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수정이나 체외수정보다 더욱 많은 논의가 필요한 것은 임신중절(낙태) 문제라고 생각한다. 놀랍게도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태어나는 아기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사라지는 태아가 더 많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만연된 이 현상에 이미 둔감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임신중절과 관련된 문제 제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가톨릭 등 종교단체가 '생명존중' 기치를 높이 들고 임신중절 반대운동에 활발히 나서고 있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대개 임신중절이 범사회적으로 만연하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 세태를 인명경시의 본보기와 징표로 보는 듯하다.
그러나 생명존중과 관련해 임신중절을 논의하는 것은 사태의 일부만을 보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임신중절을 둘러싼 논의와 행태에는 생명관이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 문제만으로도 매우 복잡한 논란이 있을 것은 자명하다.
임신중절과 관련된 핵심 사항은 "무엇을 또는 언제부터 생명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수태, 즉 수정란의 형성 자체, 다른말로 표현하면 부모로부터 반쪽씩 받은 유전자의 새로운 조합부터를 생명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출산을 생명의 출발로 볼 것인가, 그도 아니면 그 둘 사이의 어딘가를 생명의 기원으로 볼 것인가. 이것은 과학이 풀 수 있는 수수께끼도 아니요, 종교가 인간을 대신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이 문제와 관련해 종교적 교리와 과학적 담론 등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고 있으며, 그러한 영향은 우리들에게 윤리적 무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가부장제 병폐, 임신중절
임신중절과 관련된 또 다른 중요한 것은 "누가 그것에 관한 결정권 또는 허용권을 갖는가"의 문제다. 여성(임산부) 남성(가족) 의사 종교 사회 국가 중 누가 권리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까.
60-70년대 이후 구미사회에서 벌어진 논의의 대부분은 임신의 지속 여부에 관한 여성의 권리에 관한 것이었다. 아기를 낳을지 낙태시킬지는 과연 임신 당사자인 여성이 결정해야 하느냐의 문제였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여성 권리 측면에서의 논의는 극히 최근 일부에서 제기되기 시작했을 뿐, 지금까지의 거의 그것과 무관하게 임신중절이 이루어져 왔다. 근대화와 산업화라는 거의 절대적 명제 속에서 일부 종교를 제외하고는 묵시적 합의와 방관 속에서 엄청난 규모의 임신중절이 행해져 온 것이다. 이 현실에 대한 이해없이 개개인들에게 윤리적 무게만 부과하는 종교의 교리나 과학의 담론은 현실과 유리된 것일 뿐만 아니라 부도덕하고 타락한 것이 될 수 있다.
한편 우리 사회에서 앞으로 더욱 문제가 될 것은 남녀 성비(性比)의 불균형이다. 물론 이것은 태아성감별(胎兒性鑑別)에 따른 '불법적인' 임신중절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지만, 임신중절이 곧 성비 불균형의 원인으로 읽혀서는 안될 것이다. 그보다 임신중절은 극단적인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에서 남아(男兒) 출산을 보장하는 수단의 측면에서 제대로 파악돼야 할 것이다.
무책임한 임신중절이나 태아성감별 등을 규탄하고 중단시키는 일은 생명존중의 관점에서나, 성비 안정의 측면에서나, 건강을 포함한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는 점에서나 적지 않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임신중절이라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 만연하게 되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는 그 노력이 큰 힘과 의미를 얻기 힘들 것이다. 어떤 윤리도 절대적 도그마로 인간사회에 가치있는 역할을 할 시대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