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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알고 있는 과학지식 많다

과학과 과학적인것의 올바른 이해 필요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이는 천동설에 근거한 것으로 지동설에 따른다면 틀린 진술이 된다.
 

전세기(19C) 이래 급속히 발달한 과학과 과학기술은 현대의 과학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과학주의(scientism)을 낳았다. 과학주의란 비과학적 현상을 설명하는데 과학을 이용하거나 과학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서조차 과학적 방법을 이용하는 태도를 비아냥거리는 말이다.

현재 다른 학문영역의 학자들이 과학의 방법을 이용하고 과학자의 과학활동을 모방하는 현상은 쉽게 눈에 띈다. 이는 모든 학문 중에서 과학과 과학기술이 가장 현저하게 발달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경험주의 실증주의 인식론의 한계

아무튼 과학을 과신하는 현재의 상황은 과학이 종교 및 철학과 혼합되어 진정한 과학의 발달을 볼 수 없었던 17세기 초까지의 상황과 대비된다.

베이컨(F. Bacon, 1561~1626)은 당시의 인류가 직면한 여러가지 문제들, 즉 질병의 만연, 식량 부족, 천재지변에 의한 재앙 등의 문제들을 과학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의 과학은 독특한 과학적 방법이 없었을 뿐 아니라 종교 및 철학과 분명하게 구분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베이컨은 가장 이상적인 과학의 방법으로서 관찰과 실험을 강조하는 귀납법을 확립, 근대 과학이 발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베이컨의 귀납법은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의 수학적─연역적 방법에 의해서 그 문제점과 한계가 지적되기도 했으나 경험주의에 이은 실증주의 인식론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경험주의에 이어 등장한 실증주의가 과학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과학에 대한 통념은 실증주의 인식론의 과학에 대한 주장을 그대로 반영한다. 과학에 대한 경험주의 및 실증주의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과학적 지식은 입증된 지식이다.
·과학은 관찰로부터 시작된다.
·과학적 지식은 관찰과 실험 등 경험을 통해서 획득된다.
·과학은 개인적 견해나 단순한 사색적 상상력이 배제된 객관적 속성을 갖는다.
·과학은 개관적이며 보편적인 과정, 즉 과학적 방법에 의해서 발달한다.

습관적으로 믿기 일쑤

그러나 실증주의 이후의 현대 인식론에 의하면 실증주의의 이같은 주장은 과학의 본질에 관한 그릇된 견해에 불과하다. 실증주의의 인식론적 문제점은 과거 2천5백여년 동안 발달해 온 과학사를 살펴 보거나, 과학지식 및 그 지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해 봄으로써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서는 현재 우리들이 정당한 것으로 믿는 몇몇의 과학지식과 그 지식이 이루어진 과정을 분석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오늘날까지 정당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과학적 관념의 그릇된 점을 비판하고, 과학의 본질에 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해 본다.

우리는 자연을 서술하고 자연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현상을 설명한다. 이는 우리들이 그와 관련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이용되는 그 지식의 참과 거짓 여부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습관적으로 그저 옳은 것으로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단순한 과학적 지식을 예로 들어 본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어떤 물체를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 물체에 일정한 힘을 계속 가해 주어야 한다.
·원자는 공처럼 둥글다.
·식물의 음식들은 흙 공기 물 비료 등이다.
 

「물체를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 물체에 일정한 힘을 계속 가해줘야 한다」^순전히 경험에만 의존한다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관성과 가속도의 개념을 알고 있다면 곧 그 모순점을 찾을 수 있다.
 

잘못된 지식의 예

고등학교 정도의 과학을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이같은 진술들은 현대의 과학지식에 비추어 보면 모두 옳지 않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진술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미’의 천동설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 이래 현재 우리가 믿는 지동설에 따른다면 옳은 표현이 아니다. 지동설에 따르면, “지구가 태양을 향해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전한다”는 진술이 지구와 태양과의 상대적 운동을 보다 참되게 언급하는 셈이 된다.

