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칠판 위에 뿌연 분필 자국, 그 위에 덧그려진 꼬부랑 글씨들. 마치 암호처럼 보이지만 수학자들에게는 서로의 생각을 교류하는 대화의 수단이다. 언어가 달라도, 문화가 달라도, 수학자들은 칠판을 통해 아이디어를 나누고 발전시킨다. 이제, 그들의 생각이 이미지로 펼쳐지는 순간을 함께 들여다보자.
바샴 파야드의 칠판 | 프랑스 쥐시외 수학연구소 파리 리브 고슈 책임연구원
파야드 책임연구원에겐 애착 분필이 있다. 바로 형형색색의 고급 ‘하고로모’ 분필이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 못하는 편인데, 분필까지 나쁘면 폭망은 예정된 수순이기 때문에 애착 분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수학자들에게 칠판과 분필은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다.
데이비드 다마니크의 칠판 | 미국 라이스대 수학과 교수
특이 연속 스펙트럼 이론을 연구하는 다마니크 교수는 20대 중반이 돼서야 수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칠판에는 다마니크 교수의 주요 연구 분야인 ‘대역 이론’에 대한 필사가 적혀있다. 대역 이론은 2014년 필즈상을 수상한 아르투르 아빌라 교수가 개발한 이론이다. 그는 아빌라 교수와 공동 연구한 논문을 자신의 연구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으로 꼽았다.
노가 알론의 칠판 |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
알론 교수가 겨우 12살일 때, 유럽의 국제 음악 경연인 유로비전 투표 방식이 불공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이를 수학적으로 증명해 어른 공학자와의 토론에서 승리했다. 이 경험은 수학이 나이와 권위를 넘어 객관적인 진실을 드러내는 강력한 도구임을 깨닫게 했다. 칠판에는 그가 연구하는 그래프 이론과 조합론 문제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엘렌 에스노의 칠판 | 독일 베를린 자유대 아인슈타인 교수
에스노 교수에게 수학은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과정이다. 증명을 완성하는 순간은 마치 시간을 초월한 기념비적인 순간과 같으며, 그 기쁨은 연구자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에스노 교수는 아이디어가 형체를 갖추고 증명으로 탄생하는 과정이야말로 수학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말한다.
인터뷰
"수학자들의 오직 한 번뿐인 공연을 기록으로 남기며"
- 제시카 윈
Q.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카메라로 세상을 바라보고 탐구하는 사진작가, 제시카 윈입니다. 16살, 아버지가 카메라를 선물해 주셨는데 그때부터 사진의 매력에 푹 빠졌어요. 사진을 통해 사람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죠. 자연스럽게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사진을 찍게 됐어요.
Q.어떻게 수학자의 칠판을 찍게 됐나요?
매년 여름을 보내던 곳에서 시카고대 수학과 교수인 아미 윌킨슨과 벤슨 파브라를 알게 됐어요. 그들과 가까워지며 수학자들의 연구 방식에 흥미를 갖게 됐죠. 저를 사로잡은 건 칠판이었어요. 수학자들에게 칠판은 단순히 문제를 푸는 도구가 아니라 아이디어를 나누고 사고를 확장하는 창작 공간이더라고요. 수식과 도형이 가득한 칠판이 추상적인 예술 작품처럼 보였어요. 그 안에는 수학자들의 고민과 창의적인 사고 과정이 담겨 있다는 걸 깨달았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Q.특히 기억에 남는 칠판이 있나요?
피터 존슨 예일대 수학 교수의 칠판이요. 그가 오랫동안 풀고 있는 문제가 있었는데, 칠판 한 쪽에 그 풀이를 적어 두고 절대 지우지 않았어요. 매일 그 문제를 바라보며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기 위해서였죠. 마치 화가가 미완성 그림을 이젤에 걸어두고 오랫동안 바라보며 영감을 얻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Q.작품 활동 이후 수학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셨나요?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예술과 수학이 굉장히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엔 수학이 그저 숫자와 공식이 가득한 논리적인 분야라고만 생각했죠.
그런데 수학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니 그들이 공통적으로 ‘아름다운 증명’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단순히 답을 찾는 것을 넘어, 논리가 직관적이고 간결하며 우아한 풀이를 모든 수학자들이 추구했죠. 이건 마치 예술가들이 미적 감각을 고려해 작품을 만드는 것과 같아요. 그들의 칠판은 수없는 고민과 땀방울 끝에 만들어진 예술가의 예술품과 같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걸 깨닫게 된 뒤부터는 수학을 단순히 숫자와 공식으로만 이뤄진 재미없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의 논리와 창의성이 결합된 멋진 학문으로 바라보게 됐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