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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락의 극치에서 폐허로 폼페이

로마인의 국제도시로 번영의 정점에 있던 어느날, 폼페이는 화석으로 변해 버렸다. 폼페이의 발굴은 타임 캡슐처럼 1900여년전의 모습을 재현시켜주고 있다.
 

나폴리 국립미술과에 전시되어 있는 폼페이 시가의 발굴모형. 시의 남동쪽 스타비아문 부근에서 북쪽을 바라본 것이다. 오른쪽에 남북으로 뻗은 스타비아 대로가 보인다. 중앙부에서 교차하는 도로가 아본단차 거리다. 교차점에 있는 큰 건물은 스타비아 욕탕. 왼쪽아래에 있는 것은 대소의 극장이며 그옆 모퉁이는 검투사들의 숙소다.


지중해의 태양은 언제나 변함없이 만물을 주홍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꽃사세요 꽃을 사세요 멀리에서 온 눈먼 소녀의 꽃을…. 모두가 말하듯 이 대지가 아름답다면-" 거리 모퉁이에서 꽃을 파는 눈먼 소녀의 노래가 흐르고 있다. 화려하게 장식한 마차가 지나간다. 바쁘게 오고 가는 군중의 소란….
지금부터 약1천9백년전, 로마제국 제일의 항구이고 국제상업 도시인 폼페이(Pompei·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만의 캄파니아 지방에 있었다)는 번영의 정점에 있었다.
 

공중욕탕의 테피타리움(온기실ㆍ溫氣室). 벽과 바닥에 증기가 통했다. 로마인에게 있어 욕탕은 휴식과 사교와 담소의 장소였다. 처음에는 남녀혼욕이었으나 제정기에 들어서부터 분리되었다.


즐겨라, 생명이 있는날까지

이땅에는 기원전 5세기경에 이미 그리스의 식민도시가 열려있었다. 그뒤 기원전 80년에 로마 도시의 하나가 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그러부터 1백60년 뒤에는 인구가 2만여명을 헤어릴 정도였다. 전통있는 교역활동에다 화산재 토양으로 이루어진 캄파니아 평원에서 나는 풍부한 산물이 그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시의 최고행정직인 집정관은 2명이고 임기는 1년이었다. 시의 연중행사나 의식, 공유재산 관리운영에 직접 종사한것은 시의원들로 공개선출되고 무보수였다.

시민들이 서로만나고 휴식을 취하고 축제를 벌이는 곳은 아름다운 주랑(柱廊·Colonnade)이 둘러쳐진 남북 1백61m 동서47m의 공회광장(forum)이었다. 그 주위에는 유피테르(주피터, Jupiter) 아폴로등의 유서깊은 신전이 서있고 남서쪽 모퉁이에는 법원과 상업거래장을 겸한 바실리카(basilica)가 있었다. 남쪽에는 시청청사가, 동쪽에는 공동시장이 있었다.

그리고 시 구역의 남쪽 끝에는 대극장, 소극장, 체육관 등과 새로들어온 이국의 신을 모신 이시스신전 등이 모여 있었다. 대체육관이나 인기를 모우고 있던 원형투기장은 시의 동남쪽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중 욕탕은 시내 곳곳에 있었다.

유력자의 주택은 어느것이나 호화롭고 세련되게 꾸며져 있었다. 정성들여 장식된 가구집기, 주랑을 둘러싼 화초가 화려하게 어우러진 안뜰, 하루종일 물을 내뿜고 있는 분수, 그리스신화를 소재로한 벽화등등. 이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아름답고 우아하게 생활을 즐길수 있을까에 대해 많은 궁리를 했던것 같다.

뒷날 발굴된 은잔에는 "내일이 분명하지 않을 때 인생은 바로 한편의 희곡, 즐겨라 생명이 있는날까지"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로마의 황금시대'라 할 수있는 당시의 폼페이시민이 살아가던 모습을 엿보게해준다. 그러나 이렇게 영화의 극을 이루던 국제도시도 서기 79년8월25일 베수비오(Vesuvio)산의 대분화로 하루 사이에 지상에서 사라져버렸다.
 

폼페이 중산층의 세련된 기호를 짐작케하는「벳티」의 집. 이집은 여러가지 장식품이나 가구집기가 거의 발굴된 그자리에 복원되어 놓여있다.


1983년에 밝혀진 진상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토라보'(기원전 63년~기원21년)는 "베수비오산의 산허리는 토양이 풍부하나 산꼭대기는 옛날에 불의 세례를 받아 타서 그슬린 바위들로 덮여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시칠리아(Sicilia)섬의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크루스'(기원전60년~기원30년)도 그 산이 '불의산'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폼페이를 비롯한 이산의 산록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목양신(牧羊神) 이나 님프(Nymph·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산야, 하천, 수목, 동굴등의 정령)가 즐겨 노는 평화롭고 매력적인 산으로만 알고 있었다.