더구나 우리의 태양계는 지구가 속해 있는 은하계의 가장 자리에 위치하고, 이 은하계가 어떤 점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으며, 우주에는 이러한 은하계가 무수히 많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지동설에 바탕을 둔 진술조차도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믿고 또 이 믿음을 일상생활에 적용한다. 해가 떠오르면 아침이고 서산에 머무르면 밤이 시작된다는 생각은 일상생활에 이 지식을 이용하는 한 예가 된다.

“어떤 물체를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 물체에 일정한 힘을 계속 가해주어야 한다”는 진술은 우리들의 일상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당연한 진리인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일정한 속도로 가기 위해서 동일한 힘으로 계속 페달을 밟는다. 또 어린애들은 장난감을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기 위해 같은 힘으로 계속 밀거나 당긴다. 따라서 이런 경험들에 비추어 볼 때 앞의 진술이 참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관성과 가속도의 개념을 알고 있다면 그같은 진술이 정당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원자는 공처럼 둥글다”는 지식은 원자에 대하여 공부한 경험이 있는 중학생들이 흔히 갖고 있는 그릇된 화학적 지식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에 비하여 많은 수의 고등학생들은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회전하는, 마치 태양계와 같은 원자의 개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원자에 대한 이러한 진술은 원자에 의한 제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구성된 모델에 불과할 뿐, 원자의 본성과는 거리가 멀다.

“식물의 음식물은 흙 공기 물 비료 등이다”는 표현은 중·고등학생들이 흔히 갖고 있는 그릇된 생물학적 지식의 한 예이다. 물론 이 진술은 우리가 몸을 지탱하기 위해 음식물을 섭취하는 일상의 생활에 관한 사실을 식물에 까지 일반화하여 형성된 지식이다.

그러나 음식물이란 생물체의 생명활동에 필요한 에너지원이 되는 물질이라는 정의에 비추어 본다면 이 진술은 옳지 않다. 음식물에 대한 생물학자들의 정의에 따른다면 식물의 음식은 식물이 광합성에 의해서 합성한 탄수화물이다.

플라스틱 손잡이와 쇠붙이의 온도는 같다

우리가 자연 또는 과학을 공부하는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초보적이나마 공부할 내용과 관련된 지식을 미리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을 선행개념(preconceptions)이라고 한다. 당연히 선행개념은 과학자들의 지식체계와 동일하거나 비슷해야 되지만 앞에서 예로 든 네 가지의 관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틀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선행개념이 현대 과학자들의 합의에 따라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과학지식 체계와 다를 경우 이 선행개념을 오인(misconception), 대체적 개념(alternative conception), 대체적 개념틀(alternative framework) 등으로 부른다.

대체적 개념틀은 현대의 과학자와 과학철학자들이 의미하는 과학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몇 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로 대체적 개념틀은 우리가 자연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개념적 안경 또는 틀이 된다. 우리는 대체적 개념틀을 통해서 자연의 제반 현상을 관찰하며 그 틀에 따라 관찰결과 또는 관찰자료를 해석한다.
과학자들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과학적 이론과 법칙에 따라 연구를 위한 실험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해석한다. 따라서 색안경의 색깔에 따라 세계가 달리 보이며 감정에 따라 심상이 다르듯이, 관찰자의 개념틀에 따라 동일한 현상이 다르게 보이며 그 결과가 판이한 의미로 해석된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체적 개념틀을 가진 서로 다른 관찰자들이 아침의 해를 관찰하는 경우를 예로 들어 본다. 아마도 천동설을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나 프톨레미는 해가 지구주위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지동설을 믿는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을 향해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돈다고 말할 게 분명하다.

둘째의 특징은 대체적 개념틀의 논리성 및 정합성이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대체적 개념틀이란 현대 과학자들의 보편적 과학지식과 다르거나 당대의 과학사회가 인정하는 과학지식에 비추어 볼 때 옳지 않은 지식이다. 하지만 그 개념틀을 갖고 있는 당사자 자신에게는 매우 논리적이며 정합적인 지식체계이다.

