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선생님 오셨다.” 전라남도 광주에서 멀지 않은 작은 시골 마을, 책상도 없는 사랑방에서 초롱초롱한 두 눈을 크게 뜨고 마음 졸이며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과 머쓱하게 앉아있던 농촌의 아저씨들이 서울에서 온 선생님을 큰 소리로 반겼다. 벌써 30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던 그 때 그 시절, 우리나라 시골 마을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배움의 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이런 시골에 야학을 열고 배움에 목마른 갈증을 채워 준 선생님은 곧 미래를 가져다 준 희망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고계원(54) 교수는 그렇게 교육과 인연을 맺었다. 교육자의 길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는 여고시절에 방학이면 아버지와 함께 했던 야학의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고등학교 물리 교사였던 아버지는 교육의 필요성과 가치를 이렇게 몸소 보여주었고, 이것은 그에게도 소중하게 간직해야할 가치가 어떤 것인지 생각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 낳은 대학원생’으로 알려진 유학생활
"어릴 때요? 엉뚱하다고 핀잔받기 일쑤였어요.”
심지어는 놀림도 받았다. 엉뚱하다, 딴 생각을 한다, 늦게 깨닫는다, 괴짜같다. 그다지 칭찬같아 보이지 않는 이 말들로 인해 그는 어쩌면 뇌의 한 부분이 연결되지 않은 채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도 해 보았다. 그러면 이 모든 핀잔을 비켜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는 말을 듣고보면 유전 탓일 수도 있겠다. 위인전에서 보면 괴짜같던 아이들이 놀랄만한 창의성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획기적인 발견을 하지 않던가. 그에게도 이런 기대를 해볼까?
세살 버릇 여든 가듯, 그의 엉뚱함은 외국 유학 생활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스탠포드대에서 박사과정에 있는 동안 결혼과 출산이라는 두 가지 거사(?)를 뚝딱 해치운 것. 배가 불러 뒤뚱거리며 출산 직전까지 학교를 다녔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주변의 친구들과 교수들은 깜짝 놀랐다. 지금이야 공부하면서 아이를 낳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꽤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특히 그가 다닌 수학과에는 여학생 숫자가 부족해 이런 경우를 처음 본 사람이 많았다. 당시 그 학교에서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동양에서 온 아이 낳은 대학원생’은 누구나 아는 유명인사로 기억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민감하게 여겼다면 그렇게 당당하게 학교를 다니지 못했을 거에요. 무식하면 용감하잖아요.”그는 이 용기의 근원이 ‘무식’한 탓에 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마음을 두면 문제가 풀릴 때까지 다른 주변 상황에 개의치 않고 한 가지만 생각하는 집중력이 그가 말한 ‘무식’의 실체다. 복잡한 현상을 몇 줄의 수식으로 깔끔하게 표현하는 수학적 아름다움은 어쩌면 이런 그의 성향과도 닮았다.
집중력이 엉뚱함의 동력
그가 수학의 길로 접어든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물리 교사였는데 수학을 참 좋아했다. 그래서 어린 그의 호기심을 늘 자극하고 수학적 상상력을 이끌어 주었다. 논리를 따지고 원인을 분석하고, 그래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수학은 곧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진로를 결정하는 과정은 순조로웠다. 어릴 때부터 따르던 바로 위의 언니가 수학과를 졸업하고 이미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것.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수학의 길로 들어간 거예요.” 그는 특별히 다른 길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언니가 그의 미래를 앞서 보여준 타임머신이었으니 별달리 문제의식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만약에 수학을 하지 않았다면 법관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법체계의 논리성과 앞뒤 좌우로 꽉 짜여진 그물망의 시스템이 맘에 든다고 했다. 수학자나 법관이나 변호사가 논리와 싸우는 존재라는 점에서는 매 한가지. 결국 그가 수학을 하게 된 것은 ‘문제의식’이 없었던 때문이 아니라 수학과 씨름하는 일이 무작정 좋았기 때문이다.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과 경쟁하며 공부하는 과정은 좋은 자극이 되었다.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브린모어 대학교에서 종신직 교수 자리도 받았다. 브린모어 대학은 120년 전통의 여자대학으로 남다른 교육철학을 강조하고 있는 곳이다. 여고시절 야학의 경험이 이곳에서 발현된 셈이다. 벌써 미국에서 지낸 시간만 17년. 미국과학재단에서 지원하는 연구비를 받으며, 학계에서 나름대로 인정받고 어엿한 직장도 잡았다.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힘들다고 포기하지 않고, 원하는 것에 ‘무식’하게 꾸준히 매달린 것이 이런 결실로 돌아온 것이다.
“후배들이 수학자의 꿈을 키웠으면 좋겠어요.”
미국에서도 여성 수학자는 찾아보기 드물다. 학위 과정에서 보면 뛰어난 능력을 가진 여학생이 많이 있는데 막상 학위를 받고 교수직을 얻는 사람은 별로 없다. 스탠포드 대학에서도 수학과에서는 13년 동안 여성 박사를 한명도 배출하지 못할 정도였다. 수업시간에 창의적인 질문을 하고 뛰어난 논리력을 발휘하던 여학생들이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학문의 길이 힘들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설명이 부족한데…
1991년 귀국할 당시 머리 속에는 이 문제가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어디에서 문제를 풀어야 하나. 막막하기만 하고 속은 답답했다. 우연이었을까? 동료 수학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여성으로서 학문을 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혼자서 헤치고 나가려니 쉽지 않다는 이야기에 모두들 공감하고 있었던 것. 이 때 그는 자신감을 얻었다. 혼자 겪는 문제가 아니니 힘을 모으면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겠다.
스스로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유학길에 가 있던 언니가 훌륭한 모범이 된 것처럼, 미래를 전망하고 조언해 줄 수 있는 선배가 있다면 뒤를 밟는 후배들에게는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뉴턴이 노년에 자신의 업적을 평가하면서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탔기 때문”에 쌓은 성과라며 겸손해했지 않았던가. 선배의 한 걸음은 그것이 성공이 아니라 실패일지라도 후배에게는 유용한 밑거름이 된다.
그는 이 고민을 바탕으로 동료들과 함께 지난해 한국여성수리과학회를 출범시켰다. 이곳은 여성 수학자들이 학문을 나누고 교류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는 이 곳이 수학자를 꿈꾸는 후배 여학생들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가 되는 공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가 아버지와 언니 덕분에 수학자로서 행복을 얻은 것처럼, 이제 후배들이 그의 행운을 함께 나눌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