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는 1869년 스위스의 프리드리히 미셔가 상처의 고름에서 얻은 백혈구 세포를 화학적으로 처리하다 처음으로 발견했다. 세포는 끈적거렸는데, 미셔는 끈적거림의 원인이 세포질이 아니라 세포핵 내에 존재함을 밝혀냈다. 그는 그 물질을 ‘뉴클레인’이라 불렀고 그것이 인을 함유하고 있으며 산성인 것까지 알아냈다.
이후 세포핵에 유전물질이 있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19세기 내내대부분의 과학자들은 DNA 보다는 DNA와 결합한 단백질이 유전정보를 운반한다고 믿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DNA는 ‘디옥시리보오스’라는 당과 인산, 염기의 3가지 물질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당과 인산은 DNA 분자 어디에서나 똑같지만 염기는 4가지(A, C, G, T)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이런 DNA의 조성은 복잡한 생명현상을 전달하는 유전암호로 보기에는 너무 단순해 보였다.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은 유전물질을 찾던 과학자들이 아니라 폐렴 박테리아를 연구하던 과학자들에 의해서였다. 20세기 초 폐렴은 심각한 보건문제였다. 이 때문에 폐렴의 발병원인 폐렴구균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다. 폐렴구균에는 다양한 변이가 존재해 감염성을 갖는 변종과 그렇지 않은 변종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자는 반짝거리고 매끈한 집락을, 후자는 작은 낟알이 모인 거친 모양의 집락을 형성했다. 그래서 전염성 폐렴구균은 S형(smooth), 비전염성은 R형(rough)으로 불렸다.
영국 보건성에서 폐렴을 연구하던 프레드 그리피스는 S형 폐렴구균을 열로 죽여 R형과 혼합해 생쥐에 주입하자 생쥐가 발병하며 생쥐에서 S형 폐렴구균을 추출해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S형 폐렴구균에 열로는 변성되지 않는 어떤 물질이 있어서 R형을 S형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 물질은 ‘변환원리’로 불리게 됐지만 1928년 그리피스의 논문이 발표될 당시 그리피스 조차 이것이 DNA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오스왈드 에이버리는 1913년 록펠러의학연구소에서 알폰스 도체스와 폐렴구균 박테리아의 면역학적 분류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리피스의 1928년 논문은 에이버리에게 새로운 연구 영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그리피스의 결과에 회의적이었지만 직접 실험한 결과 그리피스와 동일한 결과를 얻었다. 노력 끝에 1931년 에이버리는 시험관에서 R형을 S형으로 변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그리피스가 몇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것이었다. 에이버리는 변환원리의 화학적 본질을 밝혀내는 일에 전력투구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그것이 생명체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유전물질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변환원리는 수수께끼였다. 단순히 일시적으로 R형을 S형으로 변환하는 물질이 아니었다. 변환된 박테리아의 후손과 그 이후 세대에 무한히 유전됐다. 일단 R형 폐렴구균이 S형으로 변환되면 그 후손과 이후 세대는 모두 S형이었다. 유전성은 유전자의 특징이지만 당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변환원리가 기존 유전자를 작동시키는 물질이 있거나 정상적으로는 S형에만 활동성이 있고 R형에는 활동성이 잠재돼 있다고 믿었다. 변환원리가 유전자 자체라고는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에이버리의 연구팀은 열로 죽인 S형 폐렴구균이 정말로 죽었으며 변환원리는 죽은 S형 박테리아의 성분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연구팀은 온전한 박테리아를 파괴한 것을 체로 걸러 S형 폐렴구균의 추출물을 얻었다. 이 추출물은 온전한 S형 박테리아는 전혀 포함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R형을 S형으로 변환할 수 있었다. 1933년까지 에이버리는 계속해서 시험관의 불순물을 줄여나가 변환원리를 더욱 순수한 형태로 만들었고 R형의 변환효율을 놀랄 만큼 높였다. 그러나 추출물에는 여전히 불순물이 있었고, 그 중 어떤 것이 변환원리인지 알아내기는 요원했다.
1934년 콜린 매클라우드가 연구팀에 합류했다. 그는 변환원리 추출률을 크게 향상시키는 새로운 폐렴구균을 분리해내 연구에 많은 진전을 이뤘다. 그러나 그 뒤 2년간 연구팀의 성과는 미미했다. 특정한 단백질을 파괴하는 물질(프로테아제)을 변환원리와 함께 넣어주더라도 변환원리는 계속 활동성을 유지한다는 것을 발견해 단백질이 변환원리가 아닐 수 있다는 힌트를 얻은 것이 고작이었다. 그 후 3년 동안 연구팀의 연구 방향은 다른 쪽으로 치우쳐 이 주제에 대한 별다른 진척이 없이 흘러갔다.
