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화창한 주말. 일상의 번잡함을 내던지고 간편한 등산복 차림으로 관악산을 올랐다. 땀을 뻘뻘 흘리고 마침내 정상에 오르자 차가운 바람이 금새 몸을 식혀준다. 눈앞에는 600년 고도 서울의 모습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웬걸, 맑은 날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내는 뿌연 연기에 덮힌 듯 시야가 깨끗하지 않다. 고개를 들어 도심과 하늘의 경계면으로 시선을 옮기자 갈색의 뿌연 대기층이 지표 위에 쌓여있다. 도대체 이게 뭐지?
오염물 수프 갈색구름
지금까지 흔히 광스모그로 알려진 뿌연 갈색 층은 오염발생원이 산재한 도심과 공업단지에서나 자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이런 현상이 지역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한반도 전역은 물론 히말라야산맥이나 심지어 꿈의 휴양지로 알려진 인도양의 섬 몰디브에서도 관측되는 전지구적인 현상인 것이다. 대기과학자들은 이런 현상에 ‘갈색구름’(Brown Cloud)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이름을 붙여줬다.
갈색구름이란 말 그대로 갈색의 얕은 구름층을 말한다. 하지만 갈색구름은 이름이 구름이라고 붙었을 뿐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보통의 하얀 구름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하얀 구름이 수증기로 이뤄져있다면 갈색구름은 흔히 ‘에어로졸’이라고 부르는 크기가 수십나노미터(nm, 1nm=10-9m)에서 수마이크로미터(μm, 1μm=10-6m)에 이르는 작은 입자들로 이뤄져 있다.
이런 입자는 사람들의 활동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그 성분을 조사해보면 황산염, 질산염, 암모니아, 검댕, 잿가루 등이 검출된다. 한마디로 갈색구름은 각종 오염물질이 뒤섞인 ‘오염물 수프’인 셈이다. 갈색구름이 갈색을 띄고 있는 이유는 이런 오염물들이 태양에서 오는 가시광선을 흡수하거나 산란시키기 때문이다. 갈색구름의 층 두께는 오염원이나 그 지역의 기상, 지형적 여건에 따라 수백m에서 수km에 이른다.
갈색구름은 동남아시아와 미국 그리고 아프리카 지역에서 심각한데, 이는 이 지역에 건기가 오래 지속될 뿐 아니라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오염원이 매우 넓게 퍼져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공위성으로 갈색구름을 관측해보면 그간 동아시아 지역에 출현 강도가 매우 높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아시아일까.
이 지역에는 지구촌 인구의 반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게다가 중국 등에서 최근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아시아가 지구촌 대기 오염물질의 중요한 배출원이 되고 있다. 기후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에어로졸 성분인 검댕의 전지구적 방출양의 최근 변화추세는 이를 잘 반영해주고 있다. 중국,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이 전체 검댕 방출양의 약 절반을 차지한다.
에어로졸이 기후변화의 주범?
갈색구름은 요즘 대기과학자들의 큰 걱정거리중 하나다. 최근 대기 연구결과를 보면 갈색구름이 아시아 뿐 아니라 지구촌 모든 곳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갈색구름 입자가 대기의 움직임을 따라 빠른 속도로 넓게 퍼지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갈색구름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대기오염이 우리들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갈색구름의 존재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갈색구름은 과거 스모그가 그러했던 것처럼 천식과 같은 호흡기 질환 등 다양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대기과학자들은 또 다른 이유로 갈색구름을 염려하고 있는데, 바로 갈색구름이 전지구적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지구가 당면하고 있는 지구환경문제의 핵심은 지구온난화로 나타나는 기후변화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는 2001년 발간한 제3차 보고서에서 “지난 120여년 간의 모든 과학적 기록을 분석한 결과 지구 표층은 약 0.6℃ 정도 더워졌다”며 “여러 객관적인 증거들을 통해 이러한 온난화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사람들의 영향임을 알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보고서를 보면 사람들의 활동으로 대기 중에 농도가 늘어난 탄산가스와 같은 온실기체들이 지구온난화에 미치는 정도가 상당히 믿을만하게 추정돼 있다.
반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에어로졸이 기후에 미치는 영향, 특히 에어로졸이 대기 중 구름의 형성과정을 변화시켜 간접적으로 지구 기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해는 매우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지구온난화와 같은 지구 기후 변화는 전지구적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되는 반면 에어로졸의 효과는 대개 지역적으로 나타나서 그 효과를 간단하게 비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햇빛을 산란시켜 지구를 냉각시키는 에어로졸의 효과가 기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혹은 이와 정반대로 온실기체가 지구의 온도를 높이는 효과를 상쇄할 수 있을 만큼 그 영향이 클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이에 대해서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다. 현재로서는 갈색구름에 대해서 알고 있는 내용이 매우 미흡하고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몰디브가 최적의 장소
그렇다면 갈색구름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원인을 규명하는데 적합한 곳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할까? 갈색구름의 전지구적인 영향을 평가하려면 오염원을 발생시키지 않으면서도 갈색구름을 관찰 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처음에 과학자들이 점찍은 곳은 인도양의 작은 섬 몰디브였다.
몰디브는 인도양의 계절풍인 몬순으로 인해서 그곳에 도달하는 공기가 여름과 겨울에 그 성질이 완전히 뒤바뀐다. 여름철이면 남반구의 먼 바다에서 깨끗한 공기가 불어오는 반면 겨울철이 되면 바람의 방향이 뒤바뀌어 티베트 고원에서 시작된 공기가 인도를 거치면서 대륙성의 오염된 공기가 불어온다. 몰디브는 깨끗한 공기와 갈색구름을 포함한 오염된 공기를 동시에 연구할 수 있는 지리적인 이점을 가진 최적의 장소다.