이곳을 덮친 서기79년의 베수비오산의 대분화는 1900년만의 분화였다. 그것은 최근에 와서야 밝혀졌다.

이탈리아와 미국의 화산학자들이 공동으로 이 대재해의 진상을 밝혀낸것은 1983년의 일이었던 것이다. 이 조사에 의하면 최초의 이변은 8월24일 오후 1시경에 일어났다고 추정되고있다. 이때 나폴리만 입구의 미세눔 거리에서 베수비오산 꼭대기에 이상한 모양의 구름(실은 분화연기 였다)이 덮여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 잘모르고 있었지만 아마 이날의 오전중에도 화산재를 동쪽으로 흩뿌린 작은 분화가 있었을 것이다. 오후가 되자 분화가 본격화되어 다음날까지 끊임없이 경석(輕石.속돌)이 폼페이 쪽에 뿌려졌다. 이 경석퇴적물의 상반부에는 여기저기 두께 몇㎝이하의 얇은 화산재층이 끼어있다.

실은 이 재(灰)야말로 재앙의 진범인것이다. 1902년 서인도제도마르티니크섬 몽프레의 분화로 산기슭의 항구거리 상피에르 주민 2만8천명이 지하감옥에 있던 죄수 1명을 빼고 불과 몇분사이에 모두 사망했다. 이것이 분화때 동반하는 무서운 열구름(熱雲·화산에서 분출되어 산중턱을 흘러내리는 고온의 가스와 암석의 집합류)이 처음으로 세계에 알려진 예이다.

열구름은 수증기와 재와 화산성가스가 섞인것으로 폼페이에서 발견된 회층(灰層)은 그 흔적인 것이다.

베수비오 분화의 열구름은 먼저 헤르클라네움(Herculaneum·그리스 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의 도시라는 뜻)을 엄습했다. 그것은 8월25일 새벽1시를 지날 무렵이었다. 1982년에 발견된 희생자 중에는 칸델라를 들고있었던 사람이 있은 것이다.

얼굴표정까지 보존돼 있어

폼페이에 열구름이 덮친 것은 아침 7시가 지날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때 시내의 반이상이 2m가 넘는 경석으로 덮여 버렸으나 희생자는 그렇게 많지않았던것 같다. 오늘날까지 발굴된 폼페이의 희생자 유해는 견고한 건물내부나 지하실을 빼고는 거의가 경석층 위에 쓰러져있었다.

수증기 때문에 어느정도 습기가 있는 열구름속의 재는 주검에 엉겨붙어 응고되었다. 그때문에 석고로 신체의 거푸집(주형·鑄型)을 복원해보니 의복의 주름은 말할 나위없고 얼굴표정까지 보존되어 있었다. 고민하고있는 그 표정에서 열구름 속의 재와 가스에 질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헤르클라네움에서 발견된 시체는 죄수나 병자등 10명정도뿐이어서 주민은 거의 전원이 탈출했다고 추정되었다. 그런데 1982년에 나폴리만 기슭의 당시의 해변에서 엄청난 수의 희생자가 발굴되었다. 그것은 너무나 처참한 광경이어서 조사단이 숨길을 멈출정도였다. 이로써 미루어 볼때 2천명 정도로 보고있던 폼페이의 희생자도 어쩌면 그정도만이 아닐 가능성이 생겼다. 열구름이 광범위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친한 벗을 구하려 달려갔던 박물학자 푸리니우스(당시56세)도 폼페이시 남쪽 수㎞에 있는 스타비아 교외에서 아침 8시경 열구름에 휘말려 질식사했다.

공개와 보존

1709년 전혀 우연하게 베수비오의 용암아래에 잠들어있는 헤르클라네움과 폼페이가 재발견 되었다. 레지나(Resina)에 사는 농민이 우물을 파다가 고대의 유적을 찾게 된것이다.

1937년에 먼저 헤르클라네움이 확인되고 이어 폼페이도 확인되었다. 그뒤 발굴이 착수되어 현재까지 폼페이는 시가지의 약 4분의3이 드러났다.

폼페이는 동서 1천2백m, 남북6백50m다. 당시의 주택사정은 물론 일상생활의 모양을 알수있는 가구집기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폼페이에서는 경석의 온도가 낮아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어서 유력자의 주택이 시내 곳곳에서 발굴 복원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교외에 산재해있던 전원 별장도 잇달아 발견되었다. 1967년 폼페이 서쪽 토레 아눈치아타(Torre Annunzia-ta)에서 발굴된 대별장은 로마황제 네로의 제2부인 포페아 사비나의 소유로 보이며 풀을 갖춘 호화롭고 웅장한 것이었다.

폼페이와 헤르클라네움의 발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발굴품은 모두 원래의 장소에 그대로 둔다는 현장주의로 천9백년전 사람들의 생활을 현재의 사람들이 볼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현대인들을 매료시키고 감명을 주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유적의 풍화라는 새로운 문제와 이어진다. 관계자들은 공개와 보존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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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카네코 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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