 비례상수인 볼츠만 상수(1.380649×10-23kgm2s-2K-1)를 이용해 다시 정의하기로 합의했다. 

 

물질의 양을 나타내는 단위인 몰은 1971년부터 ‘탄소-12의 0.012kg에 있는 원자의 개수와 같은 수의 구성요소를 갖는 어떤 계의 물질의 양’으로 정의했다. 몰은 질량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이번에 킬로그램이 재정의되면서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게 됐다. 

 

이번 총회에서는 물질 1몰에 들어 있는 원자의 수인 아보가드로 상수(6.02214076×1023mol-1)를 최대한 정확하게 측정한 뒤, 이를 이용해 몰의 정의를 바꿨다. 달걀 30개를 한 판이라고 부르듯이 입자 6.02214076×1023개를 1몰로 약속한 것이다. 

 

요아킴 율리히 국제도량형위원회 부의장은 이날 4개 단위 재정의의 역사적 의미를 프랑스 혁명에 빗대 표현했다. 율리히 부의장은 “오늘은 모든 단위가 물리적으로 절대 변치 않는 상수로 정의된 역사적인 현장, 즉 프랑스 혁명 이후 가장 극적인 혁명의 순간”이라고 말했다. 또 한 전문가는 “프랑스 혁명의 얼이 녹아 있는 베르사유 궁전 옆에서 21세기 단위계 혁명이 일어났다”며 감격해 했다.

 

 
다음 재정의 주인공은 시간의 단위 ‘초’
 

이번에 바뀐 4개 단위는 내년 ‘세계 측정의 날’인 5월 20일부터 적용된다. 하지만 단위의 정의가 바뀌었다고 해서 일상생활에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고기, 채소의 무게를 달거나 운동선수의 기록을 측정할 때는 전과 동일하다. 다만 과학계나 산업현장에서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한 비용과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을 전망이다. 

 

박 원장은 “나노과학이나 초고속통신, 양자역학 등 최근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기존 단위 시스템을 적용하는 데 한계가 많았다”며 “이번에 새롭게 정의된 단위들은 향후 첨단 정밀 측정 분야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그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단위 재정의에 필요한 과학적 근거를 만드는 데 기여해 각국 대표들의 의사 결정을 도왔다. 기계적 일률과 전기적 일률이 같다는 원리를 이용해 플랑크 상수를 정확하게 구할 수 있는 ‘키블 저울(Kibble Balance)’을 자력으로 개발한 것이다.

 

 

박 원장은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의 키블 저울은 기술적인 측면에서 세계 5위권에 든다”며 “3년 내에 세계 최고 수준인 질량 불확도(10-8)를 달성하기 위해 시스템을 계속 정비 중”이라고 밝혔다. 박 원장은 또 “새로운 과학기술을 개발할 때에는 정확한 표준이 필요한 만큼 자력으로 완벽한 표준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단위 재정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 시간의 단위인 초(s)가 새롭게 정의될 가능성이 높다. 초는 이미 과거에 세슘 원자시계가 개발되면서 한 차례 정의를 바꾸기도 했다. 박 원장은 “초고속통신이나 GPS 등의 분야에서 정교한 시간 표준이 매우 중요한 만큼 향후 5년 내에 초에 대한 더욱 정확한 정의가 이뤄질 것”이라며 “한국표준과학연구원도 초의 재정의에 기여할 수 있도록 현재 연구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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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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