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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도 뭉치면 강하다

개성만점 신세대 분자 만드는 나노설계사

촛불을 든 사람이 하나둘 모여든다. 어느새 광화문 사거리를 가득 메운 촛불.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이라크 파병 반대, 미군 탱크에 깔려 숨진 여중생 추모 등을 이야기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촛불집회’가 폭력시위 없이 다수의 의견을 전달하는 한 방법으로 자리잡았다.

최근 일본의 한 시위대가 ‘손에 손잡고’ 서서 ‘인간사슬’을 만들어 미군 철수를 요구해 눈길을 끌었다. 개인의 영향력은 미미해도 같은 의견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여럿 뭉치면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화학분자도 마찬가지다. 분자가 여러 개 ‘뭉치면’ 한 분자로는 어림도 없을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다. 분자들의 이런 성질을 이용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물질을 설계해내는 연구실이 있다. 연세대 화학과 초분자나노조립체연구단이 화제의 주인공. 연구단이 공들여 설계한 ‘신세대’ 분자들을 만나보자.
 

친수성과 소수성 부분으로 이뤄진 분자가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 초분자를 편광현미경으로 관찰한 모습. 단국대 화학과 조병기 교수의 작품이다.


모여라 나노분자

연구단이 설계하는 분자는 물을 싫어하는 소수성 부분과 물을 좋아하는 친수성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소수성 부분은 긴 막대 모양이고 친수성 부분은 꼬불꼬불한 사슬 모양.

이 막대-사슬분자 수십~수백개를 물에 넣으면 막대 부분은 막대끼리 스스로 뭉친다. 물에 닿는 면적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다. 반대로 친수성인 사슬 부분은 물과 가까운 쪽으로 모인다. 이렇게 해서 처음의 분자와는 전혀 다른 특이한 모양의 분자가 조립된다. 이를 ‘초분자’라고 하고, 분자가 조립되는 과정을 ‘자기조립’이라고 한다.

“막대와 사슬 부분에 해당하는 여러 종류의 분자를 다양한 방법으로 끼워 맞추거나 수용액의 온도, pH 등을 바꾸면 여러 모양의 초분자를 원하는대로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연구단을 이끄는 이명수 교수의 설명이다. 분자의 구조와 수용액의 상태를 교묘히 조절해 독특한 모양을 갖는 초분자를 탄생시킨다는 얘기.

분자들이 스스로 뭉쳐 초분자가 되면 분자 하나일 때 갖지 못했던 새로운 성질을 나타낼 수 있다. 마치 비누분자가 물속에 들어가면 여러 개가 공 모양으로 뭉쳐 옷에 묻은 때를 감싸 떼어내듯이 말이다. 이런 초분자는 모두 전자현미경으로 수십만배까지 확대해야 볼 수 있는 나노미터(1nm=10-9m) 크기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나노조립체가 과연 어떤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테라비트 메모리 만들 나노벌집

막대-사슬분자의 사슬 부분을 잘라내고 막대 부분을 촘촘히 늘어서게 하면 벌집처럼 미세한 구멍이 무수히 많이 뚫린 편평한 판이 만들어진다. 이 판은 대용량 메모리 저장장치를 만드는데 응용할 수 있다.

메모리의 저장용량을 늘리려면 정해진 공간에 많은 반도체 소자를 심어야 한다. 현재 메모리 저장장치를 제작하는 방법인 리소그래피로는 반도체 소자를 심는 단위공간을 50nm 정도까지 작게 만들 수 있다. 반도체 집적도가 기가(109)비트급인 메모리까지 제작이 가능한 것. 이에 비해 나노벌집 구멍의 지름은 4~9nm에 불과하다. 여기에 반도체 소자를 넣으면 집적도를 테라(1012)비트급까지도 높일 수 있다고.

나노벌집 구멍의 안쪽 벽은 물을 싫어하는 막대 부분이 붙어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소수성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유기분자가 들어있는 용액에 나노벌집을 넣으면 벌집 구멍 크기에 맞는 유기분자가 구멍 안으로 쏙쏙 들어간다.

이 성질을 응용하면 나노벌집으로 수질정화가 가능하다. 구멍 크기가 각각 다른 나노벌집을 많이 만들어 오염된 물에 넣으면 유기분자로 이뤄져 있는 각종 오염성분들이 각자의 덩치에 맞는 벌집 구멍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즉 나노벌집이 오염성분을 붙잡아 제거하는 것. 나노벌집은 지난해 ‘독일응용화학회지’와 ‘미국화학회지’에 소개됐다.
 

나노 크기의 구멍이 벌집처럼 무수히 많이 뚫린 초분자를 편광현미경으로 찍었다. 초분자나노조립체연구단 박사과정 유자형씨의 작품.


