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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팔은 안으로 굽는다?

자국 과학자 추천 많아

노벨상의 선정 과정과 관련된 모든 문서는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지만 노벨 재단은 1974년에 50년의 기한이 지난 문서들을 학자들에게 공개했다. 공개된 자료들을 분석하면 20세기 초반 노벨상 수상자 선정과정에 담겨진 흥미로운 사회·문화적인 관계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스웨덴 출신의 수상자 아레니우스의 경우다.

20세기 초반에는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의 물리학과, 화학과 교수들이 오랫 동안 노벨상 심사위원을 맡았다. 이들 중 가장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 웁살라 대학 화학교수이자 이온주의자의 한 사람인 아레니우스(1903년 노벨 화학상 수상)였다. 그는 1900년부터 1927년까지 무려 28년 동안 물리학상 심사위원을 맡았다. 아레니우스의 예는 스웨덴 과학계가 노벨상 수상자 선정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나를 생생하게 보여주며, 동시에 20세기 초반 물리학과 물리화학 분야간의 경계선이 어떻게 그려지는가를 잘 보여준다.
 

노벨상 수상자선정위원회


첫번째 수상 스웨덴인이면 창피?

아레니우스는, 역사상 최초로 물리화학 교수직이 만들어진지 10년이 채 못되는 1884년, 웁살라 대학에 전해설의 기초적인 개념이 담긴 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전해설은 나중에 그에게 노벨상을 수여하는 근거가 된 중요한 개념이었지만, 당시에 그의 논문에 대한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특히 물리학과의 탈렌 교수는 최하의 논문성적을 주었는데, 그 점수는 웁살라에서 학자로서의 생을 시작하려는 아레니우스의 희망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탈렌을 위시한 당시 웁살라 교수진들의 이같은 반응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실험기구를 사용해 물리적 양의 정밀한 측정을 물리학의 임무라고 간주하는 실험물리학적인 경향과 실험실에서 다룰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논의를 금기시하던 화학의 전통적 기준에서 본다면 아레니우스가 제시하는 이온이라는, 당시로서는 사변적인 개념을 그들이 수용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아레니우스 논문의 가치를 인식한 것은 라이프치히 대학의 오스트발트였다. 최초의 물리화학 정교수인 오스트발트가 아레니우스에게 관심을 보임으로써 아레니우스에게 주어진 부정적인 이미지는 점차 희석됐다. 나아가 오스트발트, 반트 호프와의 학문적 연대와 교류를 통해 아레니우스는 1890년대에 비중있는 학자로 성장하게 됐다.

1901년 첫번째 화학상 후보들 중에는 아레니우스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클레베(P.T. Cleve)와 페테르손(O. Pettersson)은 반트 호프와 아레니우스의 공동 수상을 추진했지만 첫 번째 상부터 스웨덴인이 수상하는 것이 상의 국제적인 가치를 훼손시킬 수 있다는 고려와 내심 물리학상을 기대했던 아레니우스의 희망에 의해 반트 호프의 단독 수상으로 결정됐다.

당시 물리화학자들은 물리화학이 화학과 물리학의 접경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물리학의 방법을 화학 현상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관점에서 아레니우스는 자신이 물리학상을 수상하는 것이 새로운 분야인 물리화학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같은 분야간의 중첩은 물리학상을 받은 화학자 퀴리와 화학상을 받은 물리학자 러더퍼드의 경우에서도 잘 볼 수 있다.

물리학상 아니면 화학상이라도

1902년 반트 호프는 전년도 수상자 자격으로 전해설의 물리학적인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물리학상 후보로 아레니우스를 추천했다. 당시 화학계는 첫 해에 물리화학에서 수상을 했기 때문에 다음은 유기화학에서 수상할 것을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두 번째 물리학상은 저명한 스웨덴 수학자 미탁-레플러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던 로렌츠에게 돌아갔다.

1903년 초부터 아레니우스의 강력한 지지자인 페테르손의 주도하에 화학상 위원회는 물리학상위원회에 아레니우스에게 물리학상의 절반과 화학상의 절반을 수여하자는 제안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당시 그들은 화학상은 영국의 렘지-아레니우스에게 물리학상은 레일리경-아레니우스에게 시상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안에 대해 물리학자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비록 전해현상이 이온화나 방사선 현상과 결부돼 있지만 물리학자들이 보기에 아레니우스의 전해설은 화학적인 이론이었다. 이 같은 물리학상 위원회의 반응은 언제가는 물리학상을 받을 것을 기대했던 아레니우스의 희망을 꺽는 것이었다.