1998~1999년에는 몰디브를 중심으로 기구, 선박, 비행기, 인공위성, 지상 관측 등이 포함된 ‘인도엑스 연구계획’이 수행됐다. 이를 통해 인도에서 불어오는 육상기원의 공기에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갈색구름이 포함돼 있음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또 갈색구름이 전지구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더욱 장기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런 이유로 최근 ‘아시아 ABC 연구계획’이 시작됐다. ABC(Atmospheric Brown Cloud) 연구계획은 유엔환경회의와 세계기상기구의 공식후원 하에 1995년 오존층의 화학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크루첸 교수를 비롯해 전 세계의 저명한 대기과학자들이 100여명 이상 참여하는 대규모 국제공동관측실험이다. 이를 통해 갈색구름의 핵심이 되는 에어로졸의 물리적·광학적·화학적 특성과 대기 중의 분포를 규명하는 연구를 수행하는 한편 갈색구름이 지구 대기로 들어오는 햇빛에 미치는 영향을 종합적으로 규명하게 된다. 인도양, 아시아대륙, 태평양 지역의 대기 오염을 종합적으로 추적하는 약 20여개의 관측점을 세우고 10여년에 걸쳐 장기적인 관측을 수행할 계획이다.
특히 중요한 몇 곳에는 거점관측소를 설립해 최우선적으로 종합관측을 하게 되는데, 아시아 ABC 연구계획의 첫 번째 거점관측소는 자연히 인도엑스 연구계획을 수행했던 인도양의 몰디브로 정해졌다. 몰디브 거점관측소는 이미 지난해 10월부터 갈색구름 관측에 들어갔다.
몰디브에 이어 전 세계 대기과학자들의 눈길이 모인 곳은 바로 제주도의 고산이다. 제주도 서쪽 해안에 위치한 고산은 지역 오염원이 없고, 계절에 따라 아시아 대륙과 태평양에서 기원하는 공기를 관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연적인 입자인 황사와 인공적인 입자인 갈색구름이 모두 관찰되는 특수한 지리적인 장점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의 대기과학자들은 해발 77m의 나즈막한 봉우리에 있는 고산기상대에서 한반도의 대기환경 관측을 활발히 진행해 왔다. 탄산가스를 비롯한 온실기체와 오존 등의 오염기체, 에어로졸의 화학적 특성에 대한 조사가 10여년 이상 수행돼 왔으며 최근에는 에어로졸의 광학적 특성을 조사하는 연구도 활성화되고 있다. 또 지난 2001년에는 극동아시아 지역의 에어로졸 특성을 조사하는 국제공동연구인 ‘ACE-아시아 연구계획’에서 고산이 종합관측점의 하나로 선정돼 세계의 많은 과학자들이 이곳에서 연구를 수행하기도 했다.
유엔환경계획은 갈색구름이 초래할 기후변화와 그로 인해 농작물에 미칠 피해를 걱정하고 있다. 인도양에서 발견된 거대한 규모의 갈색구름 띠가 햇빛을 흡수하거나 산란시켜 지표면에 도달하는 햇빛의 양을 감소시키고 그 결과 해양에서의 수증기 증발량이 줄어들어 강수량이 줄게 되며, 따라서 농업생산량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쌀과 콩 등은 생산량이 20%까지 감소할 수 있다는 예측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기과학자들이 갈색구름에 대해 알아낸 사실은 극히 적다. 갈색구름이 지구를 뜨겁게 만들지 차갑게 만들지도 분명치 않다. 아시아 ABC 연구계획을 시작으로 갈색구름의 비밀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있을 뿐이다.
고산에서 갈색구름 잡는다
지난 3월 3일부터 한국을 비롯해 일본, 중국, 미국, 스웨덴 등 전세계 50여개 기관에서 많은 과학자들이 각자의 관측 장비들을 갖고 고산에 모여 ‘ABC 고산실험’이라는 이름으로 공동관측을 진행 중이다. 4월 중순까지 진행되는 ABC 고산실험을 통해 과학자들은 함께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서로의 장비를 비교, 검증하면서 종합적인 상호보완작업을 하고 있다. 고산에서뿐만 아니라 기상청이 소유한 선박을 타고 제주도 일대의 해양에서 관측을 하고, 우리나라 지구기후관측점인 안면도에서도 공동관측을 수행하고 있다.
대기, 에어로졸, 대기복사의 세 부분으로 크게 나뉘어 이뤄지는 공동관측을 위해 관측 자료의 해석에 필수적인 여러 인공위성 자료나 컴퓨터모델 자료들이 총 동원되고, 매일 매일의 결과는 인터넷(http://abc-gosan.snu.ac.kr)을 통해 전세계 모든 과학자들에게 알리고 있다.
고산실험 기간이 끝나도 갈색구름 관측은 지속된다. 고산실험에 참여했던 외국 과학자들은 자신의 장비를 갖고 다시 각자의 관측점으로 돌아가 그 곳에서 갈색구름 연구를 위한 관측을 계속 수행한다.
한국에는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의 윤순창 교수와 필자를 공동의장으로 연세대, 고려대, 한국외대, 광주과학기술원 등 여러 대학을 비롯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기상연구소, 국립환경연구원 등 여러 연구소의 과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한국 ABC 연구계획’ 연구단이 구성돼 있고, 이들을 중심으로 고산에서 갈색구름을 계속 관측할 예정이다.
각종 첨단 장비가 동원된 이런 중요한 국제적 연구과제에서 한국의 대기과학자들이 중심이 된 거점관측소가 한국에 설립된 것은 일면 큰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갈색구름이 아시아 지역의 기후와 농업환경 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밝히는 데 한국이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