따라서 어떤 현상을 관찰하고 해석한 결과가 과학자들의 것과 다를지라도 그는 심리적으로 아무런 모순 점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관찰사실이 옳다고 믿는다.

이것은 자전거의 플라스틱 손잡이보다 쇠붙이 부분이 더 차갑게 느껴지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잘 나타난다. 실제로 플라스틱 손잡이와 쇠붙이의 온도는 동일하다. 그러나 대다수의 학생들은 쇠가 플라스틱보다 차다고 대답한다. 사실은 쇠붙이가 플라스틱보다 열을 더 잘 전도, 쇠붙이가 손으로부터 더 많은 열을 빼앗기 때문에 더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학생이나 중학생들은 부드러운 것보다는 단단한 것이 더 차기 때문에 쇠붙이가 플라스틱 보다 더 차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솜 옷 나무 등 연하고 부드러운 물질이 쇠 흙 납 등 단단하고 딱딱한 물질보다 더 따뜻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단단한 물질이 부드러운 물질 보다 더 차다”는 생각이 그들의 개념틀이다. 이에 비하여 “열전도도가 높은 물질이 열전도도가 낮은 물질보다 더 많은 양의 열을 빼앗는다”는 주장은 과학자, 특히 물리학자들의 개념틀이다. 이처럼 어린 학생의 개념틀이 과학자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른 경우는 허다하다.

우리는 개념틀을 통하여 자연을 관찰하고 해석한다. 따라서 과학자와 어린 학생은 동일한 현상에 관하여 전혀 다르게 설명하기 일쑤다.

학생의 개념틀 대(対) 과학자의 개념틀

여기서 특기할 점은 어린 학생들의 개념틀을 무조건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과학자의 개념틀과 다르거나 덜 발달되었을 뿐이지 그것이 옳지 않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어린 학생들이 쉽게 경험할 수 있는 현상들에 관한 한 그들의 개념틀은 훌륭한 설명체계가 된다.
그들이 솜 종이 나무 등과 같이 부드러운 물질과 쇠 흙 돌 등의 단단한 물질을 비교, 부드러운 물질보다 단단한 물질이 더 차다고 설명할 때 이 상황에 관한 한 그들의 설명은 타당하다. 이같이 어린 학생들의 개념틀은 과학자의 개념틀과 다를 뿐이지 그릇된 지식체계는 아니다. 바로 이것이 어린 학생의 개념틀을 과학자의 개념틀과 구별, ‘대체적 개념틀’등으로 부르는 이유이다.

대체적 개념틀의 논리성과 정합성은 세번째 특징인 고정성과 관련된다. 즉 일단 형성된 대체적 개념틀은 여간해서는 과학지식 체계로 바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어린 학생들의 접시모양의 지구관이 공 모양의 지구관으로 전환되는데는 몇년 동안의 학교 교육이 필요하다.
절대적인 사실로 보기는 어렵지만, 과거2천5백여년 동안의 과학의 발달과 개인의 과학지식의 발달 과정을 비교해 보면 그 두 과정이 어느 정도 일치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동설로부터 지동설로 변화되는 과정과 어린 학생들의 우주관이 발달하는 과정은 이 두 과정이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이 두 과정에 차이가 있다면 다만 시간적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과학사를 통해서 볼 때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데 2천여년,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이 뉴턴의 고전역학으로 전환되는데 2천2백여년, 뉴턴의 고전역학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전환되는데 근 2백여년이 걸렸다.

과학철학자인 토마스 쿤(Thomas Kuhn)은 이같은 종합적 지식체계, 즉 천동설, 지동설,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 뉴턴의 고전역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등을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부른다.

패러다임은 개인의 대체적 개념틀에 대응된다. 또 패러다임 간에는 개념적인 측면 뿐 아니라 방법론적 측면에도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한 패러다임으로부터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발달은 격변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쿤은 이러한 변화를 ‘과학혁명’이라고 말했다.