만능 화장품제조기 나노공

지난해 8월 재료화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지인 ‘네이처 머티리얼스’는 연구단이 개발한 나노공 조립체를 특집기사로 실었다. 나노공은 막대-사슬분자의 막대 부분이 가운데로 모이고 그 주위를 사슬 부분이 둘러싸 공 모양이 된 초분자다.

그런데 나노공의 안쪽에는 막대 부분들에 둘러싸여 있는 소수성의 미세한 공간이 생긴다. 연구단은 수용액에 나노공과 함께 물에 잘 녹지 않는 유기화합물들을 넣어봤다. 그랬더니 유기화합물들이 서로 질세라 나노공 안쪽 공간으로 끼어들어갔다. 좁은 공간 안에서 서로 충돌하던 유기화합물들은 결국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보통 유기화합물을 반응시키려면 수용액이 아닌 유기용매에 넣고 열을 가한다. 고온의 유기용매 속에서 유기화합물 분자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우연히 충돌해야 비로소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드는데 비해 생산물의 양이 적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유기화합물 분자가 나노공의 좁은 공간 안에 붙잡혀 있으면 꼼짝없이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서로 충돌할 확률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나노공이 화학반응이 좀더 잘 일어나도록 돕는 촉매 역할을 하는 셈. 뿐만 아니라 나노공의 표면은 물을 좋아하는 사슬 부분이기 때문에 유기용매가 아닌 수용액에 넣고도 이 같은 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

앞으로 화장품이나 의약품 같은 유기화합물을 합성할 때 나노공을 이용하면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환경오염도 훨씬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암세포 골라 파괴하는 나노유도탄

최근 연구단은 pH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자를 설계해 ‘미국화학회지’에 발표했다. 이 분자가 수십개 모이면 속이 텅 빈 캡슐 모양의 초분자로 조립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수용액의 pH가 낮아지면, 즉 산성이 되면 캡슐 모양이 찌그러진다. 초분자의 사슬 부분에 수소이온이 많이 붙어 양전하를 띠게 돼 서로 밀쳐내기 때문이다.

이 나노캡슐 초분자는 나노약물전달시스템으로 응용할 수 있다. 나노캡슐 안에 항암제를 담아 몸 안에 넣는 것. 일반적으로 암세포는 정상세포보다 pH가 낮다. 나노캡슐이 돌아다니다가 암세포를 만나면 pH가 갑자기 낮아져 찌그러지기 시작한다. 결국 나노캡슐이 터지면서 안에 있던 항암제가 빠져나와 암세포를 공격하는 것이다. 정상세포에는 영향을 주지 않고 암세포만 찾아내 공격하는 ‘초정밀 나노유도탄’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구단은 사슬 부분이 만노오스라는 당 성분으로 이뤄진 막대-사슬분자도 설계했다. 이 분자들도 모이면 속이 빈 캡슐 모양의 초분자가 된다. 표면에 설탕이 코팅돼 있는 나노캡슐인 셈. 설탕 나노캡슐이 생체 내에 들어가면 만노오스 수용체가 있는 곳에 가 달라붙을 것이다. 실제로 연구단은 대장균이 들어있는 배지에 설탕 나노캡슐을 넣었더니 섬모에만 달라붙는 사실을 확인했다. 대장균 섬모에는 만노오스 수용체가 있다. 만노오스를 다른 성분으로 바꾸면 원하는 곳에만 선택적으로 달라붙는 나노캡슐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연구단은 수용체에 달라붙은 다음 스스로 터지는 나노캡슐도 개발할 계획이다. 캡슐 안에 약품 성분을 넣어 특정한 수용체가 있는 세포에 달라붙어 터지게 하면 역시 나노약물전달체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품을 방출하고 남은 나노캡슐이 몸 안에서 분해되도록 하는 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세균의 천적 나노터널

어떤 항생제는 병원균의 세포막에 물질이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을 뚫는다. 구멍을 통해 세포 안의 내용물이 빠져나와 병원균을 죽게 하는 것. 이에 착안한 많은 연구자들은 세포막에 구멍을 뚫는 분자를 합성해 항생제로 개발하려고 시도해왔다. 그러나 연구실에서 이런 분자를 처음부터 합성하는 과정은 매우 복잡할 뿐만 아니라 시간과 비용도 많이 든다.

최근 연구단은 스스로 조립돼 세포에 구멍을 뚫는 초분자로 변신하는 막대-사슬분자를 설계, 이를 해결했다. 이 분자는 온도를 약 90℃까지 올리면 막대 부분이 울타리처럼 둥그렇게 배열되고 사슬 부분은 그 안쪽으로 모인 형태의 초분자가 된다.

