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사로운 봄볕 아래 낮잠 자던 아기가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에 기지개를 편다. 햇살에 눈이 부신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다.
사람의 눈에는 빛의 양을 조절하는 홍채가 있다. 밝은 곳에서는 홍채가 이완, 동공(눈동자)의 크기를 줄여 빛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들어오지 않게 조절한다. 반면 어두운 곳에서는 홍채가 수축, 동공의 크기를 늘린다. 카메라의 조리개도 이와 같은 원리다.
최근 국내 연구진이 사람의 눈동자나 카메라의 조리개처럼 식물도 받아들이는 빛의 양을 필요에 따라 적절히 조절하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세계 최초로 밝혀냈다.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남홍길 교수와 유종상 박사 연구팀은 식물에서 발현되는 ‘피토크롬’이라는 단백질에 주목했다. 싹이 틀 때부터 꽃을 피울 때까지 식물의 모든 성장과정은 빛에 의해 조절된다. 식물은 빛을 받아들이는 여러가지 광수용체를 갖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피토크롬이다.
광수용체 인산기 몰아내는 단백질
피토크롬은 660나노미터(nm) 파장대의 적색광과 730nm 파장대의 원적색광을 감지한다. 피토크롬이 감지한 빛은 세포 내 수많은 중간물질의 복잡한 네트워크를 거쳐 전달된다. 세포 곳곳에 전달된 빛은 광합성을 비롯해 식물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각종 화학반응을 일으키는데 쓰인다. 피토크롬은 1952년 미국 생물학자 보스윅과 헨드릭스가 처음 발견했다.
빛이 없을 때 피토크롬은 Pr 형태로 존재한다. 이때는 생물학적으로 활성이 없다. 빛이 들어오면 피토크롬은 빛을 잘 전달할 수 있는 활성 상태인 Pfr 형태로 변신한다. 이때 일부 피토크롬의 경우 빛이 세포 내로 한꺼번에 너무 많이 전달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산기가 결합해 활성을 감소시킨다. 피토크롬은 스스로 또는 다른 인산화효소의 도움을 받아 이 같은 인산화 반응을 일으킨다.
인산화 반응은 생물체 내에서 여러 수용체 분자의 각종 기능을 조절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피토크롬의 빛 전달 과정에도 인산화 반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실험 근거들은 지난 10여년간 꾸준히 보고돼 왔다. 그러나 피토크롬의 인산화 반응이 세포 내에서 어떻게 조절되는지는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다. 이번에 남 교수와 유 박사 연구팀이 이 수수께끼를 명쾌히 해결한 것.
연구팀은 애기장대(Arabidopsis)라는 식물을 이용해 피토크롬과 직접 결합하는 단백질들을 조사했다. 그 중 활성 상태인 Pfr 피토크롬을 찾아내 결합하면서 피토크롬의 가운데 부분에 붙어있는 인산기를 떼어내는 단백질을 발견했다. 연구팀은 이 단백질에 ‘PAPP5’라는 이름을 붙였다.
식물 속 생화학 조리개
연구팀은 이번엔 귀리에서 분리한 피토크롬을 이용해 PAPP5가 피토크롬의 형태에 따라 결합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실험했다. 그 결과 PAPP5는 Pfr 피토크롬에 비해 Pr 피토크롬에 약 40% 덜 결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PAPP5에 의해 인산기가 떨어져나간 Pfr 피토크롬은 세포 내에서 빛을 이용하는 화학반응의 초기 단계를 조절하는 NDPK2라는 물질과 잘 결합한다. Pfr 피토크롬과 NDPK2가 만나면 화학반응의 다음 단계로 신호가 전달된다.
결국 PAPP5가 피토크롬의 인산화 상태를 조절해 빛 전달에 관여하는 중간물질에 대한 결합력을 좌지우지하는 셈이다. 식물체 내에 있는 수많은 피토크롬 중 활성화 상태인 것이 많을수록, 또 그 중 인산기가 떨어져 있는 형태가 많을수록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중간물질과 좀더 잘 결합한다. 그러면 빛을 좀더 많이 받아들일 수 있고, 빛을 이용한 화학반응도 더욱 활발히 일어나게 된다.
