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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60주년 '히로시마의 종이학'

전쟁 가해자와 원폭 피해자의 두 얼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원자폭탄은 과학자와 인류로 하여금 늘 원죄의식을 갖게 한다. 아울러 20여만명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꾸짖는다. 그러나 60주년을 맞아 찾아간 히로시마는 일본의 허구의 늪에서 부활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히로시마를 향해 날아갔다. 조바심에 뭉게구름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지만, 안내방송은 앞으로 10분 후에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60년 전 원자폭탄에 의해 증발했던 도시, 히로시마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비행기마저 기대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듯 간혹 요동쳤다.

1945년 8월 6일 새벽 미 공군의 폴 티베츠 대령은 B-29 폭격기의 엔진에 시동을 걸었다. ‘에놀라 게이’. 그는 어머니의 이름을 마음으로 불렀다. 그리고 어머니의 이름을 딴 이 폭격기가 자신의 목숨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는 다시 돌아오리라고 다짐하면서, 4톤의 우라늄 원자폭탄을 실은 에놀라 게이를 서서히 활주로로 옮겼다.

사이판 기지를 떠나온 지 6시간 남짓, 티베츠 대령은 앞서 출발한 기상관측 항공기와 두 대의 다른 B-29로부터 히로시마의 날씨가 무척이나 좋다는 연락을 받았다. 잠시 후 히로시마가 드문 뭉게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눈으로 직접 목표지점을 확인하고, 조준하기에 안성맞춤인 날씨였다. 이제 그는 원자폭탄을 히로시마 상공에 떨어뜨리고, 그것이 터지기 전에 가능한 한 멀리 도망쳐야 한다. 8시 15분 티베츠는 요동치는 마음을 다잡고 9600m 상공에서 ‘리틀보이’(little boy)라는 애칭을 가진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43초 뒤 리틀보이는 지상 600m에서 빛을 발했다.

작지만 매운 리틀 보이

일본의 남서쪽에 위치한 히로시마는 생각했던 것보다 도시의 규모가 컸다. 6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과거의 상처를 찾을 수 없었다.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지점에는 거대한 쇼핑타운이 형성돼 있었다. 백화점, 옷가게, 은행, 음식점, 그리고 맥도널드 가게까지 . 블랙홀과 같은 폭심지(원자폭탄이 떨어진 중심지)에서 인구 110만명의 히로시마가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부흥한 히로시마밖에 모르는 우리로서는 원폭의 공포가 뭔지 말할 수 없습니다.” 히로시마시립대 1학년인 간바라 게이타(20세)의 말처럼, 원폭의 상처에 대한 기억은 박제되고 있었다.

히로시마는 19세기 후반 메이지 시대에 제5사단이 창설될 만큼 이미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청일전쟁 때는 군 최고사령부가 들어섰고, 이후 러일전쟁, 시베리아 출병 등을 지휘했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는 항공총군을 거느린 제2총군사령부가 세워져 미군의 상륙을 대비했다. 히로시마에 군수산업이 크게 발전한 것과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8월 6일 월요일 아침, 히로시마의 날씨는 무더웠다. 온도는 26.7℃, 습도는 80%. 다소 짜증스러운 날씨였지만 도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활기에 넘쳤다. 히로시마는 잘 갖춰진 방공망 때문에 다른 도시에 비해 폭격이 적었다. 이날 B-29 폭격기들이 공중에서 선회하는 것을 보고도 경계령을 해제했던 것은 그만큼 안전하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히로시마에 원폭 피해가 컸던 것은 여기서 비롯된다.

리틀보이는 작지만 매운 원자폭탄이었다. 단 한방에 20만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 리틀보이가 꺼낸 첫 비수는 매우 밝은 섬광과 함께 초속 90m로 달려가는 충격파였다. 충격파는 반지름 2km 내의 거의 모든 건물들을 쓰러뜨리고, 길을 가던 사람들을 날려버렸다.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을 경험한 일본인들은 그 실체를 알지 못하고, 그저 ‘피카돈’(‘번쩍’이라는 피카리토에서 유래)이라고 불렀다.