연구단은 이 초분자를 세균이 들어있는 배지에 넣어봤다. 그 결과 세균의 세포막에 초분자의 막대 부분이 끼어들어간 것. 세포막도 막대 부분처럼 소수성의 지질성분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이때 막대 안쪽 사슬 부분은 친수성이므로 세포 내부에 있던 물질들이 사슬 부분 사이사이로 빠져나왔다. 초분자가 세포벽에 구멍을 뚫어 ‘나노터널’을 만든 셈. 생존에 필요한 물질들마저 빼앗긴 세균은 결국 죽고 말았다. 결국 나노터널이 항생제 역할을 한 것이다.

이 연구결과는 올해 4월 ‘네이처 머티리얼스’에 실렸다. 연구단은 나노터널이 특정 세균을 인식할 수 있도록 유도장치를 도입하는 연구를 계획하고 있다.


연구단은 특정 세균을 인식하는 초분자를 개발해 항생제로 응용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식중독 세균 리스테리아.


화학계의 앙드레 김

연구단의 이 같은 성과들은 지난 2002년부터 과학기술부 창의적연구진흥사업의 지원을 받아 이뤄졌다.

“우리는 화학계의 앙드레 김이라고 할 수 있죠. 옷감 대신 분자를 자르고 붙인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연구단이 ‘자르고 붙여’ 만든 분자들이 모여 조립된 초분자를 편광현미경으로 100배 정도 확대해보면 그야말로 장관이다. 빛을 비추면 일정하게 배열된 수많은 초분자가 어우러져 형형색색의 무늬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직선 모양의 초분자가 여러 방향으로 늘어서면 미로처럼, 리본 모양의 초분자가 길게 늘어서면 휘어져 마치 나무 밑동의 나이테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초분자는 생명체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단백질이 핵산을 감싸고 있는 바이러스도 일종의 초분자다. 단백질 분자와 핵산 분자가 서로 어울려 전혀 새로운 바이러스 입자를 만들어냈기 때문. 수많은 분자들이 모여 형성된 세포로 이뤄져 있고, 그 분자들이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 인체도 결국 초분자다.

초분자를 처음 인공적으로 합성하고 새로운 학문분야로 정립한 사람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 장 마리 렌 교수. 그는 이 업적을 인정받아 1987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그 후 1990년대 들어 많은 화학자들이 초분자를 개발하는 연구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최근 일본 도쿄대 다쿠조 아이다 교수팀은 직접 설계한 분자들이 저절로 모여서 매우 높은 전기전도도를 나타내는 나노튜브 형태의 초분자가 되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네덜란드 그로닌겐대 버트 마이어 교수팀은 최근 유기발광분자를 적당히 변형시킬 경우 이들이 뭉쳐서 매우 높은 광학활성을 갖는 나선형의 나노섬유를 얻을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수많은 자기조립 분자가 뭉쳐 초분자를 이루는 원동력은 바로 ‘2차결합력’. 일반적인 화학반응에서는 분자들끼리의 ‘공유결합력’으로 화합물이 만들어진다.

“2차결합력은 공유결합력 세기의 100분의 1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약하게 서로를 끌어당기는 자기조립 분자가 수십~수백개 모이면 2차결합력은 놀라우리만치 막강해지죠.”

결국 보이지 않는 나노분자 하나하나의 미약한 힘이 모여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능력의 초분자를 만들어낸다는 것. 바로 이것이 화학의 미시세계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 신세대 나노조립체 4가지 유형>;

1. 암세포 파괴하는 나노유도탄 : pH에 민감한 분자가 많이 모여 속이 빈 나노캡슐이 조립된다. 여기에 항암제를 담아 몸 안에 넣으면 pH가 낮은 암세포를 만날 경우 찌그러져 항암제가 빠져나온다. 암세포만 골라 공격하는 유도탄인 셈.
2. 세균의 천적 나노터널 : 고온의 수용액에서 가운데가 빈 울타리 모양으로 조립된 초분자. 세균의 세포막에 끼어들어가 세포 내부의 물질들이 밖으로 빠져나오는 터널을 뚫어 세균을 죽인다. 나노터널이 항생제 역할을 하는 것.
3. 폐수 정화하는 나노벌집 : 미세한 구멍이 많이 뚫린 벌집 모양 초분자. 오염된 물에 나노벌집을 넣으면 구멍 크기에 맞는 오염물질이 구멍 안으로 들어간다. 오염물질을 제거해 물을 깨끗하게 하는 수질정화 시스템에 응용 가능.
4. 만능 의약품제조기 나노공 : 막대 모양 분자가 가운데로 모이고 사슬 모양 분자가 주위를 둘러싸 조립된 나노공. 막대 사이의 좁은 공간에 유기화합물을 넣으면 꼼짝없이 반응을 일으킨다. 의약품이나 화장품 합성에 획기적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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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임소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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