1940년 에이버리는 변환원리 연구를 재개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십L에 달하는 많은 양의 폐렴구균이 필요했다. 에이버리는 새로운 장치를 고안해 감염의 위험을 줄이면서 대량으로 폐렴구균을 배양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단백질을 전혀 함유하지 않은 고체 형태로 변환원리를 얻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변환원리가 단백질이 아님을 보였다.
또 에이버리 연구팀은 변환원리에서 DNA와 RNA라는 핵산 2가지를 모두 발견했다. 이는 DNA가 최초로 폐렴구균에서 검출된 것이었다. 연구팀은 RNA는 파괴하지만 DNA는 파괴하지 않는 물질(RNA 분해효소)을 넣자 변환이 이뤄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변환원리가 DNA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변환원리가 박테리아 외피를 이루는 다당류일 가능성도 남아 있었다.
1941년 매클라우드가 연구팀을 떠나고 매클린 매카티가 합류했다. 매카티는 다당류를 선택적으로 분해하는 물질(아밀라아제)이 변환원리를 무력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냄으로써 다당류는 변환원리의 후보에서 제외됐다. 이제 남은 후보는 DNA뿐이었다. 이 즈음에서야 에이버리 연구팀은 변환원리가 유전자와 유사한 행동을 하므로 그들이 유전자의 화학적 본질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그들에게는 변환원리가 DNA라는 것을 입증하는 일이 남아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DNA 외에 다른 물질이 거의 없는 변환원리의 조합제를 얻어냈고, 그 화학적 조성이 DNA와 같음을 입증했다. 이 물질의 변환능력은 대단했고 DNA만을 선택적으로 파괴하는 물질(DNA 분해효소)을 투여하자 무력해졌다. 이로써 변환원리가 DNA라는 주장은 더욱 강력하게 지지받았다.
이런 연구 결과는 1944년 발표됐고, 현재 에이버리는 분자생물학 혁명의 초석을 마련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재 · 현 · 실 · 험
1944년 에이버리 연구팀의 실험결과가 발표됐을 때 그 중요성을 이해한 과학자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생각을 인정받기 위해 많은 연구를 했다. DNA가 세포분열 과정에서 어떻게 배분되고 수정과정에서 어떻게 합쳐지는지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면서 DNA는 유전물질로 합당하다는 결론이 지지받았다. 또 DNA가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것이 알려졌고 유전암호를 지정해 줄 수 있다는 과학적 주장도 힘을 얻었다. 1952년 알프레스 허시와 마사 체이스는 ‘박테리오파지’라는 바이러스의 유전물질이 DNA임을 확증하는 실험을 통해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사실을 더욱 확고히 했다. 이듬해 왓슨과 크릭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표하자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DNA의 구조 자체가 그것이 왜 유전자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줬기 때문이다. 에이버리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1955년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그의 발견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츰 에이버리의 연구는 DNA가 유전자 구성 물질이라는 증거를 최초로 제시한 실험으로 인정받게 됐다.
에 이 버 리 는
1877년 캐나다 노바스코샤주의 핼리팩스에서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같은해 뉴욕으로 옮긴 뒤 뉴욕메일 문법학교와 콜게이트아카데미를 거쳐 콜게이트대에 진학했다. 재학 시절 문학과 연설, 논쟁에 뛰어났다. 1900년 학사학위를 받은 뒤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컬럼비아대 의대에 들어갔다. 1904년 졸업한 뒤 잠깐 동안 임상의학분야에서 일하면서 이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 후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코글랜드연구소에서 세균학과 면역학 연구원과 강사로 일했다. 1914년 록펠러의학연구소의 루퍼스 콜은 에이버리의 연구에 깊은 인상을 받아 자신의 연구소 폐렴연구팀에 초청했다. 이후 록펠러의학연구소 연구실에서 알폰스 도체스. 콜린 매클라우드, 매클린 매카티 등과 협력해 탁월한 연구 서와를 내놓았다. 미국면역혁합회, 미국병리학 및 세균학협회, 미국세균학회장을 역임했다. 미국과학아카데미와 런던 왕립학회원으로 선출됐고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47년에는 기초의학연구에 공헌한 공로로 래스커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