만일 과학사를 통한 과학의 발달과 개인의 과학지식이 발달하는 과정이 일치한다면, 다음과 같은 가정이 가능하다. 즉 주요한 과학 지식체계가 발달하는데 수백년 내지 수천년이 걸린다는 사실로부터 개인의 개념틀을 바꾸기가 어렵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추론에 불과할 뿐이다. 개인의 개념틀이 쉽게 바뀌어지지 않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자연을 관찰하고 이해할 때 자신의 개념틀에 대한 심적 갈등이나 무리함을 느끼지 못하는 데 있다.

인간이 관찰하거나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은 대체로 제한되어 있다. 생물학 분야에서 한 예를 들어보자. 일반인들의 지식은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생물의 조직이나 기관에 제한되어 있을 뿐이다. 즉 세포 수준이하의 영역에는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일반인들은 현미경을 통해 새로운 생명현상을 관찰하기 전 까지는 자신의 지식체계에 관한 심리적 모순점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맨 눈으로 관찰 될 수 있는 현상에 대해 실용성을 부여하고 과신한다. 따라서 대체적 개념틀을 인식하거나 제시될 때까지는 현재의 개념틀을 버리지 않는다.

개인이 한 대체적 개념틀을 버리고 새로운 대체적 개념틀을 받아들이는데는 개종(改宗)시 느끼는 것 이상의 심리적 변화를 요구한다. 이처럼 현재의 대체적 개념틀의 실용성과 이것의 변화에 요구되는 격심한 심성 변화 때문에 개인의 대체적 개념틀은 쉽게 바뀌어지지 않는다.

모델의 함정

그러면 애초에 개인의 대체적 개념틀이 어떻게 형성될까? 대체적 개념틀의 출처 및 그 형성과정은 여러가지가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두 가지, 즉 경험과 언어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누구나 어릴 때부터 자연의 여러가지 사실과 현상에 대한 기대감과 신념을 갖게 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미 어떤 목표를 향해 공을 던질 줄 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공의 위치를 예측하여 그곳으로 달려가 공을 잡을 수도 있게 된다. 우리는 또한 던져진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얼마가지 않아 멈춘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일련의 기대감과 신념이 조직적인 체계를 이루어 다양한 현상을 설명하는데 이용될 때 이 체계가 바로 대체적 개념틀이다.

대다수의 어린 학생들은 물체가 날거나 낙하하는 현상에 대한 관찰경험을 바탕으로 “던져진 물체는 힘이 없어짐에 따라 땅에 떨어진다”는 대체적 개념틀을 형성한다. 이 개념틀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물체의 운동론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틀은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을 설명하는데는 적절하나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과정이나 원리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을 이해하는데는 저해요인이 된다. 이것은 일상적인 경험으로부터 개념틀을 획득한 학생들이 관성이나 가속도의 법칙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갖는 사실에서 잘 반영되고 있다.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언어와 그 의미가 과학의 대체적 개념틀의 출처가 되기도 한다. 앞에서 언급한 음식물, 물체의 운동에 대한 개념과 열 불 시간 등의 개념은 일상적인 의미와 학술적인 의미가 다른 개념의 예이다.

일상적으로 불은 나무 석유 석탄 등이 탈때 생기는 물질을 뜻한다. 따라서 물질로서의 불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는 일반인들은 에너지의 한 상태, 즉 분자의 운동상태로 정의되는 불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갖는다.

언어로부터 과학의 대체적 개념들이 형성되는 또 다른 출처는 과학에서 자주 사용하는 모델 유사 유추 등에 있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지각영역을 벗어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모델을 이용한 과학적 이론을 구성한다. 러더포드의 원자모형이 이에 대한 좋은 본보기이다.