남홍길 교수는 이번 연구결과를 “사람 눈의 홍채나 카메라 렌즈의 조리개처럼 식물에서도 흡수한 빛의 양을 필요에 따라 적절히 조절하는 고도로 정교한 생화학적 조절 메커니즘이 존재함을 증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식물체 내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들은 빛의 양이나 세기 등의 변화에 아주 민감하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 필요한 화학반응이 적절히 일어나려면 식물이 받아들이는 빛의 양이나 세기를 정교하게 조절해야 한다. ‘생화학적 조리개’ 역할을 하는 PAPP5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피토크롬은 가운데 외에 한쪽 끝부분에서도 인산화 반응이 일어난다. 피토크롬이 불활성 상태인 Pr에서 활성 상태인 Pfr로 형태가 바뀐 후에도 말단에 인산기가 그대로 붙어있으면 활성 피토크롬의 안정성이 떨어진다. 특히 애기장대에 있는 A, B, C, D, E 다섯 가지 피토크롬 중 피토크롬A의 경우 활성 상태로 바뀐 후에도 말단 인산기가 붙어있으면 빛을 전달하고 나서 곧바로 파괴되고 만다.
연구팀은 PAPP5가 피토크롬의 말단 인산기도 떼어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말단 인산기가 떨어져나간 활성 피토크롬A는 안정화돼 수명이 길어져 빛을 전달하는 역할을 좀더 오래 할 수 있게 된다.
연구팀은 지난 2001년부터 애기장대의 피토크롬과 직접 결합하는 단백질들을 연구해왔다. 애기장대는 세대 간의 길이가 2달 반~3달 정도로 비교적 짧고, 온대지방에서 잘 자라며, 하나의 씨앗으로부터 많게는 4만여개 씨앗까지도 얻을 수 있다. 애기장대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료되기 이전에 이미 유전자 서열이 전부 밝혀졌다. 또 5쌍의 염색체 내에 비어있는 공간이 거의 없어 어느 위치에 있는 유전자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 키, 색깔, 잎 모양 등 겉으로 나타나는 표현형도 매우 다양하다.
이와 같은 장점들 덕분에 애기장대는 1985년부터 식물분자유전학 연구의 모델 식물로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 단 애기장대로부터는 피토크롬을 순수한 상태로 분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연구팀은 귀리도 함께 이용했다. 귀리에서는 피토크롬을 분리하기가 비교적 쉽고 피토크롬의 성질이 애기장대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비롯한 동물의 경우에는 피토크롬 대신 로돕신이라는 광수용체가 빛을 받아들인다. 로돕신의 생리활성 역시 인산화 상태에 따라 조절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메커니즘이 작용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연구팀은 애기장대를 비롯한 몇몇 식물에서 PAPP5 유전자를 과다 발현시켜봤다. 그 결과 빛에 대한 민감성이 실제로 20~30% 정도 증가했다. PAPP5 유전자가 피토크롬이 최적의 상태로 빛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조절한 것이다.
일조량 적어도 고품질 벼 수확
“농작물에 PAPP5 유전자를 삽입하면 적은 양의 빛을 효율적으로 받아들이고 전달할 수 있어요. 이를 응용하면 일조량이 적은 지역에서도 고품질의 작물을 많이 수확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연구를 주도한 유종상 박사는 이같이 전망했다. 연구팀은 곧 PAPP5 유전자 연구를 벼에 적용해볼 계획이다.
세계적인 세포생물학 전문지 ‘셀’ 2월 11일자에 실린 이번 연구는 과학기술부와 농촌진흥청이 지원하는 21세기프론티어연구개발사업의 지원으로 금호생명환경과학연구소,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연구팀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이뤄졌다.