섬광과 충격파는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30분 뒤 리틀보이는 열폭풍을 통해 온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볏짚과 나무로 지은 도시의 건물들은 열폭풍 앞에 스스로 무너졌다. 불에 덴 사람들은 아귀처럼 소리를 지르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곧이어 리틀보이는 방사성 낙진을 함유한 검은 비를 내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불바다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검은 비가 대기와 땅의 온도를 식혀주자 고마운 마음으로 맞았다. 그 검은 비가 유전자도 바꿔놓는 방사성 물질이라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당시 히로시마의 인구는 약 31만명. 그 중 9만 내지 14만명이 원자폭탄이 터진 이후 4개월 내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물론 살아남은 자 역시 방사선 피폭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반핵과 평화를 염원하는 글들. 각국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이 원폭 돔 옆에 마련한 나무판 울타리에 적어놓은 것들이다.


방사성 물질 거의 사라져

히로시마는 아름답고 밝았다. 2차대전 때 지하벙커에 군 사령부와 통신실이 들어서 누더기가 됐던 히로시마성은 고운 옛 모습을 되찾고, 원폭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산을 이뤘던 슈케이엔(縮景園)은 아기자기한 일본식 정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달리가 그린 ‘비너스의 꿈’과 피카소의 판화 작품들을 소장한 현립미술관은 히로시마가 문화의 도시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음산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원폭 돔(atomic bomb dome)도 평화기념공원과 함께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정말 히로시마는 원폭의 상처와 때를 모두 벗어던진 것일까. 이제는 방사성 물질로부터 안전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원자폭탄이 터지면 감마선과 중성자선에 의해 먼저 피해를 입는다. 그 다음 방출된 중성자가 공기나 지상의 물질과 핵반응을 일으켜 만든 방사성 동위원소(유도방사성 물질)에 의해 피해를 입는다. 여기에다 핵분열 시 생성된 물질이 하늘로 올라가 기류를 따라 흐르다 광범위하게 비와 함께 내리는데, 이러한 방사성 낙진이 복병처럼 기다리고 있다.

현재 히로시마에서 말썽을 일으킬 만한 것으로는 잔류하는 유도방사성 물질과 방사성 낙진이다. 그런데 히로시마 내 방사선영향연구소에 따르면, 유도방사성 물질로 생겨난 세슘(Cs)134는 반감기가 약 2년으로 비교적 짧아 지금은 초고감도 장치가 아니면 검출하기 어렵다. 방사성 낙진 또한 원폭 당시 바람이 불어 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 중심부에는 거의 없고, 북서쪽에 흩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곳조차 세월이 흐르면서 방사선의 양이 크게 줄어, 세계 각국에서 날아오는 핵실험 낙진과 구별되지 않는다. 히로시마는 안전하다는 결론이다.
 

평화기념공원에서 한 중년 여인이 그림판을 넘겨가며 12세에 숨진 사다코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원폭으로 태어난 종이학

히로시마의 아픔을 전해주는 거의 유일한 곳은 원폭 돔이다. 60년 전 히로시마현 산업장려관이었던 이곳은 이리저리 굽은 철근과 금이 간 벽돌 벽들만이 남아 당시의 참혹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원폭 돔은 리틀보이가 표적으로 삼았던 티(T)자형 다리 아이오이바시(相生橋)와 실제 원자폭탄이 떨어진 폭심지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폭심지까지의 거리는 불과 160m. 원폭 돔은 지난 1996년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평화기념공원은 좁은 강을 사이에 두고 원폭 돔과 마주보고 있다. 공원 안에는 갖가지 원폭 유품들을 전시해놓은 평화기념관을 비롯, 무명 희생자들의 무덤인 원폭 공양탑, 평화의 종, 한국인 원폭희생자위령비 등 각종 기념물들이 서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곳은 원폭 어린이상이다. 여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 10년이 되던 해, 사사키 사다코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그는 어느날 학교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다가 그만 쓰러진다. 병원에 실려간 그에게 떨어진 병명은 백혈병. 잊혀가던 원자폭탄 방사선이 소녀의 몸속에 고개를 쳐든 것이다. 사다코는 살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꿈인 달리기 선수가 돼 운동장을 달리고 싶었다. 그래서 병원 침상에 누워 매일매일 천년을 산다는 학을 종이로 접기 시작했다. 누군가 소원을 빌면서 천 마리 학을 접으면 그 소원이 이뤄진다는 말을 전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그가 천 마리의 학을 모두 접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사다코상, 사다코상. 제발 일어나봐요.” 학급 친구들이 달려와 눈물을 흘리며 그를 흔들어 깨워보지만 그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1955년 10월 25일 사다코는 친구들이 접어준 356마리의 학과 함께 천마리의 학을 타고 하늘나라로 날아갔다. 원폭 어린이상은 그래서 종이학을 이고 서있다. 그 곁에는 매년 전국에서 보내온 종이학들이 그의 환생을 기도하고 있다.