그해 가을에 물리학상 위원회는 만장일치로 베크렐과 퀴리부부를 추천했다. 그들은 화학상 위원회가 렘지를 단독으로 추천하는 경우에 한해 레일리를 추천하겠다고 화학상 위원회에 통보했다. 당시에 물리학의 레일리와 화학의 렘지가 같이 논의된 것은 비활성기체에 관한 렘지의 연구나 아르곤 기체을 발견한 레일리의 연구가 사실상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렘지와 아레니우스의 경합 끝에 화학상은 아레니우스에게 돌아갔다. 렘지와 레일리는 1904년에 화학상과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아레니우스의 사례는 노벨상의 수상자의 선정에 순수한 과학적 업적이 중요한 요소가 되기는 하지만, 선정 당시의 과학자들의 인간적 관계와 연구 분야가 커다란 변수로 작용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노벨상은 주관적인 편견이 전혀 개입되지 않고, 순수한 과학적 업적으로만 평가될 수 있는 그런 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노벨상 후보 추천에서 발휘되는 과학자들의 애국심에서도 잘 볼 수 있다.

국적과 인종 초월하려 한 노벨의 꿈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 인류의 행복과 지식의 진보를 위한 노력에 대한 표창이라는 노벨의 세계주의적인 이상은 노벨상의 권위를 확립하는 토대였다. 동시에 한세기 동안의 치열한 국가간의 경쟁을 통해 수상자는 자신이 속한 국가의 과학자 사회를 대표하는 독특한 상징이 됐다. 그러나 노벨상은 국가나 조직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주어지는 영예라는 노벨 재단의 해석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이 한 국가의 과학 수준을 가늠케 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로서 기능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리고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될 때마다 매스컴에서는 ‘어느 나라의 누구’, ‘어느 나라로서는 첫번째’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닌다. 노벨상은 국가를 넘어서려는 노벨의 이상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상이 만들어진 때부터 지금까지도 국가주의의 상징으로 통용되는 역설적인 상이 된 것이다.

1896년 노벨은 개인적으로 집행할 1백만 크로르를 제외한 나머지 전 재산을 유가증권으로 바꾸어 거기서 매년 나오는 이자를 5등분해 물리학, 화학, 생리학 및 의학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과 문학 및 평화에 공헌한 인물을 선발해 상금을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또한 그는 물리학과 화학상 수상자는 스웨덴 왕립 과학아카데미에서, 생리학 및 의학상은 스톡홀름 카롤린스카 연구소에서 선정할 것을 유언했다. 특히 노벨은 후보자의 ‘국적’을 따지지 말 것을 당부했다.

애국심은 기본

그러나 19세기 말의 국가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노벨의 이 같은 유언은 상당한 반발에 부딪혔다. 당시 스웨덴 국왕 오스카 2세는 “노벨의 유언장에는 애국심이 빠져있다”고 비난했으며, 상당수의 스웨덴 언론도 국내에도 복지적 차원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은데 이에 대한 고려가 없었음을 지적하는 등 국왕의 견해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다행히 노벨의 유언 집행자였던 라그나르 솔만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스웨덴 국내의 국가주의적인 분위기가 다소 완화되고 1900년 6월 29일 노벨 재단이 출범했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노벨의 세계주의적 이상은 또다시 제동이 걸렸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1차 대전을 국가간의 총력전이요, 과학자·기술자들의 전쟁으로 묘사했다. 영국을 승전으로 이끈 수상 로이드 조오지는 “1차 대전은 화학자들의 전쟁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은 전쟁 당사국의 과학자들이 다수 전쟁 관련 업무에 종사했던 점과 독일이 독가스를 사용한 일이 일반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총성없는 전쟁을 수행하는 애국적인 과학자들의 모습을 통해 과학의 세계주의적 가치는 의심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비롯된 적대감이 노벨상의 권위를 심하게 훼손시키지는 않았다. 연합군측 과학자들의 격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과학아카데미는 독일의 전쟁 수행 업무에 헌신적이었던 프릿츠 하버를 1918년 화학상 수상자로 결정했다.
 

(그림) 노벨상 후보추천시 자국후보 추천 비율


50% 이상 자국 학자 추천해

노벨상 추천인들의 태도를 보면 국가주의적 성향이 얼마나 은밀하고 작용했는지 알 수 있다. 자국의 후보를 우선적으로 추천하는 추천인들의 태도는 바로 애국심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림)은 1901년-1933년 사이에 물리학상과 화학상에서 자국의 후보를 추천한 비율을 비교한 것이다. 같은 국적의 후보를 추천한 비율이 거의 언제나 50%가 넘었으며, 프랑스의 경우는 1920년까지 매년 80%에 달하는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추천 성향은 노벨상이 국가간의 경쟁임을 암시한다. 이처럼 노벨상에는 보편적인 지식을 지향하는 과학의 세계주의적인 모습과 상을 통해 자국 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하려는 국가주의적인 성향이 교차돼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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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유지영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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