러더포드의 원자 모형은 원자에 의해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태양계를 모방하여 구성한 모델에 불과하다. 원자를 직접 관찰하여 밝혀낸 원자의 참 모습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 모델이 원자를 설명하는데 편리한 방법으로 자주 이용되기 때문에 이 모델을 원자의 진짜 모양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자들은 또한 새로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미 알고 있는, 또는 친숙한 상황을 많이 이용한다. 즉 유추법 또는 은유법을 자주 이용한다.
전류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수도관을 따라 흐르는 물의 흐름을 이용하는 것이 유추법의 예가 된다. 이 경우 전류의 흐름과 물의 흐름이 같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은 전류의 흐름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아울러 학생들은 전류의 흐름을 물의 흐름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대체적 개념틀을 형성하게 된다.
 

처녀와 마녀^생각에 따라 처녀로도 마귀할멈으로도 보인다.
 

과학은 주관적이며 비합리적

요컨대 대체적 개념틀로 구성된 과학지식의 분석결과는 과학에 대한 전통적 견해가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대체적 개념틀의 분석결과를 바탕으로 과학의 본질에 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과학적 지식은 입증된 지식이 아니며 항상 잠정적이며 가변적 상태에 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입증된 과학지식 체계가 한건도 없다는 사실에서 금방 엿볼 수 있다. 이는 일련의 과학지식 체계가 변화, 발달해온 과정으로 이루어진 과학사에 잘 나타나 있다.

궁극적 물질관에 이어 플로기톤설과 칼로릭설을 거쳐 분자운동론으로 발달한 불의 개념이 과학지식의 잠정성 및 가변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된다.

둘째 과학은 주관적이며 비합리적이다. 이 특성은 관찰의 이론 의존성으로부터 파생된다. 옆 그림을 보자. 마귀 할멈으로 보이기도 하나 처녀로도 보인다. 이것은 단순한 시각적 차이를 보여 주나, 이처럼 우리들의 기대감이나 이미 알고 있는 지식에 따라 관찰 결과가 전혀 다르게 진술될 수 있다.

관찰결과를 나타낸 진술을 보통 사실이라고 한다. 과학자들은 이 사실들에 나타나 규칙성을 법칙이라 하고 그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틀인 이론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어떤 과학자가 자신의 기대감이나 전에 습득한 지식에 근거, 사실들을 일반화한 법칙이나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구성한 이론은 기존의 법칙 또는 이론과 상이할 수 있다. 즉 그가 생성한 과학지식은 다른 과학자가 만들어 낸 지식과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세째 과학지식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들에 의해서 구성된다. 이것은 과학이란 관찰로부터 시작된다는 전통적 견해를 부정한다. 대신에 과학이란 과학자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뜻한다.

과학자들은 대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에 비추어 특이하고 문제가 되는 현상의 원인을 밝히고자 한다. 그들은 특이현상에 대한 가설을 설정하고, 실험하여 그 결과에 따라 이론을 확립한다.

마지막으로 과학에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방법이 없다. 과학지식이 자연으로부터 발견되는 것이라면 어떤 일정한 과정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과학지식은 과학자들 개인이 알고 있는 지식과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구성된다. 따라서 과학지식은 과학자 수 만큼이나 다양한 과정과 방법에 따라 이루어진다.

과학이 이러한 특징을 갖는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지식은 잠정이며,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지식으로 변화할 것이다. 또한 과학은 현재의 과학지식이 새로운 지식으로 변화될 때 발달한다. 이것은 과학자 자신의 지식체계는 물론 대다수 과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과학지식을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과학지식을 형성할 때 과학이 발달한다는 것을 뜻한다.

코페르니쿠스가 2천여년 동안 믿어져 왔던 천동설을 과감히 버리고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과학의 혁명이 일어난 사실이나, 아인 슈타인이 2천5백여년 이상 상식적으로 믿어져 왔던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대신 상대성을 주장함으로써 물리학은 물론 과학의 전반에 걸친 과학적 사상의 대전환을 초래한 사실 등이 이것을 잘 반영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과학이란 고정관념 또는 상식적인 지식을 과감히 벗어날 수 있는 용기와 창의적 또는 독창적 사고를 가진 과학자들에 의해서 발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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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조희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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