히바쿠샤와 일본의 가면

원폭 60주년을 맞아 평화를 염원하는 종이학 접기 행사를 비롯해, 원폭 사진전과 시민들이 그린 원폭 시화전, 그리고 피폭 체험 강연회 등이 히로시마 곳곳에서 열렸다. 피에 젖은 노트, 원폭으로 멈춰버린 시계, 타다만 여학생의 교복, 사다코가 접었던 종이학이 전시된 평화기념관에는 관람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8월 6일 오전 8시 평화기념공원에서 ‘원폭사몰자위령식 및 평화기념식’이 열렸다. 히바쿠샤(피폭자, 被爆者)와 유족 대표를 비롯,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그리고 히로시마 시민 등 5만5000여명의 참가자들은 원폭 희생자의 영혼을 달래고, 핵무기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히로시마 평화 콘서트 2005’가 열리는 가운데, 초중고 학생들이 초를 켠 등롱을 모토야스가와 강에 띄우면서 원폭의 날 행사는 절정에 다다랐다.

그런데 아쉬움이 남았다. 원폭의 날 평화기념식에 모인 32개국 주일대사 가운데 미국 대표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또한 27개국 95개 도시의 대표가 참석한 세계평화시장회의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도시 대표들이 참석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현민문화센터에서 열린 원자수소폭탄금지대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참가자들은 ‘원폭은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며, 수백만명의 목숨을 구했다’는 미국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며, 미국의 사과를 강력히 요구했다. 일본은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반핵과 반미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과거 태평양전쟁의 가해자에서 원폭의 피해자로 모습을 바꾸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최근에서야 원폭 피해자인 히바쿠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일본 전역에는 나가사키를 포함해 26만6000여명의 히바쿠샤들이 생존해 있지만, 평균연령은 73세다. 만약 그들이 숨진다면 원폭의 비극은 덮이고 대동아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동남아를 유린했던 일본의 침략행위가 다시 드러날 것이다. 일례로 일본군은 1937년 12월 13일 난징에서만 26만 내지 30만명에 이르는 중국 시민들을 학살했다.

그러나 일본은 과거의 만행을 사죄하지 않고, 오히려 히바쿠샤의 등 뒤에서 피해자의 가면을 쓰고 세계의 위로를 받고자 한다.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선전포고도 없이 원자폭탄을 맞았다”며 일본이 그동안 철저하게 수모와 불이익을 당해온 히바쿠샤와 그 가족들을 껴안은 것은 사다코와 같은 원폭 스타와 히바쿠샤들의 애절한 증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본의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히로시마에 모여들었다. 원폭의 고통에 대해 눈물을 흘리기 위해서다. 히로시마의 종이학이 부활해 인류의 평화를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에서다.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앞에는 한국에서 옮겨 심은 무궁화가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매년 8월 5일 오전 10시, 이곳에서는 원폭으로 희생된 한국인들을 위한 위령제가 열린다.
 

8월 6일 원폭의 날 저녁, 초로 밝힌 등롱들이 원폭 돔 앞 모토야스가와 강물을 따라 흐른다.


두번 죽는 한국인 희생자

올해도 유족, 민단 관계자와 교포 등 300여명이 위령비 앞에 모였다. 지난 1년간 사망한 4명을 포함해 2617명의 희생자 명부가 봉납되자, 눈이 시리도록 하얀 소복을 차려입은 두 명의 무희가 마치 고향의 배추흰나비처럼 위령비 앞을 맴돌며 피폭 한국인의 영혼을 위로했다.

1945년 히로시마에는 약 5만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대부분은 징용에 의해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그 중 2만여명이 원폭으로 폭사했고, 3만명 정도가 살아남았으며, 2만3000여명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강문희 민단 히로시마현지방본부 고문(86세)은 원폭 당시 2800여명의 한국인들과 함께 배를 만드는 회사에 근무했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이제 피폭자원호법에 의해 보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한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아직 보상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의 주장은 한국 정부에 이미 보상을 했다는 거예요.” 그는 하루빨리 한국으로 건너간 원폭 피해자들이 보상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죽기 전에 말이다.

2005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홍대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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